25-2 리뷰들 중..
쉘부르의 우산, 자크 드미 - <색채 없는 사랑의 진실됨>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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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라>와 <쉘부르의 우산>의 형식과 내러티브 모두가 대척점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은 첫 번째 작품 <롤라>의 제작 이후 어쩌면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허무주의의 흑백 세계에서 군더더기 없이 정의되었던 드미의 사랑은, 온갖 색채와 멜로디가 덧씌워진 소위 ‘영화같은 사랑’의 렌즈로써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을 구현해 한 번 더 강조되는 식이다. 말해서, <롤라>의 칙칙한 화면-현실과도 가장 가까운-으로부터 촉발된 사랑은 이루어지지만, <쉘부르>의 뮤지컬같은 사랑에 대한 일종의 오해이자 몽상은 직면하는 현실에 의해 당연히도 와해된다. 따라서 세실의 사랑은 왜 이루어졌고, 롤랑의 사랑은 못 이루어졌는지를 넘어, 그렇다면 변화한 그가 과연 사랑을 이룰 수 있을 것인지를 확인해야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방황의 끝에 이루어진 사랑과 프랑수아라는 이름만이 남아, 화해되지 못한 사랑의 간극은 결국 현실을 닮는다.
드미의 영화는 그 어떤 멜로드라마보다도 현실적이지만 회의적이지는 않다. 사랑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의 것이 더 아름답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되묻는 것이다. 매체가 굳이 만들어내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공감할 첫사랑의 강렬한 힘은 인정하되, 운명에 맹목적인 사랑에게는 실상을 디밀어 보인다. 사랑은 점지되어 상대에 의해 구원받는 행위가 아니라 일상의 산물일 뿐이며, 영원히 지속되기보다도 남겨진 데에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독한 현실주의자인 드미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이루어지는 꼴을 보지 못하고, 일상의 아름다움 아래서야 사랑을 허락한다. 덧붙여 남성이라는 존재 없이도 삶과 현실 현명하고 또렷이 살아가는 여성들이 영화에서 매력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도 동일한 맥락에서이지 않겠는가.
삶이란 운명에 대한 맹목보다도 비일관성과 유동성에 그 명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각자의 사정 안에서는 운명같다 믿었던 사랑도 제 힘을 발하기는 쉽지 않다. 사랑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거나 더 이상 믿지 못하더라도 삶은 흘러가고 그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니 대개는 사랑을 믿지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육중한 무게 앞에서 사랑이란 이 모든 것을 감싸기에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사랑을 불신하는 도중에도, 한 가지 자명한 것이자 요행아닌 요행이라 함은, 첫사랑에 대한 깨지지 않을 기대이다. 늘 이루어지지 않는 미숙하고 모순적인 처음의 감정이지만, 강렬하다. 사랑 자체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한 힘으로 우리가 하는 사랑의 모양을 다듬어놓고서 무화된다. 그렇기에 기와 쥬느비에브는 서로에게 더이상 특별하지는 않음에도, 프랑수아라는 같은 이름을 한 존재를 순리처럼 부른다. 롤랑 또한 세실에게 하지 못 했던 방식의 접근으로서 쥬느비에브에게는 용기를 낸다. 기와 쥬느비에브는 그 이름을 부르면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얼굴이 아주 가끔은 떠오를 것이며, 롤랑은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세실의 얼굴이 아주 가끔은 떠오를 것이다. 사랑이 남기는 것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드미는 일상적 수준에서의 낭만을 가장 현실적인 방식으로 제시한다.
릴 퀸퀸, 브루노 뒤몽 - <볼 수 없다는 믿음> 중 발췌
200분의 지리한 러닝타임을 버티고서 느슨하게 쥐었던 주먹을 펴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토록 찾아해맸던 범인도, 왜 그들이 죽어야만 했는지도 알 길이 없다. 인식하고 언어로 사유되는 명확한 이유나 규정보다도,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현실의 고운 입자들이 그 무엇으로도 포착 불가능한 방식으로 부유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손을 뻗어 닿아보려고 하면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이 빠져나가 피부에 스치는 예민한 감각만이 뚜렷해진다. 거죽을 양쪽으로 훤히 열어젖혀 장기가 어떻게 배열되어 있고 뼈가 어떤 모양으로 자리잡고 있는지, 이 체부까지 모두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이 잔혹함을 완전히 재현한 ‘볼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영화는 비스듬히, 그리고 삐뚜름한 것들을 눈앞에 들이민다. 볼 수 있고, 규정할 수 있을 거라며 부딪혀오는 직선의 궤적은 묘하게 휘어있는 존재들을 맞추지 못하고 벗어난다. 닿을 수 있는 것 같은데도 닿지 못하고, 그 무엇도 긍정하지 않는데,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미지의 산물인 영화에서, 이 <릴 퀸퀸>에서 그렇다면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수사물의 믿음을 완전히 져버린 이 영화는 형식 자체를 깨트리면서까지 무엇을 감각하기를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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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끔찍한 살인사건을, 잘려져 목초지에 나뒹구는 목을, 소의 갈라진 배를 모두 재현하고 노출하지만, 정작 범인을 특정하는 데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무언가를 분명 보고있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증은 없고 심증만이 존재한다. 언어로 설명 불가능한, 감지할 수 있는 인간의 감각만이 불가사이하게 남는다. 무언가를 볼 수 있냐는 물음에 결국 볼 수 없다는 귀결에 당착함에도 한 방향만을 향해 기묘하게 작동하는 인간의 사고에는 정면으로 부딪히는 듯하다. 이 영화의 축적된 모호함과 덧없음은 사건을 명확하게 정리하려고 시도했던 이-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적지 않은 상실감을 안긴다. 영화는 이 상실감을 위해 다리를 절뚝이며 달려왔다. 영화는 명확하지 않으며 오히려 불투명하고 불확실하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의 결함이라기보다도,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현실은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이다. 논리만을 따르는 삶이라는 말만큼이나 모순적인 것이 없다. 늘 불완전하고 불가해한 일상과 현실에서 많은 것들은 볼 수 없다. <릴 퀸퀸>은 우리가 아는 이러한 현실과는 반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의 극단에까지 해부하듯 밀어붙인다. 그럼에도, 그 ‘볼 수 있음’으로부터 취할 수 있는 것은 사유로 포착이 불가능한 ‘느낌’이다. 전부를 목도하더라도 볼 수 없는 것, 느낄 수만 있는 것이 현실의 비가시적인 부분을 분명 할애하고 있을 것이라는 부피감. 이러한 보이지 않는 것들, 즉 현실의 근원적인 실체에 대한 감각은 볼 수 있는 극단의 지점에서 부각된다. 우리의 머리를 울렸던 상실감은 결국 볼 수 있는 것에 더 이상 천착하지 않고 그것이 남긴 여백의 윤곽을 감지하는 방향으로 향할 수 있게 한다.
영화는 텅 비어있는 듯 보이고, 인물들의 얼굴에서 어떤 것도 쉽게 읽어낼 수 없다. <릴 퀸퀸>의 내러티브에 대한 합리성과 논리에는 여전히 공백이 가득하고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쌓여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감각만은 선명하다. 생동하는 아이들, 덧없는 자연의 아름다움, 끔찍한 살인의 붉은 빛, 장애를 가진 이들의 깨트리는 소리와 춤을 추듯 역동적인 움직임. 이것들은 이성을 경유하지 않고 감각과 진실에 직행한다. 이는 합리적이라는 명목 아래 규정되고 의미화 되어 그 주변부로 밀려난 존재들에게도 같이 적용된다. 존재적 차이가 아니라 감각적인 차이에 불과하므로 이 세계에서는 정상성이 적용되지 않는다. 전제조차 하고 있지 않기에 와해나 무화는 다른 세계의 기투다.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도 없는 감각은 스스로의 매끈함으로 정상성이 설 수 있는 마찰을 마련해주지 못 한다. 언어로도 표현되지 못하는 이면의 존재들을 크게 상정하는 이 영화는 ‘볼 수 없음’으로써, 소외되었던 이들의 존재감을 체감하게 한다. 뒤몽의 시선은 삐뚤어지고 어긋나서, 그저 ‘보는’, 정렬된 길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것들에게까지 머무를 수 있다.
쉽게 설명이 불가능한 이 프랑스의 작은 해안가 마을에 사는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당연하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의 안부를 알고, 서로의 상황을 이해한다. 피해자들을 누가 죽였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사고사로 죽었는지도 불분명하지만 왜 죽였는지는 말로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고, 위로할 수 있다. 서로를 보듬으며 세계를 예민하게 체감하는 아이들의 존재가, 돼지에게 잡아먹혔던 여자 아이의 사려가 아무것도 모를 이 세계로부터 미약하게 구제한다. 아이들은 논리에서 벗어나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그들은 막연한 영화의 공허로부터도 우리를 구하고, 생동한다. 퀸퀸과 이브의 포옹은 서서히, 오래 남겨진다.
엉클 분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 <나는 당신이 될 수 없어서>
영화에서 시간성은 공시적, 통시적 그 어느 쪽으로도 귀결 시킬 수 없이 모호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도, 카메라의 움직임도 마찬가지이다. 종과, 시간과, 생과 죽음을 넘나드는 기이한 관계성을 카메라는 롱쇼트로 오래 머문다. 그들이 지나가고서도 카메라는 구태여 움직임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며 빈자리를 응시한다. 어딘가 분명히 기이하고 소름 끼쳐야할 것들 투성이지만, 이 영화는 스릴러의 문법과는 어쩐지 무관하다. 그 무엇도 두려운 것이 되지 못한다. 이토록 불가해한 영화는 이미지와 빛의 잔상만을 남길 뿐이다. 그 어떤 일도 제대로 일어나지 않지만 푸르스름한 새벽과 밤의 미명이, 차를 타고 가던 여자의 얼굴에 비치던 빛만이 선명하다. 아피찻퐁의 영화는 그 지점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다. 그 빛을 상기시키면, 그의, 그녀의 아무것도 아닌 것 같던 순간들이 아무렇게나 다시 정렬되기 시작한다. 그 무엇 하나 분명하지 않고 모호한 말들이, 그 시간성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새롭게 재구성된다. 이렇게 무작위의 방향으로 발산할 것 같던 그 모든 시도들은, ‘엉클 분미’라는 제목에 의해 차분하게 수렴한다. 그 모든 영화의 시도 안에 그의 존재가 어떤 식으로든 겉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신장 기능이 왜 약화-혹은 완전한 불능 상태에 처했는지, 그를 거치지 않고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인다. 하물며 이 ‘불가해함’조차도. 그렇다면 제목이 상기하듯 그의 존재는 이 모든 기이함이 발생하는 맹아이다. 유령처럼 영화를 떠돌던 이 모든 감각은 영화가 끝이 나고서야 그 아래 모인다. 그러나 그마저도 방향성일 뿐이다. 그러나 그 미약한 방향성이 자신의 언어 자체가 된다. 어떻게 그 근원으로부터 출발한 감각들을 돌아보고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인지, 이는 유동적인 구문인 것이다. 내밀한 경험으로부터 보편으로 올라가는 상향식도, 보편으로부터 내밀하게 들어오는 하향식도 모두 가능하다.
적확하고 명쾌한 언어로 이 영화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모두 무화된다. 이유 없이 나타나는 죽은 아내의 유령을, 원숭이 귀신이 된 아들을, 한 쪽 다리를 저는 처제를, 갑작스레 들어오는 공주의 전생을, 총을 든 소년들의 푸티지를, 어떻게 한 다발로 묶어 언어로 체계화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기이한 경험의 연속들에서 업보와 전생만이 명확하다. 내가 저지른 것들은 모두 돌아올 것이라는 카르마, 그리고 윤회가 필연적이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생의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기에 잘 살아야 한다는 종교적 믿음. 전생을 볼 수 있는 분미 아저씨, 그는 자신의 업보를 겸허히 받아들인다. 그러나 어떤 업보를? 공산주의자를 죽인 업보라면 그는 태국 공산반란을 제압했던 군인이었을까? 그 모든 맥락을 떠나서 개인은 고통받는다. 아내는 사유는 모르나 요절했고, 아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아있는 유령이 되었다. 신장의 기능은 완전히 망가졌으며, 그는 보지 말아야 할 전생을 본다. 이것은 개인의 트라우마를 세밀한 겹들로 그려나가는 과정이다. 시간과 종교성을 뭉크러뜨리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이어지는 숏들 사이에서 자생하는 이미지는 조각 난 채로 힘을 가진다. 그것을 훼 놓는다고 해서 존재는, 실재에 대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거나 어떤 찰나는 영화에서도 그랬듯, 정확히 비추어질 때 소멸한다. 역사적 사실이나 서술은 관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건조한 시선은 정동과 상상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엉클 분미>는 그 무엇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없으나 그 미학이 모든 것을 담지하고 있다. 우리가 억척같이 직관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할 것을 이미 예견하고 있기에 그 과정에 차라리 자유를 주고, 실재의 미끼를, 혹은 그 흔적 자체를 영화로 구현한다. 그가 쥐어준 것은 농락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한다. 모든 것은 분미 아저씨의 빛 아래 제약 없이 떠돌며 어떤 것에든 편히 안착한다. 공감이 아니라, 상상과 재구성을 통한 정동이 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만들지도 모른다. 동일한 감정을 느끼거나 경험을 할 수 없다는 전제를 인정하는 일과도 비슷하다. 그렇기에 그에게 조금 더 닿아보기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상상하고 느낄 뿐이다.
영화가 해낼 수 있는 것이 경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