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양, 코고나다(2021)
기억에 관한 소고
자신을 정의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근본적인 본질의 부재에 대한 착오 속에서 부유하는 가능성에 손 뻗는 일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 혹은 세계가 그 완전한 단절과 불가능성에 대한 확언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다면 희망은 곧 가능성으로 시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인의 기억과 시선은 이러한 틈과 경계 위에서 자문하고,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구성해 나간다. 그러니까, 시도다. 정의 불가능성에 온 힘을 다해 부딪히면서도 무의미하다고 하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을 ‘양’의 이후에 목도한다.
같은 순간에도 기억은 사람의 수에 따라 생겨나며 잊힌다. 동일한 상황에서도 시선이 순간을 읽는 방식과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할지 되뇌는 일은 모두에게 다르게 남는다. 완전히 같은 기억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그렇게 택해진 순간의 종합은 단순한 과거의 복제 그 이상이다. 영화에서 가시적으로 재현되고 기록된 하나의 기억은 이렇듯 산발된 채 여기저기를 훑던 시선들을 모아 공통된 장면에 접속하게 한다. 이러한 경험은 오히려 우리가 무엇을 마주하느냐에 몰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순간을 애도했는지, 어떤 순간을 왜 기억해야 했는지, 결국 우리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자신을 존립할 수 있게 하는 사유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은 언제인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를 정의할 수 있는가? 그 무엇도 분명하지 않다. ‘무엇이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가’라는 물음에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존재의 이유를 파고들 때, 설명 가능한 본질 혹은 흠 없는 진리가 아니라 모호한 가능성과 불완전을 놓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은 단절이 아닌 모든 시도의 촉발이 된다. 이 영화는 가시적인 기억의 형태를 통해 우리를 구성하는 것들의 취약함이 결코 허무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저 뒤에서 사랑을 지켜보는 경험, 명확한 목적 없이 추출되는 공허한 자연과 생애의 표상. 메모리 박스의 장면들이 결국 구현해 내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인 지점에 닿을 수 있다는 증명보다는, 그럴 수 있을 거라 믿는 능력이다. 우리 삶에 명확한 답이 없는 이유도 다름이 아니라 우리에게 상동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정해지지 않은 불완전한 상태 속에서만 최선의 시도에 이를 수 있다. 인간의 결핍을 보충하는 목적으로 제작된 안드로이드로서 완전하길 기대되지만, 인간을 사랑하며 한 세기를 지낸 로봇의 기억에서 목적은 부가가 된 듯하다. 그는 기록하지 않는다면 잊힐, 무의미하고 완벽하지 않은 장면을 모은다. 그때 그가 묻는 것은 그의 쓰임새에 정합적인 목적성이 아닌 생애에 대한 불완전한 이유다. 그러므로 이유의 자리를 보전한 사소한 컷에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저 생애의 단순함이 아니다. 그 사적인 순간들 자체를 중핵으로 삼고자 하는 의지다. 삶의 조각은 유기적임과 동시에 하나의 가능성이다. 자아와 스크린의 그 접점에서 마주하는 불완전함은 그 무엇도 온전히 정의 내리지 않은 채 우리의 자리를 마련한다.
무엇이 무엇다울 수 있음이라는 본질을 제시하기보다 타자와의 경계를 해체함으로써 양이라는 보편의 의식, 순간을 감응하는 방식을 통해 모두를 각자의 자리에 서 있는 그저 ‘존재’로서 이해하는 것. 외부에서 나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이것들을 구성해 온 기억이라는 가공되지 않은 근원으로부터 스스로와 다시금 마주하고 위로한다. 그렇기에 기억과 이를 택한 찰나의 의식이 틈입 된 컷들은 단순히 문화 테크노라는 종의 단순한 삶의 박제나 정의가 아니다. 무, 즉 그 모든 것을 넘어 목적을 배제한 무의미로서 전유되는, 자신만이 정의할 수 있고 닿을 수 있는 지점이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다양성은 기억이라는 담론 속에서도 이 시도를 설명하는 촉발이 되며, 모두는 양의 기억의 새로운 당사자로서 삶의 면면을 낯설고도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재회한다. 결국 삶이 여기 있음을 쓰다듬으면서 나의 존재에 질문을 한번 더 던지는 것, 사실 그 어떤 순간도 무의미할 수 없다는 역설을 여전히 화면은 믿고 있다.
기억들을 이 영화는 죄다 모은다. 사랑과 무해, 미명과 성장, 모든 것 혹은 전체 같은 조각을. 그것들이 결국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존재는 직립한다. 기억은 과거의 모조가 아니다. 모두는 이러한 순간을 감응하고 애도하는 개인적 층위를 겹겹이 마주함으로써 그저 한 개인이라는 위치에서 이해받는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라지기에 아름다운 것들을 기록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로봇이 아니라, 그저 ‘양’일 뿐. 양의 이후에 모두에게 가져올 변화를 생각한다. 그리고 위로받을 존재들의 이후를 떠올린다. 세계와 자아 사이에는 확답이 없는 채 남아야 할 질문들이 있다. 영화는 고작 순간, 또 기억하지 않으면 사라질 무 無로, 삶의 불가해함이라는 난제에 시도한다. 그리고 또 다른 시도를 기다린다. 그 이후를 남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