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2 영화
자비에 돌란_<마미> 리뷰 중 발췌
...<마미>의 인물들은 어쩐지 전부 나사가 하나 둘씩 빠져있다. 그러나 영화는 정확한 언어로 이들의 증상을 발화하지 않고, 설명하길 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짐작만이 가능해지고, 그 짐작은 영화의 구석진 자리에서 무심히 확인시켜주듯 스쳐지나간다. 왜 안식년을 가지고 있는지, 왜 말을 더듬는지, 왜 폭력적이게 되었는지, 왜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는지. 그들의 배후는 가장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라는 공통분모로 묶이나 그 내밀한 맥락은 알 수가 없다. 그야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짐작뿐이기에 우리는 다른 것에 더 집중한다. 추측의 창을 열어놓는 것은, 무분별하게 왕래하며 그들의 속내, 혹은 원인을 헤집어놓는 대신 사후의 회복에, 그리고 현재에 주목한다. 말해서, 가역성에 대한 이상을 져버리고 실존의 물음에 답하기로 한다. 본래적인 ‘나’를, 지금-여기의 ‘나’에 집중한다. 죽은 자가 남기는 징후 위로, 새로운 층위들이 쌓여간다. 살면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큰 수준의 충격으로 인해 벌어진 가장 유약한 내면은, 또 기계적인 애도가 아니라 스스로가 만들어낸 증상적인 애도는 더 이상 죽음 이후의 ‘부산물’로서만 해명이 불가능하다. 내게 가까운 사람이 죽어서 이러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은 피상적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충격을 받아들이며 남겨진 이들 자체에 주목한다. 각각의 방식으로 나아지기를 노력하는 인물들로부터 우리는 죽음이 남긴 흔적보다도 개인의 ‘애도의 증상’ 내지 ‘증상으로서의 애도‘를 목격한다. 삶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할지 고민하는 과정에 산 자들이 의도치 않게 담지한 실존의 흔적이 있다. 우리가 이 영화에 공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다이, 스티브, 카일라 이 모두가 어떤 다짐으로 트라우마적인 죽음 앞에 스스로가 버티기를 선택했는지, 그 사적인 사랑의 마음들에 균열읾에도 내가, 혹은 서로가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조심스럽게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나흘 밤을 보내는 몽상가-
...나흘밤만을 살아낼 수밖에 없는 몽상가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았네. ‘나에게 아주 소중했던 것이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걸 알게되죠.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이 아니라서 후회도 할 수 없어요.‘ 니힐리즘의 얼굴을 한 사내들을 부쩍 여럿 마주한다. 고독이 이끄는 대로 외로움이 목소리를 새기는 대로, 그렇게 불균질한 코블스톤 위로 옮기는 힘빠진 발걸음을 떠올린다. 눈만 마주쳐도 사랑에 쉽게 담구어졌다 가볍게 나온다. 이 몸도 마음도 예민한 이들은 사랑의 작동이 오히려 쉽다. 혁혁한 눈을 디밀지 않아도 충분히 여지를 읽는다.
기분이 좋아서 사람을 살린다. 근데 기분이 무척이나 안좋은 최악의 하루였다면? 이러한 상정은 애초에 없다. 그냥 기분이 좋아서 누군가의 팔을 잡아챘을 뿐이다.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을 꼭 알아야만겠기에, 내일도 만나자는 약속을 쉽게 한다.
오로지 감각으로서의 손, 서로의 몸을 탐하는 감각을 시각만으로도 전이시키는 손, 등허리를 쓸어내며 절제하는 손, 허벅지를 세게 쥐다가도 이내 엉겁결에 쥐어보는 깍지. 가만 존재하는 이들에 개연성이 되어 자의적인 매력이 되는 부위, 꺾어진 마디가 한참이나 아름다워 멈추었다. 기교보다도 감각을 촉발하는 주체성, 전이되는 지극하고도 야릇한 경험들. 손쓸수 없이 추락해도 괜찮을 것만 같아지는데 배를 간질이듯 드는 이상한 기시감. 아! 나는 고립이 실존이었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충만한 고양(야옹)이었다면 전제조차 없었을텐데.
아픔을 견디는 건 큰 문제가 아니라는 걸 눈빛만 봐도 알 수가 있다. 모를 수가 없다. 스스로의 자리를 뉘역뉘역 되찾아오는 꼬챙이같은 감각. 사랑 따위, 없어져도 그만이다. 눈만 마주쳐도 유혹이다. 일상의 자리에 오면 무게를 잃는 것들이 어쩐지 육중한 날들이다. 이것마저 삶인 이들이 있고, 이제서야 나는 깊게 사랑에 빠진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어쩌면 다시 들어보고 싶을지도, 그리고 이걸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을지도. 카메라에 찍혀 완전한 형태로 구현되는 찰나보다도 눈감고 귀에 때려박힌 감각이 내 몸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순간을 전체처럼 여기는 매혹적인 이들. 너무 평범해서 자주 불러야만 하는데, 나는 자꾸 당신만을 호명한다.
lovers regulier-
고작 결점 하나에 펄펄 뛰고 환하게 웃는 인간들. 불온한 일상만큼이나 지금을 잘 설명하는 말이 없다.
* 삭제되어 기억되지 못 할 장면들, 불필요해서 이리저리 치이는 것들을 보고싶다. 오직 고운 결보다도 너무 닮아있어 아픈 것들. 가장 작은 존재들이 해내는 불완전함의 이룩.
*외부로부터 부정당해 차라리 스스로에게 충실해야만 했던 가여운 완벽에 비소를 보낸다. 그래서 결점이 좋다. 축적된 불안은 사랑의 순간 속에서도 초점 잃은 눈빛으로 나타나지 않던가. 이 모든 것을 껴안지 못함을 제 결점으로 간주할 수 있는 한때의 치기. 스스로의 온전함을 증명하기 위해 치부를 서슴없이 드러내고, 완벽하지 못해 생동한다.
*비스듬한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있고, 그 기울기 안에서만 존재하는 이들이 있다. 무릎 굽혀 보는 것이 당연한 사려가 되기를, 감사의 허무가 공연하기를. 으으 재구성하려는 노력 따위는 하지말자. 나에게도 너에게도.
*빈자리의 공허도 오래 머무르면 상처가 아물듯 차오르는 것이 있다. 물론 흔적은 남긴 채로. 서사의 정적은 결함만이 아니다.
삼촌, 작은 퀸퀸 등등 아무렇게나 섞어 쓴 이야기
삶이라는 낫지 않는 병증, 하나밖에 없는 나의 억척스런 소관.
- 아무것도 없어 텅빈 공허한 얼굴을 찔러넣을 듯 가까이 제시해야만 깨닫는 무의미의 순수한 지점. 마구 오염되고 훼손되며 찢길 각오로, 무엇이든 축적되고 새로이 덧씌워질 기꺼이 망가지는 용기로 기이하게 전이된다.
- 정의와 규정에서 의지에 반하여 튕겨났음에도, 혹은 과하게 신성시 됨에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역동하는 잔여물, 잉여. 그 어떤 의미도 화학작용을 빚어내지 못하지만, 옅은 무의미의 감각은 곧잘 엔딩까지도 끈덕지게 따라붙는다. 아니, 그것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 아무것도 없어서 그저 징후이다. 너와 내가 다름에 덧붙이는 것을 모두 사족이라 부르겠다. 너는 너고, 나는 나. 그리고 너는 나고, 나는 너. 나는 나의 병증임과 동시에 너의 병증. 이렇게 아파보아서 두렵지 않다. 공허의 체부로 손을 넣어서까지 확인하는 잔인함 따위 나에게 없다. 나의 자비는 당신을 망가뜨리고 모든 것을 빼앗는 식일 것이다. 그럼에도 축축하고 끈덕지게 살아 사라지지 않는 당신을 믿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거나,,
은폐될 것을 걱정하거나 오해될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어서, 외로움에 불안을 떠는 삶이란 어느새부터 요원하다.
실상은 배반의 연속이고 평화는 허구인 걸 아는데도, 그럼에도 안위를 기대해보고 물어보는 것은 남루한 현실에 굴복하는 일에 불과할까. 그것조차 물을 수 없어 주변의 자리에 눌러붙기로 결심한 마음들이 영 걸린다. 어렵지 않게만 지나가는 불필요한 찰나가 먼 환상 같다. 당장 마주하는 섬광이 새기는 잔상의 불가해함을 독해하는 것이 익숙함에도 여전히 눈에 시린 무언가가 자꾸만 훼를 놓는다.
그것을 내가 지나치지 못하겠어 이 영화에 불온하다는 수식을 붙인다. 한 사람의 일상이, 뉴욕에서의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불완전한 것과는 별개로, 전유하는 안락함 안에서 손을 뻗어 피묻은 얼굴에 제 볼을 대는 일은 미루어진다. (혹은 은폐된다) 숨겨지고 보지 못 하는 일들에 이유를 따져묻고, 직시하기를 두려워하는 일들에서 섬광에 천착했다면, 조금은 나아질 수 있었을까? 그 어느쪽으로도 알아채지 못 해 단일하게 침잠하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따가이 진 시선. 나도 모르게 동일성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지, 여자애의 웃음 위에서 억척스럽게 따져묻고 있는 나도 멀게만 느껴진다.
언어로 표현될 수 없고 말로 설명될 수 없는, 도저히 어떻게 할 방도를 종잡을 수 없는 것들이 그래서 절대 가벼울 수 없다. 논리나 일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그러려고 하면 오히려 손가락 틈새를 유유히 흘려내버리는 느낌같은 것. 존재론적으로 공유되는 생애 대한 감각이기에, 요컨대 요행이다. 따라서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상실된 것들에 닿아야 한다. 부정도 긍정도 아닌 식으로, 곱고 거친 입자들을 전부 스치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좋았다. 감상과 표지가 있고, 빠르게만 휩쓸리는 찰나들 뿐이지만 그렇기에 모든 여지가 주어진다. 삶의 연속적임은 허구인 듯 공시적으로만 제시되는 듯 하나 개연성과 질서(?)에 대한 자의는 비교적 아주 자유롭다. 음악도, 구도도, 선택된 순간도 개입이라기 보다 축적에 가까워, 어떤 단상이든 기꺼운 대화처럼 느껴졌다. 이 감각이 좋았다. 삐뚜름한 시선도 끼워줄 것 같은 기이한 안락함.
사람들이 전부 외로운 것 같아서 좋다. 아무것도 완벽하지 않은 존재들이라서 사랑하고 싶다. 크리스마스의 모순에 된통 당하고서도 선물이 있었든, 없었든 자리에서 눈을 기다리는 마음을 떠올린다.
가엽고도 어리석어서 귀엽다.
여자들은 괴물과 함께 밤을 나고 노래하거나 노래하지 않음
기형은 차이를 또다르게 발설하는 수사적 표현에 머물러야 한다고.
몸은 담론에 우선한다. 근원도 본질도 아닌 그저 원점, 결백하고 표백될 수 있는 유일한 세계. 거울 속의 내가 못생겨서, 몸이 끔찍해 보여서, 누군가의 몸은 섹시하고 균형 잡혀서, 몸을 져버릴 수는 없다. 그러니까 이 져버릴 수 없음을 체감하는 이들, 내가 나라는 감각이 아니라 스스로를 호명해야만 하는 이들. 사랑과 혐오, 성장과 퇴행, 삶과 죽음처럼 목격하고 싶지 않은 진실과는 양태가 분명 다르다. 나의 반대항이 내가 될 수있음의 내밀한 모순을 경험한 이들에게, 사랑과 혐오의 쌍을 제시하는 것은 거대한 기만이다.
나의 외부와 나의 시선은 동일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외부임을 자각하는 순간에는 견딜 수가 없다. 더 큰 문제인 것은, 그 자각의 뾰족한 모서리가 평방으로 나를 가두기보다도, 잘못 삽입된 것처럼 내부에서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 몸의 반응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그 때 오로지 우울한 것은 당연하다. 내가 아닌 것이 나를 찔러오는데 아파하지 않고서 견뎌낼 수 없다. 상처가 부재한 고통을 겪는 이들의 얼굴이 말갛다.
몸에서 상실을 기어코 찾아내는 것은 품을 들인 오독이다. 몸에 진실은 없다. 그러므로 공허를 읽어내려는 시도는 피부 위에 겉돈다. 그러나 그 허구적인 상실이, 귀환과 멜랑콜리를 실재로 만든다. 근원없는 실재는 성질 그대로의 가벼움을 얻고 날뛴다. 몸을 괜히 만지고 입을 맞추고 싶은 것은 그런 것 같다. 가끔은, 아니 자주는 전부 조각내고 다시 기워내고 싶다. 봉합사는 이것저것들로.
쓰면서도 무슨 소용이지? 싶다. 근데 요즘에는 불온하고 신경질적이고 어딘가 뒤틀려있고 제멋대로 구는 게 덜납작해보인다. 병이나 증상은 그냥 그걸로 끝인데, 저건 설명할 방도가 없다. 또 얘기해야지. 너는 그래서 조은거라구. 몸은 반대로 말해서 스스로 장을 열기도 한다는 걸, 감내하다가도 히스테리를 부려서 멀어질 수 없다는 걸, 생동하는 건 비로소 좍좍 찢으면서 온다. 가만히 서있는 건 뒤진거다. 어떻게 잘 훼손하고 어지르고 막 뭉개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지, 무(나무것도 없음, 진공, 공허)의 자리에서 욕망을 잘 다루는 건 어렵지만 그 과정에서 당신들을 마구 불러나 보자. 그리고 너와 너와.. 여럿의 당신들과 몸을 맞대어본다. 마찰 없는 몸에 세우려들었던 모든 것들을 미끄러트리면서! ㅎㅎ
인스타그램 @sembrsse에서도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