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냄

~25/12 시

by 강조

김일엽 시인에 대한 글 중,,


...잘 비추어지지 않고, 꺼려지며, ‘정상’이라는 한 축에서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떨어져 나간 이들을 자주 떠올린다. 퀴어, 장애인, 노동자, 아이들, 팔레스타인의 사람들, 이민자, 페미니스트,, 그러고 싶었으나 부르지 못해 미안한 이름들까지, 이 모든 공백을 할애하고서라도 부르고 싶은 이름들이 너무나도 많다. 내가 당장 내일 뭘 할지도, 더 크게는 내가 미래에 뭘 할지도 아직까지 잘 모르겠지만 당신들을 위해 무언가를 읽고, 쓰고, 연대하고, 가끔은 거리에 함께 나서거나, 그럴 다짐을 굳게 먹는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나’의 순수하게 증류된 결정체일 수 없다. 온갖 것들의 파편들이 나만 볼 수 있는 봉합사로 얼기설기 엮여 있는데, 가끔은 나도 인지할 수 없는 색이다. 이런 ‘나’를 자주 감각한다. ‘나’에게 조차 헌사할 수 없는 흉한 꼴의 나, 제멋대로 기워놓은 헝겊 피부의 나. 그러나 나의 조각이, 피부가 되는 당신들이 못내 나에게는 ‘미’라서, 나를, 당신을 들여다본다. 그러므로 ‘나’에 대한 사랑은, 궁극적으로 당신들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한다. 세계를 사랑해서, 세계의 일부분을 이루는 당신들을 사랑한다.

...이런 이들에게, 공감이, 정동이 그리 거창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혐오스러운 타자가 아니라 나와 ‘다른’ 이로서의 타자로 인정하고, 삶을 걸고 투쟁하는 이들을 ‘나’라고 불러볼 수 있음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마치 내가 사랑하는 영화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관심이 없어 한다면, 내가 아니라 오로지 당신들을 위해 그것을 설득시키고 싶듯, 이들을 놓아버리기에는 당신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늘 품속으로 되뇌이는 말이다. 세계의 결백하지 못함이 오히려 나를 살리는 것일까? 그래, 나는 늘 그렇다. 세계가 완벽하지 못해서 늘 세계를 깊게 사랑한다.



최승자 시인에 대한 글 중,,


...화자를 증상으로 진단하고, 정신분석학과 여러 철학자의 개념을 빌려 그녀의 언어를 여과하거나 번안하지 않겠다. 적확한 언어로 화자를 한 번 더 명명하는 대신, 불모와 맹아로부터 일구어낸 화자의 척박하고 축축한 언어들의 근원과, 금방이라도 죽음을 반복적으로 처절하게 외쳐대는 화자에게 조금이나마 다가서려 해보는 것이다. 완벽한 필연이나 무결한 정의보다도, 최선의 사려를 다해보려 하는 것. 불가해함을 전제로 한 이러한 기획에, 우리도 발맞추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화자, 그리고 동류의 이들을 대할 때 요하는 최선의 사려를 논의해보고자 한다. 시집을 감싸고 있는 기획으로부터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지점으로, 일종의 ‘침잠’을 함께 하겠다.

...목표는 최승자의 시를 완전하게 분석하고 이해하기 보다도, 그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하는 것이며, 그녀를 비롯한 모든 타자들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잘 지내길’ 바라는 마음에 있다.

... <일찌기 나는>은 시집에서 가장 첫 번째로 수록된 작품이며, <불안>은 가장 마지막에 수록된 것이다. 그러나 그 창작 시기는 오히려 반대이며 둘의 간극이 8-7년 정도로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어떤 연관성이 부유하는 듯하다. <일찌기>는 앞서 상기했던 최승자 시의 자기 부정과 격하, 그리고 죽음이 확인되지만, 동시에 너, 당신, 그대를 띄어쓰기를 통해 구분해 행복은 의미 파악이 어려운 것으로, 그리고 사랑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모르고, 잠시 스쳐갈 수 있을 뿐이다. 썩지도 못하는 시체처럼 남아있음에도, 내가 살아 있음은 영원히 진위를 알 수 없는 정보에 그친다. 그만큼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렇기에 실존은 어디든 머물 수 있다. <불안>에서 풀, 별, 그리고 화자는 어린 꿈에 의해 언제 덮쳐올지 모를 죽음을 불안해한다. 결국 발사된 사물의 파편들이 달에 맞아 피를 흘리는 듯 붉어지는 것인지, 화자의 피가 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누가 맞든 피해가지 못한 이들에 마음이 쉬이 편하지는 못하다. 그저 ‘불안’이다. 누가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모호한 상태, 일종의 ‘없음’의 경계에 서있다. 그렇기에 동시에 절망된 상태에서도 누가 죽었는지를, 혹은 아무도 죽지 않은 상태를 상정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안>으로 끝난 시집은 <일찌기 나는>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은폐와 이면을 모두 무너뜨리며, ‘최소한의 긍정’을 상상케 하는 것이다. 죽음을 울부짖는, 그 희망이 부서지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회적으로 맞닿는 희망과 삶의 미명이 이 두 개의 작품, 혹은 전체에 감돈다. 불가해함이 만들어내는 공존하는 두 현재가 이 시집의 새로운 읽기를 재촉발시키게 된다.


...작가의 초기작으로 갈수록, 살아야 하는 까닭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해야 한다는 그 모순이 순전히 드러난다. 나의 뒤틀림이 나와 다른 이들로부터 독해되는 과정이, 다소 외로움 혹은 어찌할 수 없는 감정에 매몰되는 듯하지만 1부의 시들로 이어지기까지의 가장 솔직한 내면이 초기작들에 있다. 분명 아이러니로부터 출발하나, 끝에는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대어도 삶에 대한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이면의 존재가 역전되는 듯한 현상을 낳는다. 그 범위가 축소되지만, 오히려 담담한 그녀의 목소리에서 절박하고 처절한 사랑을 느낀다. 그렇기에 30대에 이르러서도 사랑 받지 못함을, 세계에 대한 허무를 여전히 직시하는 그 힘이 오히려 심상치 않아지는 것이다. 스스로를 죽이고 싶다는 끔찍한 욕망은 삶과 죽음의 아슬한 곡예에서 시를 쓰는 10년 이상의 시간동안, 아직까지 위태롭게 삶으로 기운다. 그러므로 지금도 추락할지 모르는 채 서있는 화자에게 관성을 꺼내는 것은 큰 부주의다. 여전히 처절하게 스스로의 몸을 붙잡고 견디고 있다. 나와 비슷하게 세계를 버티는 이에게서 공명하고 그들을 예비하면서, 이 시집의 역순적 구성은 이것을 버티는 이들에 대한, 그리고 이것을 생애 전체를 걸고 버텨온 화자에 대한 사려를 요한다.
그러므로 화자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우리가 이 시집을 대할 때 필요한 태도가 이러한 시인의 명시적인 기획으로부터 도출되어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불행한 화자를 사려 없이 불행하다 이야기 하지 않는 것. 쇠꼬챙이에 꿰어져도 죽음을, 사랑을 향해 한 발 내딛어 살기 위해 쓸 수밖에 없는 화자가 사랑 받기를 바라는 것. 나와 비슷하면서도 동일하지 않음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음을 겸허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시간은 구정물처럼 쏟아진다고 했지만, 과거로부터 축적된 절망들이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모두는 쉽게 깨지기를 두려워하고, 온전한 형태로 복귀하려 들지만, 최승자 시인은 깨지고 깨지기를, 그래서 마구 무너지고 밟히며 고운 입자가 될 수 있음을 안다. 사랑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시인이 사랑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가 아니라 당신을 생각해보는 마음이 나의 무너짐과 함께 기이하게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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