쥴 앤 짐 Jules et Jim, 프랑수아 트뤼포 (1962)
사랑은 오직 한 순간이기에 위험하며, 매력적이다. 어떤 말조차 그들 앞에서는 제안으로 남는다. 도저히 설명해낼 수가 없는 이것은 결국 자유의 모양을 한다. 우리 삶에 완전히 자리잡지 못하기에 ‘정의된’ 사랑과 자유는 자기모순이다. 이러한 정의 불가능성과 불가해함 자체는 우연을 필연으로 착각하는 것이 당연한 우리 인간들에게 닿지 못하는 이상, 곧 환상과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결국 환상이라서 부정不定이기에, 오히려 그 공백은 가닿고자 하는 시도도 끊임없이 가능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무엇도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않아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여지를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보는 일. 그러니 우리는 어떤 확언보다도 차라리 실패하는 것을, 계속해서 마주해야 한다. <쥴 앤 짐>은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연속된 행위들로서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다는 원점의 상태 자체를 확인시킨다. 따라서 ‘완전한’ 사랑도 그것의 규정된 한 면면일 뿐이다. 굳이 완전한 사랑이란 무엇인지 꼭 알아야겠다면, 적어도 이해를 바라지 않는 상태일 것이다.
카트린느는 사랑의 다면성과 층위, 한 정의나 규정이라는 ‘한’ 겹으로 통관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절실히 알고 있다. 하지만 카트린느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마저 그녀는 알고 있다. 사랑의 이름을 한 현실을 표방하고 있는 사내들은 그저 한 겹의 사랑들일뿐이다. 크게 말해서는 자신들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이분법 아래 사랑을 정의할 수 있다고 믿는 역설에 종속된 이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그녀가 한 명의 사람만을 사랑할 수 없게 하는 이유이며, 여러 명의 사내가 카트린느를 공공연히 한 번에 사랑할 수 있는 까닭이 되기도 한다. 정의가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가 정의하는, 오히려 경계나 규정이 없어 무한정한 것들에 가까이 다가서는 법은 최대한 많은 이들을 모으는 것이기에 그렇다. 사랑은 하나의 모양으로 귀결되지 못하고 세계가 다른 만큼이나 발산한다. 그중 하나만이 진짜라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단정해버리는 이들을 한 명만 곁에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여러 사람보다도 필요한 것은 가능한 사랑들의 산발하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던 말도 이제야 이해가 된다. 그녀와 그들은 차원이 절대적으로 다른 세계를 살아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2차원의 사람들이 3차원의 사람들의 한 축을 절대 볼 수 없듯, 이해가 아니라 차라리 다름을 인정하는 편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처벌, 다른 남자와의 사랑-바람-은 사랑하는 이들 간에 산발해 나가던 방향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서, 다른 차원을 살던 이들이 재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든 축이 0의 상태인, 원점에서만 가능하다. 요컨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더 이상 단죄나 규범에 어긋나는 불법적인 일이라기보다도 서로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일, 혹은 다시 한번 사랑을 해보겠다는 기대일 테다.
동경하던 감정, 특히 사랑 따위가 일상적인 것이 되어갈 때, 그것의 신성은 일상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눈에 띄지 않게 줄어간다. 우리의 몽상에 오래 눅눅히 담겨있던 사랑은 이렇게 현실과 닮아있는 모습을 하지 않는다. 영화는 현실이자 일상을 살아가다 마주하는 셋은 롱테이크와 느린 템포로, 어떤 환상적인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적인’ 시간으로 그 흐름을 구현해낸다. 반대로 그녀의 사랑으로서 표지가 되는 원점들은 아주 짧고 빠른 전환과 쇼트로 리듬감있게 쳐나간다. 이와 함께 과거의 촬영본을 가져다 써 시간성을 곧장 무너뜨리고,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할 순간들이 틈입하게 한다. 최종적으로 도시나 마을로부터 공간적으로 유리된 그녀의 집까지, 이 모든 사랑의 순간들은 마치 환상 같다. 정의가 불가능해서 예측 불가능한 상태, 불가해하기에 비가역적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알고, 그렇게 믿는 사랑의 매력을 일상에서 괴리된 것, 혹은 일상의 개시적인 색출이라고 한다면 카트린느의 사랑은 ‘일상’이라 통칭하기에 어렵다. 되려 종속과 규정을 탈피한, 꿈꾸던 이상 자체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미쳤다고 이야기하며, 그녀조차도 어떤 이해를 바라지 않는 상태에 스스로를 놓는다. 그렇기에 이러한 사유의 자유로움 속에서 일상과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예컨대 여성을 궤변같은 말들로 규정해대고, 스스로를 단정내리는 사사로운 문법들-마다 그녀는 이별을 택하거나 극단적으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다. 환상이자 다른 차원에 있던 사랑이 현실로 불려오면 위험에 처한다. 평면적인 문법들 속에서도 사랑의 층위를 스스로 일깨우며 살아남고자 했던 그녀의 생존 방식이, 그마저도 금이 간다. 그녀의 죽음은 허무했으나 마지않아 바라던 사랑 자체가 깨어진 것처럼 조금 아프다.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가져오는 비극적 결말, 자유에 대한 잘못된 갈망이 불러일으키는 파괴적임 정도로 그녀의 캐릭터나 영화가 일축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의 캐릭터나 이 영화는 너무나도 매력적이기에 그렇다. 정의할 수 없는, 종속되지 않는 사랑은 궁극적으로 자유에 대한 욕망과도 비슷한 모양을 한다.(사랑과 자유가 그렇다고 해서 동의어는 아니지만, 사랑이 닿고자 하는 곳에는 자유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렇듯 사랑의 이름을 한 자유와 방종의 층위를, 과욕적인 면모까지 전경화 시키면서도 그것을 영화는 비판하지 않는다. 되려 이것들까지 곧 사랑이 아니겠느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비판은 사랑을 ‘이해’하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향한다. 늘 그래왔듯, 사랑과 자유는 영원하지 않고, 규정할 수 없는 하나의 상태이기에 끝없이 가능한 시도가 되기 때문이다. 사랑 앞에 놓인 이해는 당착이다. 파괴적인 사랑도, 제멋대로 굴어 종잡을 수 없는 사랑도, 내 몸을 끝까지 내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랑도, 이 모든 것이 공존할 수 있는 사랑을, 그리고 그녀의 매력을 어떻게 설명가능한 방식으로 거역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 매력을 체감할 수 있듯, 그저 느끼기만 하면 된다. 금방이라도 변모해버릴 것 같은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 이러한 방법론은 나와 타자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더 많은 것들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자유는 우리에게 가깝게도, 요원하게도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그들의 괴리를, 파괴적인 매력을 실상이라는 문법에 의해 감히 위험하다고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현실의 소속감이 지리해질 때, 영화를 보는 일, 사랑을 보는 일, 사랑을 하는 일, 자유를 좇는 일은 불가피하다. 그런 점에서 규범 아래 놓이지 않는 불가해한 사랑, 그리고 자유는 역설의 자리에서 영원히 닿지 못하기에 우리의 동력이 되어왔을 것이다. 영화에서도 다르지 않다. 짐과 쥴이 사랑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카트린느로부터 파생하며, 카트린느는 우리가 사랑을 그려온 것에 대한 이유다. 이 영화의 제목이 <카트린느>가 아니라 <쥴 앤 짐>인 것은 대개의 우리가 카트린느가 아닌 그들을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상식 밖에서의 사랑이란 오히려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