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의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파편적 리뷰
부국제에서 영화를 몇 편 보고왔는데요, 가장 좋았던 두 작품의 리뷰만 짧게 써두었습니다.
짱!!
센티멘탈 밸류 Sentimental Value, 요아킴 트리에
이 모든 것은 집으로부터 시작된다. 가장 사적이며, 모든 것의 실체이자 근원, 내가 자라났던 곳. 그렇기에 떠날 수는 있지만 영원한 이별은 불가능한 곳, 그 무엇과도 상관없이 복귀와 화해의 의무가 너무나도 자명한 곳. 집은 당연하기에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순간들을 온전히 견뎌내며 조금씩 가라앉는다. 가차 없이 흐르는 인간의 시간 속에서 고요히 자리를 지킨 채 다시 돌아오지 않을 뜀박질과 떠난 발걸음의 침식을 스스로의 속도로 기다린다. 과거의, 그리고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동일한 믿음은 집이라는 동시이자 고유한 시간 속에 간직되며 이내 흐른다. 그러니 서로의 다름을 외로움으로 인식하는 불완전한 인간들도 여기에는 모일 수 있게 된다. 가족과 기억이라는 이름 아래 가장 다르면서도, 그리고 그러하길 원하면서도, 가장 닮은 서로를 마주한다. 이해는 가장 다른 지점이 아니라 가장 비슷한 지점에서, 인정하기 싫은 나의 모습들을 상대로부터 찾아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아킴 트리에는 각각의 생애들을 가족이라는 온유로서 그 외로움을 껴안으며 집이라는 공간에 모으고, 우리 모두는 다시 ‘영화’로 한데 모인다. 비로소 삶과 가장 밀접한 곳에서 영화만이 해내는 위로는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세 부녀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거장의 반열에 드는 아버지인 영화감독 구스타프, 연극배우 노라와 역사학자 레이첼이라는 두 딸. 구스타프는 이혼 후 사이가 좋던 딸들을 두고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몇십 년이 지나고서야 그 부인의 장례식장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구스타프의 모습에 딸들이 그에게 실망했음을 모를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노라에게 자신의 자전적인 영화에 참여해주길 요청한다. 노라는 거절했고, 구스타프는 다른 배우를 캐스팅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감당해내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배우는 촬영을 포기하고, 동생 레이첼의 설득으로 노라가 영화에 참여한다. 영화는 그들의 집과 똑같이 재현한 촬영장에서 모두를 다시 비추며 마무리된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외롭다. 그러므로 외로움의 이유를 찾고자 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그 시도는 그 외로움마저 같은 모양이 없다는 것을 목도할 뿐이다. 외로움에 이해가 따라붙는 것은 여기서 나온다. 타자로부터 얻는 온전한 형태의 위로보다도 나와 다르지 않은 이가 존재한다는 걸 확인하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되기에 그렇다. 그 속에서 초라한 나를 재회하는 일은 생략된 이유 대신 이해의 가능성에 대한 일말의 희망이며, 고독을 부정해왔던 나에 대한 반항이다. 이러한 정동으로 <센티멘탈 밸류>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서, 가장 비슷하기에 다가설 수 없었던 고독을 용서한다. 서로의 근원에 다가설 수 있는 것은 대역이 아니라 서로임을, 서로만이 닿을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함을 ‘영화’로서 다가간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외로운 인간들에 대한 영화이자 영화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하지 않을거라던 노라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연기하고, 아버지는 이를 감독하며, 레이첼은 노라를 설득시키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촬영장에서 눈을 맞춘다. 셋의 몽타주와 노출되는 장치들은 화해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영화라는 매체의 여지를 읽게 된다. 이 모든 것을 영화가 해낼 수 있다는 입증, 그리고 ‘센티멘탈 밸류-감상적 가치-’를 담아낼 수 있는 영화에 대한 애정이다. 삶의 편린들이 모여 영화라는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그것이 어떻게 사람들을 위로하고, 이러한 영화가 얼마나 매력적인 지에 대해 감독은 개인의 삶과 집, 영화 자체를 건드리며 섬세히 어루만진다. 정서적인 것들의 가치에 대해서, 그리고 영화가 이룩해내는 가치에 대해서, 그 둘의 충만한 실현을 함께 이루어내었다
영화로부터 삶을 믿는 일, 삶으로부터 영화를 믿는 일, 이 둘은 다른가? 필자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영화는 우리 삶과 닮아있고, 삶은 영화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둘의 연약함을 믿고, 불완전함을 믿는다. 그 경계에서 서로가 무엇을 이루어낼 수 있을지 지켜보고 싶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 The love that remains, 흘리뉘르 팔마슨
지붕을 뜯어내어보자. 안과 밖의 경계는 사라지고, 뜯겨나간 자리에는 콘크리트와 철근이 채로 드러나며, 지붕이라는 명백한 자리의 공허가 원하지 않아도 체부에 스민다. 그렇지만 고개를 들면 나가지 않아도 하늘이 천장처럼 보일 테고, 창을 열지 않아도 바람이, 볕이 기분 좋게 침범할 테다. 지붕의 존재감도, 그 빈자리도 동시에 머무른다. 존재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상 자체를 제거해보면 된다. 그리고 그 공백 속에서 마주하는 애착, 그리움, 고독, 외로움, 이 모든 것이 비롯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 뿐이라고, 스스로 명명해 보는 식이다. 사랑과 우리, 그리고 자연과 우리가 서로에게 남기는 흔적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충만한 공허다. 무언가 지나간 자리가 만드는 균열을 굳이 환상이라 구분 짓지 않는 것처럼, <사랑이 지나간 자리>의 이별과 상상은 틈입된 전개의 흠보다도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이 용인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무언가 오고, 떠나가고 사라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대신 필멸의 인간에게 자연은 묘비 같은 애도와 인위적인 흔적으로서 유예되는 부식을 허용한다. 우리는 자연의 문법에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기록하기보다도 ‘남기는’ 행위, 인간의 작위는 오히려 자연에 대항하는 일이라고 하기에 어렵다. 요컨대 인간에 대한 자연의 사려여야 한다고, 영화에서는 수탉을 죽인 매그누스를 거대한 닭이 처벌하며 섭리를 따르던 가정에 흠을 낸 그를 몇 번의 계속된 상상으로서 회의한다. 그러므로 아이슬란드의 거대한 자연은 영화의 단순한 조형적 배경이 아니다. 매그누스를 바다 한가운데 표류할 수 있게 하고, 안나의 예술-바깥에서 철 조각을 캔버스에 며칠간 올려두고 녹을 만들어내는-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사랑을 하고, 가족을 이루고, 또 헤어짐을 할 수 있게 한다. 자연의 초월성은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면서도 언제든 존재에게 현재형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자연과 삶의 낯선 조각들의 몽타주는 결국 쪼개어진 시간들 사이에서 순간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소환된다.
인간의 사랑과 자연의 병치는 거창한 정의나 명명보다도 이 모든 것이 흐르고 존재하는 방식을 보일 뿐이다. 살아내는 그 순간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삶을 살아낼 것인지, 사적인 자리에 부드러운 물음으로 다가섬과 동시에 상흔 뒤에 남은 흔적을 확인시킨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 자리로부터 온전한 형태로 보존된 사랑의 증명을 마주한다.
필멸의 논리에서 사랑만은 이를 벗어난다. 부패되지 않는 감정으로, 상처 입고 부서져도 여전히 남을 반항으로, 지나고 나서야만 알 수 있는 것으로. 연약한 인간은 자연을 감히 바꿔놓을 수 없지만, 다른 인간을 이렇듯 사랑할 수는 있다.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폭발, 넘어짐, 추락 같은 균열은 무언가를 깨트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만 흘러가는 자연스러운 믿음들에 다시 한번 사랑의 가능성을 상기시키는 힘이며 그것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조악한 사랑스러움이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는 그 모든 침범을 스스로 만들고 견뎌내며 사랑하는 모순적인 인간의 이야기다. 우리는 허수아비가 생명을 얻어 나와 키스를 하는 상상을 할 수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탄 비행기를 바다로 처박을 수도 있고, 맨몸으로 영원히 바다에 표류하는 걸 떠올릴 수도 있다. 그리고, 자연의 무용한 순간들도 사랑으로 읽어낼 수 있다. 인간들은 영원하지 못하기에 영원을 꿈꾸면서 사랑하기를 택한다. 이 미약한 힘으로 자연의 섭리 안에서 버틴다. 그 모든 것이 지나갈 걸 알면서도, 혹은 이미 지나간 그 자리에서도 조각나지 않은 사랑의 먼지를 털어낸다. 부서짐에도 사랑을 다시 한번 더 믿어보는 연약함을 나는 사랑한다. 지붕이 뜯겨나간 후의 볕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