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열정의 매력에 대하여

열정 passion, 장 뤽 고다르(1982)

by 강조

(25-2, 짧은 리뷰)

<열정>에서 관객은 끊임없이 밀려난다. 마음을 알 수 없는 상대처럼, 가까이 다가서려 해도 요원할 뿐이다. 그러나 고다르가 관객을 가져다 놓는 위치는 적절하다. 우리가 영화를 사랑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시선의 객관화는 대개 친밀도와 관계없이 거리로부터 파생한다. 구현된 심리적 거리감은 ‘이 영화의 이야기가 도대체 뭐야?’라는 고생스러운 질문으로부터 벗어나 그저 난잡하게 진행되는 시퀀스를 보고, 단절되고 더듬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제 영화는 격하될 대로 격하된 지 오래다. 나지막이 욕을 내뱉고 싶어질 때 즈음, 영화는 이상하게도 상대적으로-그러길 기대되었던- 정상적인 궤도로 복귀한다. 영화를 보고있다는 감각은 끊기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고다르의 영화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이고 열정이다. 마주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떠내려가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에 대한 제대로 된 확신이 없기에, 어떻게 해서든 찍어보겠다는 다짐. 영화가 할 수 없는 것을 전면에 앞세우는 반성과, 그렇다면 불가능성의 지점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답변으로까지,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고다르가 끝까지 손에 쥔 것은 결국 카메라였다.

현실을 재현하려고 하면 이미지는 늘 느리고 왜곡된다. 사랑을 표현하려고 하면 언어는 불충분하고, 노동을 담으려 하면 미학은 그것을 배반한다. <열정>의 소격은 이 결점들을 실험하듯 그대로 화면에 구현시킨다. 세계를 완벽하게 포착하고자 하는 재현의 이상을 깨트리고, 이미지가 결코 현실을 대신할 수 없다는 회의를 남기는 것이다. 심지어는 점프컷의 향연과 단발적인 이미지들 속에서 연속적인 서사마저 삭제해 이를 확인시키듯 이미지만 고립시킨다. 그리고 다시 되묻는다. 완벽한 이미지란 존재하겠느냐고. 고다르에게 빛의 완성이었던 회화를 관념적으로 등장시키고 화면을 통해 계속해서 실패하는 영화를 우리는 목격한다. 영문을 모르는 채 지시만을 수행하는 배우들, 조정되지 못하는 빛, 조잡하다. 회화를 흉내 내려고 하면 할수록 스스로의 생명력을 잃어갈 뿐이다. 그에 반해 꾸밈없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노동자의 얼굴은 계속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신화화되어 흠결없는 예술을 만들어내겠다는 영화의 다짐은 노동을 넘어서지 못한다. 예술은 노동만큼이나 일상적인 것이 된다. 예술의 신성도 해체되고 난 후에야 진척이 보이지 않던 예르지의 작품은 조금씩 윤곽이 잡히고, 그제서야 인물들은 조금씩 싱크가 맞기 시작한다.

결국 영화의 불가능성에 대한 고다르의 서술은, 한계보다도 결핍에 대한 인정이며, 완벽하지 못 한 인간이 영화를 통해 완벽한 아름다움에 도달하고자 하는 역설에 대한 비판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실패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감독이 이 모든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은 ‘영화‘ 그 자체를 통해서이지 않는가. 결점에 대해 영화가 스스로 선언하는 방식을 취할 때, 이러한 자기 선언은 단순한 몰락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으로 읽힌다. 철저하게 조정되어 완벽한 이미지의 재현에 성공한 영화는 더 이상 닿을 곳이 없다. 요컨대 우리가 계속해서 시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불가능이다. 이미지는 현실을 대체할 수 없고 완벽한 이미지란 존재하지 않기에, 완성성이란 별개의 과업이다. 결국 끝없이 실패하면서도 계속해서 찍는 것은 가능해진다. 영화의 제목이 <열정>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 불가능성을 직접 목도하고서도, 염세하지 않는다. 그 지점으로부터 영화는 오히려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름다움이라는 궁극에 집착하기보다도 이미지를 파괴하는 그의 문법은 매력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에게도, 우리에게도 퍽 위로가 된다. 영화는 우리를 닮았고, 우리는 영화를 닮았기 때문이다. 불완전에 열려 있는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것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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