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 시티라이트(1931)
(25-2)
웃음은 오해받기 쉽다. 목과 배에 힘을 조금 주고,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린 채 입을 벌려 하 하, 하는 소리를 내기만 하면 우리는 그 어느 직면한 상황이든, 무엇을 보고 있든 간에 웃을 수 있다. 쉬움과 가벼움에 대한 오해는 이러한 지점으로부터 배태된다. 단적으로 슬픔을 예로 들었을 때, 그 감정의 이유를 찾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다. 대부분 분명히 눈에 띄거나 자각되는 감정의 정동으로부터 파생되기에 그 근원은 비교적 뚜렷하게 바라보아질 것이다. 그러나 웃음을 떠올려보자. 당신은 왜 웃는가? 이것이 왜 웃긴가?라고 묻는다면 대개 ‘웃기기 때문이다,’ 혹은 ‘나를 웃게 만들기 때문이다’라고 답한다. 이것은 질문에 적합한 답변이 아니다. 왜 웃긴 지에 대한 이유의 자리를 이 답변들은 재귀적 오류를 범하며 그저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쉽게 마주치기에 그 이면의 존재를 망각하고 의문을 거세당한 웃음들은 가엾다. 가벼움은 그의 전체가 아니지만, 웃음은 구조에 대한 가늠의 가능성을 자발적으로 숨긴다. 스스로의 불가해함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지켜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 테다. 그러나, 되려 그 지점에서 그 가여운 존재들이 사실은 얼마나 정교하고 우아하게 직조되어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 왔는지, 코미디란 얼마나 섬세한 장르인지를 알아채야 한다. 채플린의 소리 없는 움직임이 21세기에도 여전한 것은 웃음의 베일을 벗겨내어 바로 그 보이지 않는다고 착각한 근원을 마주하게 함이다. 기원전부터 비극과 권력, 그리고 냉소와 싸워온 희극은 그 어떤 물리력이나 힘보다 강력하다. 스스로를 망가뜨릴 수 있는 용기, 균열과 모순의 승화, 잊히길 두려워하지 않는 가벼운 마음.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하는 웃음의 본질은 완벽하지 않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시티라이트>에서도 도시의 밝은 빛이 아닌 방랑자의 우스꽝스러운 사려가 모두의 미명이 되는 이유다.
사랑과 취한 우정의 간격들을 채우는 슬랩스틱과 과장된 감정 연기는 그가 그저 희화화된 인물임만을 입증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 공백을 메우는 코미디는 쉽게 다가서는 가벼운 마음으로부터 사랑의 감정을 축적시키기에 단단한 기초가 된다. 마지막 신에서 그를 알아채는 그녀의 표정보다도 수줍은 듯 미소를 지어 보이는 방랑자의 표정을 우리가 더 오래 기억하는 것도 영화가 쌓아 올린 웃음의 불가해함을 지켜보아왔기 때문이다. 쉬움과 어려움, 가벼움과 진심 사이에서 웃음이 만들어내는 이들 간의 내적 대비는 한쪽을 완전히는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오히려 사려의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키튼과 비교한 채플린의 매력은 여기서 나온다. 감정을 어루만지는 섬세한 코미디라는 것. 완전한 타자의 자리에서 머물기를 자처하는 방랑자는 어색한 몸짓으로 경계를 조금씩 무너트리고, 어쩌면 부자나 여인의 모습과도 비슷할 지도 모를 우리를 위로한다. 이름도 모를 떠돌이의 부재하는 서사, 완전히 낮은 곳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희극은 결국 미소를 머금은 채 끝이 난다.
냉소와 싸우며 지쳐버린 채 웃음이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작 한 순간이기에, 우리는 자주 웃을 수 있다. 대개는 이유도 생각하지 않지만, 채플린의 오래된, 소리도 없는, 흑백 영화의 몸짓은 웃음의 이유 자체를 맞이한다. 사실 그저 웃기만 해도 괜찮을 것이다. 의도된 우스꽝스러움은 그 소리를 바라는 채 기다릴 테다. 그 뒤에 남아 잇몸에 닿는 조금의 씁쓸함이면 된다. 망신스러움을 견딘 이들의 잘 만든 코미디란 그 무엇보다 어려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