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수수밭>, 장예모
(25-1 짧은리뷰,,)
어떤 종류의 삶들은 겪어진 경험의 기억이다. 그리고 또 어떤 것은 믿기 힘들다는 이유로 기억이 아닌 전언으로 남는다. 자세히 모르기에 더욱 부각되는 형태, 혹은 객관적인 방식으로. <붉은 수수밭>은 기억과 전언, 둘 전부다. 이 둘로서 붉음의 화신 아래 잊지 말아야 할, 그리고 바라보아져야 할 장면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강하게 내리쬐는 붉은 햇빛에 시야를 완전히 잃어서도, 완전히 시야가 붉어져서도 안 된다. 때 맞는 개기일식은 마치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지는 해에 맞추어 더 이상 시야의 형체를 잃지 않게 했지만, 붉은 시선만큼은 평생 남긴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내려가던 크레딧의 배경으로 지던 붉은 태양은 스크린을 넘어 누구에게나 오래 남을 전언으로서, 기억의 형태로서 저들은 우리에게도 각인될 것이다. 그 색을 보면, 저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고개를 넘어, 양조장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그 수수밭은 꼭 지나쳤어야 하는 것이었다. 사람 키가 넘는 아주 큰 키의, 빽빽하게 심어진 그 수수들은 그 안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들어가 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속을 헤치고 들어가는 순간, 나조차 찾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수수는 존재를 숨김과 동시에 보호한다. 일종의 성역이다. 그들이 만들어내고 삶을 영위해 내는 붉은 고량주의 원천,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곳으로 가기 위한 통로이며, 9월 9일, 붉은 술을 만들어내는 날에 태어난 그녀가 마치 본인의 근원처럼 지키고자 한 곳이었다. 주얼과 그의 남편이 만나 관계를 허락한 것도, 이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자손을 생산한 것도, 이곳이다. 아무도 볼 수 없고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온전히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그러한 공간, 그 작게 눕혀진 수수들은 밖으로부터 그들을 지켜내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공간의 붕괴는 곧 삶의 붕괴와 직결된다. 그들을 보호하고, 생을 만들어내던 그 수수들을 일본군에 의해 제 손으로 짓밟은 순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삶이고, 사랑이고, 연결, 또는 그 이상, 그 모든 주체성을 함축하고 가능하게 했던 그곳을 지켜내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이자, 수수밭, 그리고 그 삶의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야기하고 가능하게 한 그 붉은 공간은 생의 마지막 장면으로 남기에 적합하다.
그러니까 그 붉은 시선, 자신들의 수수밭을 지켜내기 위해 하염없이 작렬하는 태양 아래 기다리며 입은 눈의 화상, 그 시선을 끝으로 영화도 끝맺는다. 그 화상은 시야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 한 채 더 이상 피의 붉음, 붉은 수수의 붉음, 그리고 고량주의 붉음, 그 모든 붉음을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그 색채는 시선 자체로 전이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는 예전의 방식으로 같은 것을 마주할 수 없다. 아내의 죽음과 동료들의 죽음, 일본군에 대한 복수, 그리고 그 장소와 태양을 그 눈 속에 끝내 짊어진 채 남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강렬한 색채는 그 어떤 가시적인 요소나 서사보다 오래 남기도 하며, 더 많은 이야기를 함축한 채 발한다. 특히 붉은색이 그렇다. 붉은 고량주도, 붉은 수수밭도, 그에게 영원히 주어진 그 붉은 시야도, 표면적으로는 결국 많은 것을 설명해내지는 않는다. 그저 인물들의 삶일 뿐이다. 그러나 그 삶 자체가 붉은색으로 점철되고 말아지는 순간을 목도할 때, 주어지는 위화감을 느껴야 한다. 그 색 아래 놓여진 의미, 직접적으로 재현해내지 못할 맥락의 존재가 서서히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붉은 시야는 관객들에게도 이전되어 그 색을 기억하게 한다. 그리고 붉은색을 볼 때 적어도 몇 번은 그들을 떠올릴 것이다. 내러티브에서 장면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 장면으로부터 서사를 떠올리게 만들고 색채의 사용으로 의미의 층위를 관객으로 하여금 발견하게 만드는 것. 역사를 영화로 적어낼 때 택할 수 있는 섬세한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이야기의 화자는 그들의 손자이며, 그들의 아들이다. 단 한 번도 프레임과 이야기 속에 등장하지 않은 채, 겪어진 이들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를 다시금 전달한다. 감정과 내러티브 속에 존재하는 어색한 공백은 그렇기에 이해가 된다. 본래 전설이나 전언들이 그렇듯 그 중심에 있는 사건을 향해 달려갈 때 감정은, 예컨대 사랑처럼, 사사로운 정서는 거대한 덩어리로 뭉쳐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고 표현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전의 방식을 영화로 완전히 재현한다면, 영화로부터 관객은 밀려나게 된다. 즉, 거리감을 유도당한 채 일종의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 어떤 것도 온전히 보여주거나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도, 누군가의 죽음도, 떠나야만 하는 이유도, 이야기의 외화에서 상상으로 남겨진다.
이 영화가 택한 방식은 역설적이게도 ‘들려주고, 보여주는 것’이다. 손자에게 전해진 이야기로서, 그리고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고 붉은색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기억하기를 바라진다. 어떤 존재의 개입이라고 한다면, 눈에 완전한 화상을 막기 위해 노을이 지기 전 나타난 개기일식일 것이다. 완전히 보지 못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저 화상을 입은 흔적, 그 붉게 된 시선을 모두에게 보여주어야 했고, 바라봐져야 했다. 이렇듯 구전의 방식으로서 유지되는 기시감이 강렬한 이미지를 중화시켜, 관객에게도 주체성을 부여한다. 그저 타국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쉽게 잊히지 않을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제3세계의 사람들, 특히 여성이 객체로만 재현되고 피해자로서의 정체성만으로 각인시키는 것은 더 이상 진부한 시도이다. 주변부와 타자의 자리로 밀려난 것들을 복원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식민지에 대항하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불평등한 전통 자체에 반기를 든 여성으로서, 이중의 억압에 대한 주체성을 ‘주얼’은 갖는다. 모성이라는 모티프에서 벗어나지 못 한 점은 다소 아쉽긴 하나, 모든 것의 근원-삶의 근원인 고량주, 그리고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심지어는 이 이야기 자체를 만들어낸 근원으로 형상화된 여성이라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끝이 모두의 죽음이므로 결국 저들의 실패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가 모든 것을 붉은빛으로 바라보듯,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붉은빛으로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바라볼 수 없음을, 그들의 저항을 새긴 채 간직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