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크백 마운틴>, Ang Lee
(25-1 짧은리뷰,,)
우리는 생각보다 더 많이 사랑의 감정을 혼동한다. 순리대로 이루어져야만 하고 흘러가야만 하는 그 자연과 생활 방식 아래서, 규율과 본능을 제대로 구분하지도 못한 채 누가 정의했는지도 모를 자연스러움의 당위를 지켜야만 한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정의되고 만들어진 그 당위를 어긴다면, 그것은 처벌로서 단죄할 죄임이 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우리가 만들어낸 논리도, 그 모든 당연했다 여겨졌던 것들도, 짐승들만이 있는 그 깊은 산속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인간들이 정의했던 그 모든 것들은 소용없어지는 순간, 그 혼동되었던 사랑은 본능이자 그 무엇으로도 판단할 수 없는 서로 간의 전유물 그 자체로 남는다. 태풍이 오고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 것을 막을 수 없듯, 사랑도 깨닫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보고 싶은 데에는 이유가 없다.
에니스는 이미 많은 색으로 채워져 있던 사람이었다. 잭을 처음 만난 순간에도 결혼할 여자가 정해져 있었고, 그의 집 또한 아이들과 그가 자주 입던 옷들의 색이 벽지와 가구들을 칠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정해놓은 대로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의 아버지로부터 목도한 것이었다. 어떤 사랑을 해야 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칠해진 색채들의 문법은 그에게 직면할 삶의 과제였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여전히 흰 것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그가 입는 것들이었다. 모자, 그리고 흰 셔츠. 밖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에도, 잭을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만날 때에도, 그가 늘 소지하는 것이자 그에게 있어 가장 눈에 띄는 것이었다. 잭도 그런 듯 보인다. 로데오 선수였던 아버지를 따라 로데오 선수가 되고, 잘 나가는 사업가인 부인에 맞춘 집에서 산다. 그러나 그는 늘 검은 모자를 쓰고, 파란 셔츠를 입는다. 무뚝뚝하기만 한 에니스와 반대로 장난을 치며 하모니카를 연주하고 싶은 대로 연주한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진짜 방은 아무런 색도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흰 집에서 그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에니스의 움직임은 다소 본능적이다. 대화보다는 폭력이나 욕정이 앞선 문법을 따르던 그는, 삶을 살아가는 것조차 당시 당연했던 방식을 따를 뿐이다. 그러므로 잭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욕망을 따름과 동시에 삶을 유지할 방식이 하나임을 놓지 못한다. 돈을 버는 것, 가족을 먹여 살리고 방목 때에는 가축들의 곁을 지키는 것. 그러나 그는 본능적이기에 단순하고 순수하다. 그가 늘 쓰고 다니는 흰색 모자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잭의 검은 모자는 세상에게서 받은 그의 상처이자 그의 사랑의 방식이다. 오는 사랑을 단순히 받는 것이 아니라 야반도주까지 작정하며 능동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자각했던, 사랑 앞에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새길 줄 모르는 이었다. 그의 집이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흰 색인 것은, 모든 것을 알아도 에니스에게 잭의 셔츠를 담을 봉투를 챙겨준 부모님 아래 자라난, 사랑 앞에 틀린 것은 없다는 그 순수한 믿음의 근원이다. 에니스의 하얀 셔츠를 몰래 가져와 제 파란색 셔츠를 덮어 그곳에 걸어놓은 것도, 그 산에서의 그들의 사랑을 추억함과 동시에 이러한 사랑의 이해로 그를 물들이고자 한 잭의 언어인 것이다. 그의 방식은, 원치 않는 당위에 무너져 내리는 그를 품속에서 위로하고, 13시간 거리를 운전해 오고 제대로 된 취급을 받지 못 함에도 힘든 내색 없이 왜 더 자주 못 보냐고 투정을 부린다. 오는 사랑에 발맞춰 나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보고 싶다는 한 마디는 그 무엇보다 지극하다. 그 거대한 자연 아래 약육강식부터 특히나 인간의 이해관계는 옳고 그른지 조차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된 채 그 흐름 아래 입혀졌던 그들의 셔츠를 다시 마주하고 잭을 떠올리는 순간, 에니스는 그의 사랑과 그들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딸의 결혼 소식에도 목장 일에 멈칫하다 되려 간다고 이야기하며 사랑의 진실됨을 되묻는다. 이런 그의 모습은 다가오는 잭을 사랑하던 에니스가 더 이상 아니었다. 제 흰색 셔츠로 잭의 셔츠를 덮어 걸어둘 수 있게 된, 그야말로 사랑을 하는 이의 모습을 한 채 남게 되는 것이다. 에니스와 잭의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틀린 사랑이 존재하는가? 이것들만큼 무의미한 질문이 따로 없다. 사랑이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는 말만큼이나 어색하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무조건적인 사랑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무조건적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자연의 문법 아래 저들의 사랑을 병치시킴과 동시에 사랑받는 사람과 사랑하는 이들 사이의 간극을 메운다. 그리고 ‘나는 퀴어가 아니야’라는 말에 ‘나도.’라고 대답하던 두 남자의 사랑에 그 어떤 이유도 부여하지 않으며 설득과 이해를 강요하지 않는다. 사실 그 어떤 이유도 들지 않는 이 단순한 사랑의 재현이 어쩌면 가장 섬세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보고 싶다는 말에 이유를 묻는 것이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 일인지를 사람들은 생각보다 잘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의 판단 자체를 당연히 삭제할지언정 모두의 사랑함 자체를 설득시키지 않는 것. 잭과 에니스 이 둘이 왜 사랑하는가, 왜 사랑에 빠졌는가를 아무도 모르는 이유다. 굳이 설명하려 들지도 않았으며, 그것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의되고 지정된 사랑의 모습 외의 것을 인정받지 못했던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해야 했던 결혼에 저들의 관계를 불륜이라고 칭하는 것만큼 힘 빠지는 일이 없다. 이 영화에서는 이렇듯 사랑 자체를 혼동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사랑의 형태들을 바라보게 한다. 사랑은 자연의 순리 아래 놓여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 생생한 도달의 지점에서 관객들을 기다린다. 사랑은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 상처의 지점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사랑은 영원토록 사랑일 뿐이라는 것을, 그 물듦을 막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유의 자리를 자체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그들이 그 산에서 입던 두 개의 겹쳐진 셔츠에 묻었던 피가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남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