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목격해야 하는가?

<시티 오브 갓>, Fernando Meirelles

by 강조

(25-1 짧은리뷰,,)


리드미컬한 베이스 위에 얹히는 일렉트릭 사운드, 소울풀한 목소리, 그저 그 음들 위에 마음 가는 대로 얹히는 우리의 몸들. 이러한 연결에 논리란 필요한 것인가? 아주 만약에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확인할 방도가 있는가? 본능적인 움직임과 다르지 않은 이 행위를 확인하고 바라보는 이는 존재하는가? 이렇듯 사랑, 폭력, 복수, 권력, 탐욕, 오로지 본능적인 논리만이 존재하는, 또는 본능으로 전개되는 세계를, 우리는 잘 들여다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목격일 수도 있다. 그들의 방식과 논리를 ‘목격’하는 것, 원하는 것은 이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고작 초등학생 밖에는 되어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 시티 오브 갓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직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일념 아래 돈을 벌고자 택한 방법은 강도, 그리고 마약 거래였다. 누군가를 죽이고 배신한 대가도 처벌이 아니라 내놓아진 목숨이었다. 그러나 왜 그 어린아이들이 돈을 벌고, 마리화나를 피우고, 누군가를 죽여야만 했던가. 왜냐하면 그 세계의 당위는 이토록 잔혹한 방식으로 살아남도록 가르쳐졌고, 그들에게 본능적으로 인식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강한 자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원초적인 논리가 그야말로 지배적인 곳에서 그 작은 손들에 쥐어진 총은 그 누구도 제지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그렇기에 강도짓을 하고, 총을 쏘는 씬들에도 마치 일상적인 삶을 편히 이야기하듯, 보사노바 풍의 bgm이 깔리고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당연한 삶의 방식임을, 구조적 한계가 당연한 것임을 이야기하듯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자연스러운 당위를 보여주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영화에 몰입하기는 쉽지 않은 듯 보인다. 도저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무기가 아니라 실은 순수와 무지를 빌미로 무장한 그 앳된 얼굴들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어야 한다. 대학까지 졸업하고 군대까지 다녀온 착한 어른도 예외 없이 복수를 위해 강도짓과 살인에 몸 담그는 것 또한 그렇다. 하지만 내러티브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보이스 오버로 설명되는 이야기의 전개와, 카메라 회전에 발맞추어 재생되는 효과음은 영화로부터 일종의 거리를 발생시킨다. 가끔은 과도할 정도의 조명이나 속도를 통해 자연스러운 전개를 도모하면서도 관객을 영화 밖으로 분리해 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화자가 기자인 부스카페 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파생한다. 그는 이 모든 사건들을 내부, 그리고 외부에서 전부 지켜볼 수 있는 유일한 목격자이자 화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목격’이다. 부스카페의 시점에서 모든 상황들을 지켜보는 것, 그 세계의 방식을 확인할 수 있게 하되 어떤 사람은 착하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은 나에게 관심을 주었다는 이유로 하려던 강도짓을 포기하는 그 순수한 본성은 가까이에서 이해시키고자 하는 것. 전체적인 상황을 인지시키기 위해 화면을 직접적으로 나누어 동시대의 연결적인 내러티브를 한 번에 보여주면서도, 이곳에서도 폭력과 사랑, 그리고 평화가 대비될 수 있는 공간임을 드러낸다. 사실은 순수로 점철된 그들의 본성은 거리를 두면서 목격의 방식으로 시선을 옮길 때 그들의 삶을 확실히 바라보는 방식으로 이해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해 너머 존재하는 목격의 순간이 재현된다.


이 영화는 무엇이 옳다 확실히 선언하지 않는다. 관객에게 그 선언을 넘기고서는 결국 끝나지 않는 폭력의 대물림을 재현하며 이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바라보기를 원한다. 특히 인물들과 현실을 착취하는 방식, 그리고 그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영화로부터 거리를 두고 문제를 바라보게 한다. 잔인한 현실이나 역사를 재현함에 있어 재현을 통해 유발하는 충격으로서 무조건적인 인식의 촉발은 더 이상 섬세하지 않다. 그렇기에 편집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관객에게 자발 되는 공감의 통로로서의 재현은 타인의 설득이 아니라 스스로 설득력을 가지게 하므로, 오히려 간접적인 방식으로 서로에게 진정한 공감을 통해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티 오브 갓>에서는 부스카페라는 전지적 화자의 존재의 상정과 더불어 그에게 기자라는 목격하는 자로서의 지위를 부여해 폭력을 다소 적나라하게 재현함에도 현실성을 자각할 수 있는 계기를 자아낸다. 불완전하고 조금은 거칠어도 괜찮다. 제 뻬께뇨가 현상수배범이었음에도 신문에 제 사진이 올라감에 부스카페를 죽이지 않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랐듯, 부스카페가 쥐꼬리만 한 월급에도 목숨을 걸고 시티 오브 갓의 상황들을 알리고자 사진을 찍어대었듯, 이러한 제3 세계의 영화는 그들을 그저 알아주기를 바라고, 목격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꿈을 가지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도시 외곽의 ‘신의 도시’. 신의 도시라 불리우는 그곳에서 신의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따듯한 물조차 나오지 않고 사람이 죽어나가도 모르는, 그 빈민촌이 왜 신의 이름을 달았는가? 시골 노동자들의 꿈의 대변이었던 신의 존재는 구조적 한계를 마주한 이들이 서로를 서로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를 올릴 때까지, 그가 정말 저들을 보고 있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한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는 발전과 체제의 혼란 사이에 있던 브라질 민중들의 희망일 뿐이었으며, 정치의 결과가 낳은 핍진한 현실의 역설이다. <시티 오브 갓>에서 명명되는 신은 하나의 내러티브로서, 그리고 현실으로서 계속해서 재호명된다. 자각하고 목격해야 할 현실, 그리고 공감할 수 있는 그들의 본성으로.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잊으면 안 된다. 저들의 당연한 삶이 당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신의 이름을 단 모순적인 도시의 이름을 한 번 더 입에 올림으로써 스스로를 설득시켜야 한다. 이 영화는 그것을 바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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