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영화일 수 있음을 알기에

<경멸 Le mépris>, Jean-Luc Godard

by 강조

(25-1 짧은리뷰,,)


‘영화는 현실을 비추는 창’이라고 바쟁은 이야기 했다. 진실 된 리얼리즘, 영화는 그것을 해낸다. 그러나 현실의 완벽한 재현, 현실을 완벽히 모방해내는 일이 어째서 영화라는 예술이 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왜 영화여야만 하는가. 고다르의 영화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예상치 못 한 답변이다.


이 영화의 시작부터, 관객들은 몰입하기도 전에 BTS를 마주한다. 트레일을 따라 촬영 중인 카메라가 비추어지면 이내 영화의 제작진마저 극 중 인물의 나레이션으로 들려오기만 한다. 혼란스럽다. 이것은 내가 바라보는 세계인가, 스크린 속인가 라는 물음만이 부유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무엇도 구분할 수 없는 경계에서 길을 잃었다가, 바쟁의 말이 인용된 후 트레일을 따라 움직이던 카메라가 완전히 우리를 응시함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재현과 현실의 경계 자체를 무너뜨리며 고다르가 만들어낸 현실의 개시 속으로 입장하게 된다. 알고 있으나 보지 못 하는 것을 보게 하는 것. 이는 현실의 재구성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의 미장센은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시도가 내재한다.


이후 영화는 붉은색 필터가 씌워진 채 침대에 누워있는 두 연인의 모습을 비추며 시작한다. 발부터 시작하여 머리끝까지 부위를 하나하나 이야기하며 그것들이 예쁘냐고 묻는 카밀의 물음에 폴은 귀찮은 내색 없이 전부 예쁘다고 매번 대답한다. 하지만 그 때 눈에 띄는 것은 사랑스런 연인의 전경이 아니라, 갑작스레 바뀌는 화면의 색이다. 빨간색에서 노란 빛의 필름 카메라의 필터로, 그리고 다시 파란색으로, 정말 갑작스레 전환시킨다. 이 3가지 색에 대한 내성을 감소시켜 이 색의 사용에 대한 의도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고 관객들에게 마치 이것들에 집중해달라고 이르는 듯하다.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은 영화 내에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며 가구에, 옷에, 소품들에 나타난다. 이는 미감을 충족시켜 영화 내에 몰입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에 대한 의미 관계를 드러내는데, 영화관에 앉아있는 이들로 하여금 영화가 만들어낸 세계와 현실 간의 자유로운 출입을 경험하게 한다. 가령, 프로코쉬와 폴, 카밀, 그리고 프란체스카의 관계에서 프로코쉬는 붉은색 넥타이와 차를 소유하고 집에 있는 가구들마저 모두 빨간색이다. 그리고 폴과 카밀은 푸른 옷과 푸른 넥타이를, 그리고 프란체스카는 노란색 옷을 착용한다. 프랑스인 두 연인과 미국인 제작가는 프란체스카라는 통역가가 없으면 소통이 불가능하다. 또한 카밀과 폴이 다툴 때 카밀이 잠시 붉은 로브를 걸쳤으나 시나리오라는 노란색 종이가 서로가 잠시 다툼을 멈추고 카밀이 그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매개체’로서의 존재는 소통을 넘어 상호 간을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왜 영화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답변에 관통이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처음부터 허물어놓고, 관계, 그리고 가시적으로 확인이 가능한 색으로부터 그 삼중의 관계를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현실과 재현, 그리고 현실과 내러티브 사이에서 작용하는 영화의 역할과 이 매체에 내재하는 관계들의 물음을 영화만이 가능한 은근하고 강력한 방식인 미장센으로서 제시한다. 그러므로 관객의 현실과 영화의 현실은 구분되지 못 한 채, 심지어는 극중극과 그것을 찍는 인물들의 극 중 현실까지도 완전히 뭉그러진 채 미네르바와 넵튠의 몽타주는 계속해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Le Mepris>에서 우리는 인물들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잘 들여다보지 못 한다. 클로즈업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씬들이 광각 카메라를 사용한 롱테이크로, 심지어는 인물들의 정면이 아니라 측면을 이동하는 방향에 따라 설치된 레일에 맞춰 따라갈 뿐이다. 폴과 카밀의 갈등이 고조될 때는 아예 벽을 두 사람 사이에 둔다던지, 계속해서 껐다 켜졌다 하는 전등을 사이에 두고 두 인물을 한 프레임 내부에 두기 보다는 트래킹하는 방식을 취한다던지, 내러티브에 친밀한, 어느 정도 전형적인 방식을 취하는 듯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대부분의 씬들이 광각 카메라를 사용하여 후경을 넓게 보여줄 뿐 아니라 정작 두 사람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클로즈업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떠나겠다는 카밀의 말을 들은 폴의 표정을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다. 애초에, 이 영화는 여타 누벨바그, 그리고 전형적인 당시 영화들과 달리 2.35:1의 넓은 가로비를 택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인물들 뿐 아니라 그 사이와 뒤에 많은 것들이 놓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볼 때, 그 누구의 감정에도 쉬이 공감하기 어렵다. 관객과 인물 사이에 유지되는 일정한 간격과 거리감이 그렇다. 멀리서 지켜보기에 왜 때문에 저들이 싸우고 왜 때문에 저런 말들을 내뱉는 것인지, 그저 어떤 상황인지를 파악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영화에 몰입하지 못 하는가? 다만 관객들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감독의 의도를 알아차리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시퀀스에서부터 영화적 경험과 논의를 자각하길 바라기에, 단지 사랑과 경멸에 대한 지고지순한 영화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눈치 챈 관객들은 카메라와 인물 간의 거리감 안에서 자신을 유지한 채 사랑의 내러티브 아래에서도 부유하는 현실을 알아챌 수 있게 된다.


빅토르 에리셰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훌리오가 스크린의 표면을 쓰다듬으려 하듯, 그리고 <Le Mepris>에서 옅은 노란색 슈트를 입은 폴과 노란색 로브를 입은 카밀이 결국 헤어짐이 정답임을 인정하듯, 영화에 대한 영화는 그렇기에 가능하며, 성공적일 수 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는, 들리지 않는 가시적인 이야기들. 그 어떤 매체가 아니라 영화만이 가능한 자기 자신에 대한 해석과 이해의 시도로서 도출 되는 영화 그 자체. 결국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가까이 다가오기에 가능한 더 깊은 공감은 자기 정의의 결과물이다. 즉 매체 자체에 대한 이해는 곧 그것을 더 사랑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고다르의 영화가 지금도 낡지 않은 것인 데에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랑이 했던 ‘신의 부재가 우리를 구할 것이다’라는 말을 이해한다. 절대적이고 당연한 믿음과 존재의 부재는 영화가 영화일 수 있음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진짜아름다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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