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 Florian Henckel von Donnersmarc
(25-1 짧은리뷰,,)
예술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혹은 그 수가 더 늘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글쎼, 완전히 무채색인 삶이란 있을까. 평생 한 가지만이 옳다 믿으며 살아가는 삶이란 존재할까. 다른 것을 겪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무채색의 빛이란 그렇기에 더 온전하다. 타색채가 섞이지 않은 상태, 색이 한 방울만 떨어져도 다시는 무색으로 돌아갈 수 없는 가장 불완전한 색이자 가장 온전한 색. 게오르그의 집에 있던 노란색의 전등을 기억한다. 비즐러의 귀에 가닿은 것은 다름아닌 그 빛이었다. 그 다정하고 포근한 노란색의 빛. 그렇기에 그 조차 감시로부터 해방이다. 그 회색빛 숨겨진 카메라로부터.
웃기는 하는지 모를 쳐져 있는 입꼬리, 늘 입고 다니는 회색 옷, 색이 없는 집, 그리고 통일 전 동독의 대위 비즐러. 그리고 진지한 듯 하지만 다채로운 표정, 넥타이 메는 법을 몰라 늘 풀어헤쳐진 셔츠, 피아노와 브레히트의 시집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따듯한 집, 그리고 예술가 게오르그. 극 중 둘은 정반대와 다름없었다. 인물의 설정을 넘어 감독이 그들에게 비추던 빛의 색깔 마저도 말이다. 이것은 완전한 비교일까? 우리는 무언가를 비교할 수 있다고 할 때, 그 비교군을 적어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둘을 비교하기 위한 질문을 던졌을 때 이를 물음 자체의 존재를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즐러와 게오르그의 비교가 성립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로부터 기인한다. 게오르그가 살고 있는 삶은 비즐러가 겪어보지도 못 한 것이었다. 반동분자라고 불리는 이들을 잡아내기 위한 교육을 하고 문득 드는 외로움에 할 수 있는 거라곤 안고 있지도 못 할 창녀를 불러다가 섹스를 하는 생을 살아왔던 사람이, 체제에 어떻게 저항할지 고민하며 창작의 고통을 느끼며 언제든 안겨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그가 게오르그를 지켜보는 방식은 도청이나 관음이 아니었다. 비교나 대조의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겪어나가는 일이었므로, 곡률이 있는 숨겨진 카메라로 그들을 지켜볼 수 없었을 것이다. 강한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크리스타가 게오르그를 바라보는 구도가 아니라,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것도 그렇다. 비즐러가 그들의 삶에 본인을 대입하고 이입하도록 설계한다. 감청실에 있는 비즐러의 모습은 게오르그의 내러티브 내에서 잘 비추어지지 않는다. 전환의 빈도 자체가 적었다. 마치 새로운 것을 흥미롭게 배우고 바라보는 아이처럼 말이다. 그러나 갈수록 그들의 전환은 점점 더 잦아지는데 이는 분리로서가 아니라, 다르기에 전환될 수 없었던 두 삶의 동기화다. 에술과 사랑을 겪어본 이 둘은 결국에 한 장면에 등장하게 된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 비즐러에게 비춰지던 것은 무채색의 흰 빛이 아니었다. 이미 그 둘에게 비춰지던 조명의 빛은 일치했다. 그렇기에 둘은 같은 장면에서 등장할 수 있었다. 같은 것을 겪은 사람들이 되었기 떄문이다.
타인이란 누구인가? 누가 타인인가? 영화가 시작하고 곧장 게오르그와 비즐러 둘 중 누가 타인에 더 가깝냐 묻는다면 대부분의 관객들은 후자라 대답하리라 생각한다. 가벼운 농담에도 웃지 못 하고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냉혈한 같은, 심지어 동독의 경찰로 있는 사람과 우리를 같은 선상에 놓기에는 분명 어렵다. 어쩌면 그의 삶을 지금의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어렵다. 그렇기에 비즐러는 우리에게 있어 타자로 시작하게 된다. 일반적인 카메라의 구도가 아니라, 그는 감시당하고 있지 않음에도 오히려 실제로 도청 당하고있던 게오르그와도 달리 숨겨진 감시 카메라와 같은 구도로 찍혀진다. 그의 행동을 우리는 감상하지 못 하고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게오르그의 삶을 비즐러는 숨겨진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게 되지만, 관객에게 있어 비추어지는 게오르그 삶의 앵글은 평범하다. 타인의 의미를 나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겪은 것을 겪어보지 않은, 또는 겪어보지 않은 것을 겪어본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명백히 비즐러는 타인이라 할 수 있으며, 예술가의 삶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관객들에게 이르는 듯하다. 비즐러는 감시를 통해 삶을 겪는다. 외로움을 느끼고 사랑을 경험하며 시의 감동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상을 이해한다. 크리스타가 포기하려한 술집에서 그 대위는 그들을 이해하며 심지어는 위로한다. 도청하던 헤드폰과 그 화면 밖으로 나와서, 우리와 동일한 시점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이후 비즐러 또한 숨겨진 각도에서 비춰지지 않는다. 비즐러는 게오르그와 크리스타를 이해하고 우리는 비즐러를 이해하게 된다. 같은 것을 겪어본 사람들로서의 연대를 넘어 서로를 이해한다는 입증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직접적인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조명, 그리고 카메라의 움직임, 편집으로 서로를 이해하게 만든다. 게오르그가 비즐러의 도움을 알아차리는 방식도, 그가 그 이후에 감사를 표하는 방식마저 그렇다. 그 이유는 변화할 수 있는 사람이란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게오르그의 삶을 같이 바라보아도 여전한 사람이 있듯,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모두를 바꿔놓지는 못 한다. 즉 변화는 결국 나 자신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감독은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브레히트의 시집을 읽으며 소년같은 웃음을 지어보이던 주인공을 생각한다. 우리 스스로 변할 수 있다는, 이토록 다정한 믿음으로부터 택해진 감독의 문법들은 결국 제목에서 타인을 지워버린다. 같은 장면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진정한 의미의 타인으로서 서로를 남겼다.
우리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타인을 한 번 더 믿어보는 것이라는 걸, 그 쉬운 믿음들은 결국 좋은 영화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