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눈물 지을 수 있길

<그림과 눈물>, 제임스 엘킨스, 1장 / 예술에 대한 나름대로의 서술

by 강조


그러니까 오늘로부터 정확히 2년 전 22년의 12월, 뉴욕에 나는 있었다. 마침 겨울비가 내리는 날이었고, 으레 뉴욕으로 떠난 사람들이 그렇듯 뉴욕 현대 미술관에 들를 날을 고민하다 오늘 같은 날이라면 그곳을 들르는 것이 맞다 생각했다. 춥고 화창했더라도 어차피 그랬을 테지만 괜히 미술관에 들르는 날이면 이유를 대고는 싶어지는 법이니까. 휴대폰 너머 작은 액정으로만 유심히 들여다보던, 또는 왜인지는 모른 채 지극한 명성 때문에 모르기가 어렵던 그 작품들을 실제로 마주한다면 어떻게 다를지 상상하며 바바라 크루거가 만들어낸 언어들의 통로를 지나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잭슨 폴록의 거대하고 난잡하며, 하지만 난잡하다고 보기에는 은근히 정렬되어 있는 것 같은, 그 혼돈 속의 질서 같은 그림, <넘버 31> 앞에 섰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쉬이 마주할 수 없던 캔버스의 크기와 익히 들어온 명성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이상한 압도에 그저 눈을 굴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같이 갔던 어머니께서 눈만 옮기는 듯 보였던 나를 이내 바라보시더니 물었다. ‘그래서, 이게 뭐야?’ 나는 이 물음에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대충 알 법한 이야기들만 던져대다가 그러게,라고 짧게 물러버리곤 이내 다른 작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겨버렸다. 그 이후, 지나가다가 다시 마주친 그 작품 앞에는 아까의 대화에서 벤치 앞에 앉아있던 몇 명의 사람들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예술 작품이라는 것은 어떤 모양새든, 어떤 곳에 걸려있든지 간에 인간들이 의도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기에 심지어는 작품의 무의미 또한 작가가 오브제에 부여해낸 하나의 의미로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어떤 것은 단번에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누구나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단순하기도 하며, 어떤 것은 몇 분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을 듯 해지기도 하지만, 특히 추상화처럼 보통의 맥락에서 해체된 것들은 아마 며칠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명징한 답을 쉬이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작품의 의미와 상징을 찾아내는 것이 일종의 감상의 미덕으로 여겨지는 통상적인 관객들에게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퍽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인지도 모를 기호들의 향연을 해석해내지도 못한 채 대부분의 관객들은 미술관이 걸어놓은 그림 앞에 그저 서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이즈음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예술을 해석해내는 것이 진정한 답인가?’ 그렇다, 우리는 그저 다가오는 감정들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안 되는 것인가? 도대체 진정한 감상자로서의 태도는 무엇인가.


엘킨스는 마크 로스코의 작품으로서 이러한 궁극적인 물음에 다가서고 있는 듯 보인다. 그의 서술은 본인이 채플에서 경험한 감상보다는 ‘우리’, 즉 관객이 될 수도 있고 예술가가 될 수도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로스코의 작품을 받아들이며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려고 했는지에 초점을 둔다. 그가 14처 앞에 서있을 때 함께 있던 관객들의 행동을, 로스코의 작품을 보고 남겼던 관객들의 다양한 반응을, 그리고 로스코가 남겼던 일종의 결함과도 같은 흔적들을, 어둠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던 예술가의 반응을,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려고 했던 시도 자체 또한 이해하고자 한다.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이 텍스트는 개인적이면서도 종교성을 띤 미술을 창조하고자 했던 로스코의 본의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 일종의 관조적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좀 더 이야기해보자.

‘나는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던 예술가가 남긴 종교를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작품은 경계를 초월한 종교성을 띠며 그 어떤 십자가도 걸려있지 않은 예배당에 걸려있다. 그 거대한 사각형에 다가섰던 관객은 종교적 감응 또는 감동을 경험하며, 이에 심지어는 스스로의 경험을 전이시키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지만 유독 눈에 띄는 방명록의 문장이 있었다. ‘나도 울 수 있으면 좋겠다’ 이 관객은 눈물로만 이 작품에 조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작품의 의미를 넘어 자체에 공감하고 싶어하는 관객의 한마디가 우리에게 앞선 물음을 도출하게 한다. 사실은 로스코도, 엘킨스도, 그 어떤 명확한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다. 심지어 로스코의 작품은 제대로 된 형태도 취하지 않은 채 우리에게 불완전한 기억을 쥐어주면서 정작 대상 자체는 움켜쥐고 내어주지 않는다. 중립 지역에 서서 관객에게 역설적으로 온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도 쏠리지 않은 해석과 의미를 제시하되 내가 느낀 감정 자체를 관객이 느끼길 바랐던 그들은 ‘나도 울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관객의 반응이 가장 슬프고도 달가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공감하면서도 공감하지 못하는, 그리고 신성이 끝까지 닿지 못해 종교적으로 꾸며진 장소에서도 그 신성을 강요받지 못 한 그 상태, 그렇기에 그에 닿길 ‘바라질 수 있는’ 그러한 상태. 애초에 신성이란 존재했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관객은 그림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 그 어떤 것도 명확히 정의될 수 없는 예술과 종교의 세계에서 우리가 만질 수 도 없고 마음대로 다룰 수도 없는 그 세계에서 유영하는 듯 몰입해야 한다. 완벽한 이해보다는 이해하고자 최선의 시도를 다하는 것이 그를 이해하는 최선의 방식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개별성과 종교성, 그 어디 즈음에 위치할 그의 작품은 예술과 종교에 대한 일종의 정의의 시도가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종교와 예술이라는 새 범주에 대한 가능성이 될 것이다.


종교가 된 예술, 예술이 된 종교. 그 어느 한쪽으로도 정의하지 않은, 그렇기에 건조하지 않은 엘킨스의 텍스트는 관객이 미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성을 시사한다. 흩뿌려진 물감들 앞에서 이게 뭐냐고 묻던 물음도, 그 작품 앞에 몇 시간이고 앉아있을 수 있을 힘도 예술에 공감하고자 하는 각자만의 방식이 될 수 있다. 예술이 전달하고자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힘에 대해서 이를 인지하는 것도 이해의 시도가 된다는 것이다. 어느 무엇도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작품 그리고 세계, 예술 안에서 결국 예술가와 작품은 가능성을 찾아나간다. 이해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그리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관조하면서도 그를 가까이 봐야 한다는 해석의 가능성. 이론들이 쉬이 적용되지 않는 그의 그림이 유일한 눈물의 용인이 가능한 작품인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늘 그렇듯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힘은 종교, 그리고 예술, 우리 삶을 막론하고서 정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시도에 정당성이 된다. 정의 불가능성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해할 수 없기에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렇기에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신이 울 수 있길 바란다’고 답할 테다. 그 모든 가능성과 이해를 눈물로 일축할 수 있길 바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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