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그녀의 걸음걸이를 기억한다」4"/5

#【4편】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다, 혹은 봤을지도 모른다

by leehyojoon ARCH

【4편】에필로그 _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다, 혹은 봤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다시 본 것은 그로부터 반년 후였다. 봄이 와서 화분의 새싹이 제법 자랐을 때였다. 그 새싹을 보면서 나는 그녀가 이 성장을 알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녀가 심어놓은 생명이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을.


그날은 이상하게 맑은 날이었다. 미세먼지 농도가 '좋음'이었고, 바람도 적당했다. 그런 날에는 사람들이 더 많이 거리로 나온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점심을 마치고, 나는 예정에 없던 거리로 들어섰다.


걸어가면서 나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봄옷을 입은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겨울과 달랐다. 더 가벼웠고, 더 여유로웠다. 그리고 더 희망적이었다. 나 역시 그런 기분이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낯익은 풍경이 나타났다. 우리가 함께 갔던 서점, 그 앞의 카페, 그리고 교차로. 그 순간 나는 그녀와 함께 걸었던 그 밤을 떠올렸다. 그녀의 발걸음이 내 것보다 조금 빨랐던 것, 신호등에서 그녀가 휴대폰을 확인하던 습관.


그 교차로 건너편에서 그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확신할 수 없었다. 거리가 5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고,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걸음걸이는 분명히 그녀의 것이었다. 오른쪽 어깨가 약간 올라가는 그 특별한 걸음걸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나는 그녀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었다. 머리는 묶지 않았다. 반년 전보다 조금 더 길어진 것 같았다. 그 길이는 어깨를 넘어 가슴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이 걸을 때마다 미묘하게 흔들렸다.


가방은 예전보다 더 작아졌다. 검은색 가죽 가방이었는데, 그녀의 어깨에 걸린 그 가방의 스트랩이 그녀의 옷과 마찰하면서 작은 소리를 냈을 것이다. 그 소리를 나는 들을 수 없었지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도 조금 달랐다. 흰색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카디건. 그 카디건은 새로운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색깔이 그녀의 피부색과 잘 어울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깔을 잘 알고 있었다.


걸음은 여전히 조용했다.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목적지가 분명한 그런 걸음. 그 걸음걸이를 보면서 나는 그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것일까? 아니면 업무 미팅이 있는 것일까?


나는 한 발 멈췄다. 심장이 조금 빨라진 것을 느꼈다. 그 심장박동이 귀에서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내 심장이 어떻게 뛰었는지 떠올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스마트폰은 검은색 케이스에 들어있었고, 그 케이스는 약간 낡아 보였다. 그녀는 새로운 것을 자주 사지 않는 사람이었다. 있는 것을 오래 사용하는 타입.


햇빛이 그녀의 흰 셔츠 끝을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그녀는 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마치 기억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처럼.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내 기억 속에서만 존재했던 사람이었다.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40미터, 30미터, 20미터. 그 거리가 줄어들수록 나는 그녀의 디테일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반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조용하고, 여전히 어딘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뭔가 조금 다른 것도 있었다. 그녀의 눈가가 조금 더 편안해 보였다. 마치 어떤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스마트폰을 보는 것이 진짜 목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말을 걸까?'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주 짧은, 그러나 강한 파동이었다. 반년 동안 그녀에 대해 생각해 왔던 모든 것들이 그 순간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녀의 차가운 손, 그녀의 조용한 웃음, 그녀가 내 셔츠를 입고 창밖을 바라보던 모습.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 밤에 보여준 그 슬픈 표정. 그 표정을 보면서 나는 그녀도 우리 관계의 끝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끝이 그녀에게도 쉽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손을 들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그 대신 나는 그녀를 지켜봤다. 그녀가 내 앞을 지나갈 때까지.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채 10미터도 되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져 있었다. 뭔가 집중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집중이 스마트폰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뭔가를 피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마치 뭔가를 중얼거리는 것처럼. 그 입술 움직임을 보면서 나는 그녀가 책을 읽을 때의 습관을 떠올렸다. 그녀는 중요한 부분을 읽을 때 입술을 움직였다.


그녀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뉴스일까? 아니면 메시지일까? 그것이 그녀를 그렇게 집중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녀의 발걸음에 변화가 있었다. 조금 더 빨라졌다. 그리고 조금 더 긴장된 것 같았다. 마치 뭔가를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그녀는 나를 보았다.


정확히는, 그녀는 나를 보았지만 보지 않은 척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선택을 존중했다.


그녀는 내 앞을 지나쳤다.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그 순간 나는 그녀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 향기는 예전과 조금 달랐다. 향수가 바뀐 것 같았다. 더 은은하고, 더 성숙한 향기였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녀가 내 방에서 나갈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도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걸음걸이를 나는 끝까지 관찰했다. 그 걸음걸이에서 나는 그녀의 마음을 읽으려고 했다. 그녀는 후회하고 있을까? 아니면 안도하고 있을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 말없는 행보가 그녀의 대답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선택한 방식이었다.


그 순간 나는 묘한 확신을 가졌다. 그녀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도 말을 걸지 않기로 선택했다. 그것이 우리 관계에 대한 최종적인 답이었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무언가를 남긴다는 건 언제나 정리를 요구하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정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 좋았다.


그녀와 나 사이의 그 10미터 거리는 적절했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 우리가 항상 유지했던 그 거리. 그녀를 다시 만난 순간에도 그 거리는 유지되었다. 그것이 우리의 방식이었다.




【4편】완결 _이름 없는 사랑의 마지막 관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캔을 샀다. 그녀와 처음 밤을 보냈던 날처럼. 하지만 이번에는 한 캔만 샀다. 두 캔을 살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슬프지 않았다.


편의점 직원이 맥주 캔을 비닐봉지에 넣어주었다. 그 비닐봉지를 받으면서 나는 그녀가 가져온 편의점 봉지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 봉지를 어떻게 접었을까? 그 작은 사각형으로.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걷는 동안, 갑자기 들풀 냄새 같은 게 바람에 실려 왔다. 봄의 냄새였다. 그 냄새는 희망적이었다.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는 냄새였다.


사람은 냄새로 기억을 되살리곤 한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나는 그녀와 함께 보낸 그 여름을 떠올렸다. 그 여름의 더위, 그 여름의 선풍기 소리, 그 여름의 침묵. 그리고 그 여름에 내 방에 와서 조용히 시간을 보냈던 그녀.


그 여름에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나누었다. 말로는 많이 나누지 않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많은 것을 나누었다. 시선, 침묵, 체온, 그리고 시간.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대화였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여름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이 봄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를 다시 본 이 봄, 그리고 그녀와 다시 10미터 거리를 유지한 이 봄을.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끝내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묻지 않았고, 그녀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 사실이 이제는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이름 없이 기억되는 사람은 언제나 조금 더 오래 남는다.


그날 밤, 나는 그녀의 화분에 물을 줬다. 평소보다 조금 더 정성스럽게. 그 화분은 이제 제법 자랐다. 새로운 잎들이 돋아나고, 줄기도 더 굵어졌다. 생명력이 넘쳐났다.


그 화분을 바라보면서 나는 오늘 본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도 이 화분처럼 자라고 있었다. 더 성숙해지고,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성장 속에서 나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람은 자란다. 그리고 자라면서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게 된다. 나는 그녀에게 한때 필요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그 사실이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리고 그 성장에 내가 조금이나마 기여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뿌듯했다.


내 방은 여전히 그녀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그녀가 정리해 둔 책상, 그녀가 가져온 화분, 그녀가 틀어놓은 재즈 CD. 그리고 그녀가 입었던 내 셔츠.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부재를 증명하는 동시에 그녀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그녀의 재즈 CD를 틀었다. 그 음악이 방 안에 흐르자, 그녀와 함께 보낸 조용한 시간들이 되살아났다. 우리는 그 음악을 들으며 많은 침묵을 나누었다. 그 침묵들이 지금도 이 방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오늘 그녀를 본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변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더 성숙해지고, 더 단단해지고, 더 독립적이 되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아름다웠다.


그녀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도 말을 걸지 않기로 선택했다. 그것이 우리 관계에 대한 최종적인 답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헤어졌다.


그 존중이 우리가 나눈 마지막 선물이었다.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 서로의 거리를 존중하는 것. 그리고 서로의 침묵을 존중하는 것.


아마 그녀는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나도 그녀의 이름을 모르니까.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기억할 것이다. 이름 없이, 하지만 분명하게.


그게 우리 관계의 전부였고, 어쩌면 유일한 기념일이었다. 서로의 이름을 한번도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도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더 이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름 없는 사랑의 형태였다. 조용하고, 완전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오래 남는.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다. 혹은 봤을지도 모른다. 그 두 가능성은 이상하리만치 똑같은 무게로 내게 남았다. 그리고 그 애매함이 우리 관계의 본질이었다.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 완전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것. 끝났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낸 이름 없는 사랑의 형태였다.




【완결】


때로는 가장 완전한 관계가 가장 불완전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름을 묻지 않고, 약속을 정하지 않고,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 관계. 그런 관계가 오히려 더 순수하고 더 아름다울 수 있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지만, 서로를 완전히 이해했다. 그리고 그 이해는 이름보다 더 깊은 곳에 있었다. 관찰과 침묵으로 이루어진 그들만의 언어로.


이름 없는 사랑은 언제나 그렇다. 시작도 끝도 명확하지 않지만, 가장 순수한 형태로 기억 속에 남는다. 그리고 그 순수함이 그들에게 남긴 가장 소중한 선물이었다.







작가 후기


이 소설은 현대 도시에서 만나는 이름 없는 관계의 아름다움과 그 관계가 남기는 깊은 여운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특히 '관찰'이라는 행위를 통해 사랑의 다른 형태를 탐구했습니다.


때로는 가장 완전한 관계가 가장 불완전한 형태로 존재하기도 합니다. 이름을 묻지 않고, 약속을 정하지 않고,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 관계. 그런 관계가 오히려 더 순수하고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을 담았습니다.


관찰자의 시선으로 포착한 미세한 디테일들이 독자들에게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각자의 마음속에도 이런 이름 없는 누군가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이야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24년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