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의 시대, 자립의 문법을 벼리다

by leehyojoon ARCH

이탈의 시대, 자립의 문법을 벼리다


현재의 웹소설은 하나의 수치로 움직인다. 체류 시간, 완독률, 재방문율. 문장은 감정이 아니라 그래프로 측정되고, 작가의 언어는 플랫폼의 데이터로 번역된다.


성공 공식은 더 이상 이론이 아니다. 어떤 문장은 3문단에서 멈추고, 어떤 문장은 7줄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리즘은 이미 알고 있다. 유사한 문장들이 같은 간격으로 배열되고, 같은 지점에서 절벽이 등장한다. 독자는 멈추고, 클릭하고, 떠난다. 그 흐름은 정교하고, 냉정하며,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 아름다움을 부정하지 않는다. 때로는 부럽기도 하다. 물처럼 이어지고, 막힘 없이 흘러가고, 어디서도 걸리지 않는 문장들. 다만 이것도 안다. 걸리지 않는 것은 남지도 않는다는 것을.





이 시대의 공포는 비난이 아니다. 휘발이다.


읽히지 않는 텍스트는 통계에 남지 않는다. 통계에 남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처리된다. 문장이 화면 위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눈동자가 스크롤을 내리는 속도에 맞춰 문장의 길이도 조정되고, 길면 잘리고, 느리면 밀린다.


한 문장이 끝까지 읽히는 장면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누군가 고개를 젓는 모습까지 포함해서. 거부는 마주침의 흔적을 남긴다. 돌아선 자리에는 체온이 남는다. 그러나 휘발은 다르다. 지나갔다는 사실조차 남지 않는다. 문장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어느 화면에도, 어느 기억에도, 새겨지지 않는다.


거부와 휘발 사이에는 건물 한 채만큼의 거리가 있다. 나는 거부당하고 싶다.





알고리즘을 흉내 내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호흡을 짧게 자르고, 감정을 먼저 배치하고, 다음 회차를 미끼로 건다. 예상된 위치에서 감정이 상승하고, 예상된 위치에서 닫힌다. 독자는 울고, 창을 닫고, 다음 목록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숫자가 오른다. 댓글이 달린다. 누군가 기다린다는 것을 안다. 그 감각이 얼마나 달콤한지, 써본 적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거의 간 적이 있다. 문장을 고치다가 멈춘 자리가 있다.


어쩌면 나는 그 배열을 쓰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못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어떤 날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고집이라고 말해왔지만, 실은 시장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패가 두려워서 실패하기 전에 먼저 이탈을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다만 해소가 내려와야 할 자리에 공백을 두는 것은 안다. 결말이 수렴해야 할 지점에서 하중을 멈추는 것은 안다. 그러면 문장은 불친절해진다. 불친절한 문장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 시간을 감수한다. 감수한다고 믿는다.





슬픔에 잠긴 여자를 쓰면서 슬프다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으려 했던 밤이 있다. 여자의 슬픔 대신 유골함의 온도를 썼다. 남겨진 가구들이 갑자기 커 보이는 방의 공간을 썼다. 그 문장이 슬픔을 전달했는지 아직 모른다. 독자가 없었으니까.


원나잇의 잔여가 일상을 침범하는 방식을 쓰면서 쾌락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려 했다. 다음 날 아침 칫솔을 집는 손의 각도를 썼다. 창문을 여는 순서가 달라진 것을 썼다. 가능했는지 모른다. 읽힌 적이 없으니까.


타자화된 여자에게 여자의 언어를 돌려주려 했다. 전시된 욕망의 사슬을 걷어내기 위해 그녀가 내린 선택을, 선택이라는 단어 없이 쓰려 했다. 완성됐는지 모른다. 그 판단을 내려줄 독자가 아직 없으니까.


체호프의 시대에도 통속소설이 있었다. 체호프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체호프가 살아남는 동안 몇 명이 사라졌는지는 기록되지 않는다. 나는 그 기록되지 않은 쪽에 있을 수도 있다.





새벽 두 시. 그래프는 ✘✘에서 멈춰 있다. 조회수 ✘✘. 어제보다 하나 줄었다.


그 숫자를 오래 들여다본다. 삭제 버튼 위에서 커서가 멈춘다.


지우지 않는다. 지우지 않는 것이 자립인지, 아니면 그냥 지우는 법을 모르는 것인지, 그날 밤은 끝내 알지 못했다.





자위와 자립의 차이를 생각한다.


자위는 닫힌 방 안에서 완결된다. 읽히지 않아도 구조는 완성된다. 적막이 남고, 그 적막의 밀도를 안다. 어떤 밤에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떤 밤에는 그것이 전부다.


자립은 다르다고 말해왔다. 읽히지 않을 가능성이 벽처럼 서 있는데도, 문장의 기둥을 빼지 않는 것. 보상이 지워진 자리에서도 하중을 유지하는 것. 그렇게 정의해왔는데, 오늘은 그 정의가 조금 흔들린다. 기둥을 빼지 않는 것이 의지인지, 아니면 기둥 외에 다른 것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인지.


하나의 조건만 남긴다. 이 구조가 무너지지 않을 때, 누가 끝까지 서 있는가. 그것이 나이기를 바란다. 바란다는 말이 이렇게 작게 느껴진 적이 없다.




문화적 정비(cultural gentrification)라는 이름 아래 비슷한 문장들이 늘어날수록, 다른 호흡은 더 안쪽으로 이동한다. 표면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지표에는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히 소거되지는 않는다. 철거 예정 구역에도 끝까지 불을 끄지 않는 방이 있듯이.


댓글이 하나도 달리지 않은 날이 있다. 창을 닫고도 모니터 불빛이 오래 남는다. 그 침잠을 패배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깊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지금 이 위치에서 쓰고 있을 뿐이다. 위치라는 말이 좌표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고, 변명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오늘도 쓴다. 읽힘을 확인하지 않은 채. 철거 예정 구역의 가장 안쪽에서, 측정되지 않는 호흡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철거되지 않을 문장을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철거되더라도 기둥을 빼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자립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다른 이름을 붙이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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