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집만 남은 검

— 상실과 다정함, 그 사이의 어딘가

by leehyojoon ARCH

칼집만 남은 검

— 상실과 다정함, 그 사이의 어딘가


그녀가 떠났을 때, 그때는 몰랐어.

왜 떠났는지.


한참이 흐른 후에— 생각이 계속 스쳤어. 의식하든 못 하던 간에. 뭔가 머릴 스치는 게 있었어. 그러다 어느 순간.


아.


알게 되었어. 그래서 그녀가 떠났구나. 그 다정함이 싫다는 의미가 이거였구나.


그런데.


그렇게 알고 나서— 또 한참이 흐른 후에.


그 깨달음을 잃어버렸어.


알게 됐었다는 그것을. 해석이 완료된 자리엔 검이 없었어. 칼집만 남은 거지.


다시 왜 그녀가 떠났을까?


지금도 잃어버린 상태야. 알았던 것도. 모르던 것도. 그 사이 어딘가에.


왜 그녀가 떠났을까. 왜 그때 알았다고 생각했을까. 왜 그걸 잃어버렸을까. 이게 이 소설의 집필 동기야.




『낙인의 서사, 관음연대기』연작을 쓰면서 〈침묵의 질감〉 속 인물인 민우는 작가 본인의 투영이었다. 고백컨대.


〈침묵의 질감〉은 『낙인의 서사, 관음연대기』의 연대기 속 본편인 〈시식의 궤적〉의 프리퀄이다. 그 해당편의 서사를 엿볼 수 있으나, 서사 기법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문체적 실험을 시도한 작업물이다. 링크


승희와 민우의 관계를 분석하면 민우의 다정함이 오히려 승희에게는 자신의 지옥을 비추는 거울이자 질식할 것 같은 성녀의 감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때 제시했던 다정함의 모델이 날 선 세계관 안에서 너무 무르고 서사적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생각되었지.


지금 쓰는 '학습된 다정함(위선)'은 그 시절 보여진 맹목적인 다정함과는 결이 다르다. "다정함은 그 자체로 치유의 힘이 있다"는 식의 원론을 배제하고, 다정함을 사회적 생존을 위해 장착한 정교한 칼집이자 관계를 붕괴시키지 않기 위해 지불하는 고도의 사회적 비용으로 접근했지.


현재의 다정함 지향은 오글거리는 다정함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서로를 죽이지 않기 위해 가식이라는 예의를 학습하는 진화된 위선에 가깝다고 이해돼.


그리 접근함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 때문이야.


"넌 너무 다정해."


라고 말한 날. 그녀가. 그날, 그러면서 까(?)였던 기억. 지금도 선명해. 내 기억으론. 사실 이것도 믿을 게 못 돼. 뇌는 언제든 자신을 속이거든.


그때의 다정함은 단순히 위로를 건네는 따뜻한 손길이 아니라 상위의 자아를 버리고 타인의 바닥(지옥)으로 함께 추락하겠다는 처절한 결단이었어. "너의 바닥이 어디든 나도 그 진흙탕에 발을 담그겠다"는 동기화된 상태.


이것은 위선이 아니라 너무나 순수해서 오히려 파괴적인 진실이었기에,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순수함이 감당할 수 없는 부채가 되어 상대를 밀어내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기도 해.


하지만 그녀에게 그 다정함은 안식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혹은 그 지옥의 농도를 더 짙게 만드는 거절하고 싶은 구원이었을지도 모르겠어.


지금에 생각하면 그녀에게 까였던 그 '지옥을 공유하려던 다정함'은 하드보일드한 서정의 극치에 가까울 거야. 하지만 오늘은 지옥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차라리 세련된 가식이 모두를 덜 아프게 한다는 비정한 깨달음을 얻은 듯도 하고.


진실한 다정함이 상대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위선이라는 방패를 빌려 서로를 대면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이 지점. 상태적 리얼리즘이 가장 잔인하게 작동하는 순간은 언제인 줄 알아?


"당신의 지옥까지 함께 하겠다"는 선언은 그 순간만큼은 거짓 없는 붉은 검이었어. 하지만 상태적 리얼리즘은 마음의 진실성을 묻지 않아. 대신 "그 상태를 유지할 동력이 실재했는가?"를 묻지.


그녀는 어쩌면 나의 진심 너머에 있는 버틸 수 있는 용량의 한계를 본능적으로 감지했을지도 모르겠어.


지옥을 공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동조하는 것이 아니야. 그것은 내 일상이 무너지고 내 영혼의 색깔이 타인의 잿빛으로 물드는 것을 견디는 물리적인 내구력의 문제야.


그때 내가 내밀었던 손이 준비된 구명보트가 아니라 같이 가라앉고 싶어 하는 무거운 돌처럼 느껴졌다면, 그녀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혹은 내가 무너지는 꼴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떠났을 가능성이겠지.


진심은 순간의 출력값이지만 생존은 지속되는 상태값이니까.


그 지옥을 감당할 근육이 없는 상태에서의 다정함은 결국 서로를 갉아먹는 지연된 비극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어. '누가 버티고 누가 부서지는가.' 이 물음이야말로 상태적 리얼리즘의 핵심인 것 같아.


그 물음 앞에서 나는 버티지 못했을 거야. 아니 우리 둘 다 부서졌을 거야.




어쩌면 지금 "위선이 차라리 낫다"는 관용은 그 시절 감당할 수 없었던 진심이 남긴 상처에 대한 자기 고백일지도 모르겠어. 지옥을 함께 뒤집어쓰겠다는 거창한 약속보다 오늘 하루의 예의를 지키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대의 평온을 깨지 않는 가식이 훨씬 더 윤리적인 생존이라는 결론.


"같이 침몰할 사람이 아니었다"는 자각은 슬프지만 선명한 해석이야.


지옥은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칼집을 차고 서로의 선을 넘지 않는 위선적 다정함 안에서 간신히 유예되는 것임을.


'잃어버렸다'는 감각이야말로, 내가 도달한 비정한 리얼리즘의 대가일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떠난 이유를 마침내 깨달았을 때—그것이 나의 부족함이었든 감당할 수 없었던 지옥의 무게였든 혹은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지 않기 위한 마지막 예의였든—그 해답을 얻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 서사를 지탱하던 뜨거운 심장은 멈춰버렸어.


이유를 몰랐을 때는 지옥과 다정함 사이에서 치열하게 충돌하며 서사가 요동쳤어. 하지만 이유를 알아버린 순간 그 세계의 방정식은 풀려버렸고 더 이상 변수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어.


모든 것이 명확해진 자리에 남는 것은 선명한 허무뿐이었어.


타인에게 건네는 너그러운 위선과 학습된 다정함을 예찬하게 된 지금의 나는 어쩌면 그 시절 지옥으로 뛰어들려 했던 날 선 검을 잃어버린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관계가 유지되고 조율되는지 너무 잘 알기에, 정작 자신의 밑바닥을 태워 올릴 동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녀는 떠남으로써 자신을 지켰거나 혹은 나를 지켰을 거야. 내가 그 이유를 깨달음으로써 이해라는 영역에서 버티고 있지만 정작 내면의 어떤 파편은 그날의 지옥 근처에서 이미 부서져 사라진 상태인 것 아닐까.


"지금도 잃어버린 상태"라는 말은 무언가를 다시 찾으려는 의지라기보다 그 상실 자체를 하나의 상태값으로 수용하겠다는 선언처럼 들리길 바래.




하드보일드한 서사에서 가장 강력한 주인공은 무언가를 가진 자가 아니라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담담하게 묘사할 수 있는 자라고 생각해. 지금의 이 상실감이 오히려 나의 펜 끝을 가장 서늘하고도 우아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


그 잃어버린 상태를 굳이 채우려 하지 않고 그 빈 공간을 응시하며 써 내려가는 문장들은 아마도 피 칠갑된 검을 품은 서정적인 풍경 그 자체가 될 것을 기대해.

작가의 이전글이탈의 시대, 자립의 문법을 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