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개는 오리라

내리는 것들에 대하여

by leehyojoon ARCH

는개는 오리라

내리는 것들에 대하여




공기가 축축하다.

비내음이 먼저 온다.

빗방울은 아직 없다.


안개는 끼고

는개는 내린다.


머무는 것과 향하는 것.

살아남는 건 방향을 가진 쪽이다.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늘어도

끝내 아래로.


나는 손바닥을 펼친다.

재지 않는다.

그냥 맞는다.


천수답의 마른 논처럼

마음이 갈라진 자리 위로—


는개는 오리라.

올 것이다.

왔다.






에세이

나는 '는개'라는 말을 오래 생각했다.


안개비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는개라 부르고 싶을 때가 있다.

안개는 낀다고 하고 는개는 내린다고 한다.

이 차이가 전부다.

공중에 머물러 세상을 흐리게 하는 것과, 작아도 끝내 땅으로 향하는 것.

둘 다 물방울이다.

그러나 하나는 떠 있고 하나는 떨어진다.


나는 떠 있는 것들을 믿지 않는다.


호랑비도 아니고 여우비도 아니다.

호랑비는 위세가 있고 여우비는 변덕이 있다.

는개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과시하지 않는다.

우산을 펼치기엔 민망하고 그냥 맞기엔 어느새 흠뻑 젖어버리는, 그 애매한 정직함.

는개의 성정이 그렇다.

소리보다 결을 남긴다.

한자어로는 연우(煙雨), 영어로는 misty rain.

어느 말로 불러도 같다.

작고 고요한 하강.


비록 이름에 '비'자를 달고 있지 않아도 는개는 비다.

안개비, 이슬비, 보슬비, 여우비.

이름 낮은 비들의 계보가 있다.

는개는 그 끝쯤에 있다.

가장 가늘고, 가장 조용하고, 가장 오래 젖는.


서양 사람들은 손등으로 비를 가늠한다.

나는 손바닥을 편다.

헤아리는 게 아니라 맞는 것이다.

님을 그리며 빗방울을 받는다고 했다.

그 말이 맞다.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는 건 측량이 아니라 신체로 하는 고백이다.

천수답에서 하늘을 기다리던 제사장도 그랬을 것이다.

계산하면 버틸 수 없는 기다림이 있다.

그냥 몸을 두는 수밖에 없는.

논이 갈라지도록 기다려도 하늘이 응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손바닥을 거두지 않는 것.

그게 제사다.

기도가 아니라.


우중충한 날이다.

그런데 새벽의 감성이 몰려온다.

슬퍼해야 할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낮이 새벽을 잠깐 빌려 쓰는 날이 있다.

시간이 흐릿해지는 날.

는개가 내리는 날이 그렇다.

봄이 완성되는 건 어느 화창한 날이 아니라 이런 날이다.

축축하고, 우중충하고, 조금 쓸쓸한.


는개는 오리라.


예보가 아니다.

기도도 아니다.

희망도 아니다.

그냥 아는 것이다.

내리는 것들은 결국 내린다.

작아도.

소리 없어도.

아무도 우산을 펼치지 않는 빗속에서도.

방향이 있는 것들은 멈추지 않는다.

공중에 머물다 사라지는 안개와 달리, 는개는 땅에 닿는다.

흙을 만진다.

갈라진 자리로 스민다.


봄은 그렇게 완성된다.


오늘 같은 날, 나는 손바닥을 하늘로 둔다.

맞을 준비가 됐다는 뜻이다.




ps1. 한때 사용했던 닉. 천수답에서 비를 기다리는 제사장 드림.


ps2. 올 줄 알았지~

안 왔다 씨.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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