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방법론
나는 가해자를 쓸 때 판정하지 않는다.
이 말을 하면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다. 판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용인한다는 것처럼 들리는가. 아니면 이해한다는 것처럼 들리는가. 둘 다 아니다. 판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판정은 편하다.
나쁜 사람이 있고, 그 나쁨을 확인하고, 그 확인을 통해 도덕적 질서가 회복된다. 독자는 안심한다.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나는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이다. 그 안심이 독서를 쉽게 만든다. 하지만 쉬운 독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판정이 있는 순간 텍스트는 법정이 된다. 법정에서 독자는 방청객이다. 안전한 거리에서 판결을 기다린다.
나는 법정을 쓰고 싶지 않았다.
십수 년 전 어느 밤을 기억하는 남자가 있다.
나이트클럽 지하실. 거절하거나 동의할 수 없는 상태의 여자. 친구가 행위를 가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 그리고 자신도 그 여자와 관계를 가지는 것.
나는 그 남자를 쓰면서 그가 왜 그랬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복수심도 없고, 억눌린 욕망도 없고, 자기혐오도 없다. 동기가 없다. 그저 다음 순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고만 썼다.
독자는 불편하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으면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면 판정을 내릴 수 없다. 판정을 내릴 수 없으면 독자는 어디에 서야 하는지 모른다.
그 모름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
어떤 행동은 동기로 설명되지 않는다.
특히 폭력이 그렇다. 우리는 폭력에 이유를 붙이고 싶어한다. 이유가 있으면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면 예방할 수 있고, 예방할 수 있으면 세계가 다시 안전해진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다.
하지만 어떤 폭력에는 이유가 없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렇다. 이유를 붙이는 것 자체가 폭력의 본질을 왜곡한다. 그 남자가 억눌린 욕망 때문에 그랬다고 쓰는 순간, 그 행위는 심리적 필연이 된다. 독자는 슬프게도 이해한다. 그리고 이해한 순간 그 여자의 무너진 경계는 배경으로 물러난다.
동기는 가해자를 주어로 만든다. 동기가 없으면 행위만 남는다. 행위만 남으면 그 행위가 어떤 상태를 만들었는지가 전면에 드러난다.
나는 동기 대신 상태를 쓴다. 선택이 사전에 고정된 국면. 요청과 거절의 언어가 작동하지 않는 상태. 이미 성립된 것의 지속.
판정하지 않는 것은 침묵이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보이게 한다.
판정이 있으면 독자는 판정을 향해 간다. 이 사람이 나쁜가 좋은가. 이 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 판정이 목적지가 되면 그 사이의 것들을 지나친다. 축 늘어진 팔을 지나친다. 꺾인 손목을 지나친다. 벌어진 손가락을 지나친다. 초점 없는 눈동자를 지나친다.
판정이 없으면 독자는 멈춘다. 지나칠 목적지가 없으니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 축 늘어진 팔 앞에서. 꺾인 손목 앞에서. 그리고 거기서 독자 자신이 판정한다. 내가 미리 내린 판정이 아니라 독자 자신의 것으로.
그것이 더 강하다. 작가가 건네는 판정보다 독자가 스스로 내리는 판정이.
하지만 오해가 있다.
판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모든 행위를 동등하게 다룬다는 뜻이 아니다. 폭력을 폭력이 아닌 것처럼 쓴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판정은 폭력을 언어화한다. 이것은 나쁜 것이다, 라고. 그 언어화가 폭력을 범주 안에 가둔다. 가둔 순간 폭력은 처리 가능한 것이 된다. 이해했고, 판단했고, 끝났다.
하지만 폭력은 처리 가능하지 않다. 폭력은 잔여를 남긴다.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 12도의 냉기처럼. 플라스틱 단추의 촉감처럼. 지문 사이의 얼룩처럼.
나는 그 잔여를 쓴다. 판정 없이. 판정이 없을 때 잔여가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폭력이 나쁘다고 쓰면 독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페이지로 간다. 폭력이 남긴 잔여를 쓰면 독자는 책을 덮고 나서도 그것을 손 안에 쥐고 있다.
나는 후자를 원한다.
십수 년이 지났다.
그 남자는 아직도 그날 밤으로 돌아간다. 아내의 몸을 볼 때마다. 소파 팔걸이에 기댄 아내의 허리를 볼 때마다. 주머니 속 플라스틱 단추를 만질 때마다.
나는 이것을 죄책감이라고 쓰지 않았다. 죄책감은 도덕적 주체를 전제한다. 내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자리. 그 자리에서 참회가 시작되고, 참회에서 용서가 시작되고, 용서에서 서사적 완결이 온다.
하지만 그 남자에게 완결은 없다.
낙인이기 때문이다. 낙인은 죄책감이 아니다. 잔여다. 끝났는데도 남아 있는 것. 12도의 냉기는 용서받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플라스틱 단추의 촉감은 참회한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거기 있다. 영원히.
나는 그것을 판정하지 않고 기록한다.
판정은 끝을 만든다. 잔여는 끝이 없다. 내가 기록하는 것은 끝이 없는 것이다.
서정이 있다면 이 자리에 있다.
아름다운 풍경 아래에서 누군가의 세계가 영원히 그날 밤에 묶여 있다는 것. 거실에서 사과를 깎는 아내.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일상. 그 평범함 속에서 12도의 냉기가 반복해서 현재로 흘러들어온다는 것.
서정은 그 평범함의 아름다움에 있다. 칼은 그 아름다움 아래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에 있다.
나는 판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 칼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를 가리킨다.
거기서 독자가 무엇을 보는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