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가 먼저 보인다

IV. 독자와 잔여

by leehyojoon ARCH

IV. 독자와 잔여

구조가 먼저 보인다


성애를 쓸 때 쾌락이 먼저 오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


쾌락이 먼저 오면 구조가 무너진다. 비대칭이 흐려진다. 쾌락은 대칭처럼 보이게 만든다. 둘 다 원하는 것처럼 읽힌다. 침묵의 권력이 사라진다. 긴장은 사라지고 소비가 남는다.


나는 구조가 먼저 보인다.


누가 먼저 멈추는가. 누가 말을 하지 않는가. 누가 공간을 점유하는가. 누가 시간을 지연시키는가. 신체는 그다음이다. 행위는 그다음이다.


왜 하필 성애인가.


나는 성애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권력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가장 인간적이다. 성애는 인간이 가장 무방비해지는 순간이다. 모든 위장을 벗는다. 모든 격식을 내려놓는다. 신체가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욕망이 가장 솔직하게 나온다. 거짓말이 가장 어렵다.


가장 권력적이다. 누가 먼저 제안하는가. 누가 거부할 수 있는가. 누가 속도를 조절하는가. 누가 멈출 권한을 갖는가. 이 모든 것이 권력이다. 그 권력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다른 장면에서는 권력이 은폐된다.


직장에서는 위계가 명시되어 있다. 법적 관계로 이미 정해져 있다. 가족에서는 역할로 구분되어 있다. 우정에서는 평등이라는 환상으로 가려져 있다. 일상 대화에서는 예의라는 이름으로 숨겨져 있다.


성애에서는 은폐가 불가능하다. 옷을 벗는 순간 지위도 벗는다. 역할도 벗는다. 예의도 벗는다. 남는 것은 신체와 욕망과 권력뿐이다.


폭력은 어떤가.


폭력도 권력을 드러낸다. 하지만 구조가 단선화되기 쉽다. 가해와 피해. 공격과 방어. 비대칭이 너무 명확해진다. 독자가 빨리 판정한다. 구조가 도덕으로 환원된다.


나는 판정 유보를 기본값으로 둔다.


성애는 자발성과 강요의 경계가 모호하다. 욕망과 권력이 섞여 있다. 쾌락과 침묵이 병존한다. 동의의 표면과 권력의 심층이 따로 움직인다. 겉으로는 상호적처럼 보이지만 내부에는 미세한 기울기가 있다.


나는 그 기울기를 본다. 균형이 아니라 경사를 본다.


한때, 한강 작가의 폭력 묘사에 주목했었다. 감정 설명 없이 신체의 물성, 촉각, 압력, 조직의 파열을 차갑고 집요하게 관측했다. 육체를 물질로 환원하는 디테일. 폭력에서는 이 방식이 작동했다.


그것을 성애에 적용했을 때 문제가 생겼다.


폭력에서는 물성 강조가 파괴의 관측이지만 성애에서는 대상화, 소비, 쾌락 강화로 읽힐 위험이 커졌다. 폭력은 본질적으로 비대칭이 명확하다. 그래서 물리 디테일이 구조를 강화한다. 성애는 비대칭이 모호하다. 여기서 물리 디테일을 밀어붙이면 쾌락이 먼저 보이고 구조가 흐려진다.


방향을 조정했다.


신체의 세부보다 배치. 접촉의 순간보다 접촉 직전의 정지. 행위보다 권력의 기울기. 반복 재현 대신 잔여와 트리거.


물성 디테일이 빠지면 서사가 아니라 보고서가 된다. 물성 디테일은 필요하다. 그런데 조건부로 통제해야 한다. 상태는 공기나 추상 개념이 아니라 물리 조건으로 드러난다. 체온. 압력. 마찰. 거리. 속도. 호흡의 간격.


물성은 쾌락이 아니라 기울기를 드러내야 한다. 압력이 누구 쪽에서 먼저 증가하는가. 체온 변화가 누구의 반응인가. 멈춤이 누구의 선택인가.


디테일은 행위 확대가 아니라 상태 이동을 표시해야 한다. 반복 묘사는 안 된다. 감각의 축적도 안 된다. 이행 지점 표시만.


신체는 객체가 아니라 하중 지점이어야 한다.


폭력에서는 파열이 구조다. 성애에서는 균열이 구조다. 파열은 디테일을 밀어붙여도 무너지지 않는다. 균열은 과도한 디테일로 덮여버린다.


나는 절제하는 게 아니다. 밀도를 조절한다. 디테일을 줄이는 게 아니라 디테일이 구조를 가리지 않게 하는 것.


디테일이 많아질수록 긴장이 증가해야 한다. 감각이 증가하면 안 된다.


구조가 먼저 보인다. 그다음에 신체가 보인다.


그런데 때로 순서가 흐려질 때가 있다. 신체가 먼저 보이는 순간. 쾌락이 앞서는 순간. 그 순간을 경계하면서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지우면 인간이 사라진다. 권력만 남는다. 그것도 아니다.


인간이 가장 인간적인 순간과 가장 권력적인 순간이 겹쳐 있는 것. 그 겹침을 어떻게 쓸 것인가. 아직 완전히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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