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독자와 잔여
위로는 거리를 만든다.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이 안전하다. 괜찮다는 말은 지금은 괜찮지 않지만 언젠가는 괜찮아질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 약속이 현재의 고통과 미래의 회복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나는 그 다리를 쓰지 않는다.
다리가 있으면 독자는 건넌다. 건너는 순간 고통은 지나간 것이 된다. 하지만 어떤 고통은 지나가지 않는다. 지나간 것처럼 쓰면 거짓이 된다. 나는 거짓을 쓸 수 없다.
아들을 잃은 엄마를 쓸 때 결말을 주지 않았다.
엄마가 살아남는 결말도 없고 따라가는 결말도 없다.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낙하가 어디서 멈추는지 쓰지 않았다. 멈추는지 아닌지도 쓰지 않았다.
독자는 불편하다. 이것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다. 엄마가 괜찮아지는지 알고 싶다. 그 알고 싶음이 위로를 향한 욕구다. 독자는 고통 앞에서 본능적으로 회복을 원한다.
나는 그 욕구를 채워주지 않는다.
채워주는 순간 텍스트는 안심을 파는 것이 된다. 안심을 사고 나면 독자는 책을 덮는다. 그리고 엄마를 잊는다. 비명 없는 추락도 모두 해소되어 사라진다.
나는 독자가 잊기를 원하지 않는다.
위로 없이 쓴다는 것이 잔인하다는 말을 듣는다. 고통받는 인물을 그 고통 속에 가두어놓는다고. 구원을 주지 않는다고. 독자에게 숨 쉴 공간을 주지 않는다고.
잔인한 것은 고통을 고통 속에 두는 것인가. 아니면 고통을 위로로 덮어버리는 것인가.
상실한 사람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위로인가 폭력인가. 선의였지만 압력이었던 것. 아무것도 채우지 않고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 위로는 때로 그 진공을 빼앗는다.
카타르시스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스 비극은 카타르시스를 목적으로 했다. 감정의 정화. 공포와 연민을 통해 감정을 배설하고 극장을 나서면 정화된 상태가 된다. 이것이 수천 년 동안 서사의 목적이었다.
나는 카타르시스를 원하지 않는다.
카타르시스는 배설이다. 배설하고 나면 비워진다. 비워진 독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텍스트는 그 배설을 도운 것으로 끝난다.
나는 독자가 비워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독자가 무언가를 쥐고 극장을 나서기를 원한다. 설명할 수 없지만 손 안에 있는 것. 책을 덮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
위로는 배설을 돕는다. 나는 잔여를 남기는 것을 원한다.
그렇다면 독자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위로 없이 쓴다는 것은 독자를 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독자에게 다른 것을 주는 것이다. 안심 대신 정확함을. 해소 대신 압력을. 회복의 약속 대신 지금 이 상태의 무게를.
그것이 더 정직하다.
고통은 언제나 회복되지 않는다. 어떤 상실은 끝나지 않는다. 낙인은 씻기지 않는다. 이것을 위로로 덮으면 거짓이 된다. 거짓 위로를 받은 독자는 잠깐 안심하지만 결국 혼자 남는다. 자신의 고통이 그 위로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나는 그 순간을 만들고 싶지 않다.
대신 고통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 끝나지 않는 것은 끝나지 않는다고. 씻기지 않는 것은 씻기지 않는다고. 낙하가 어디서 멈추는지 모른다고.
그 정직함이 어떤 독자에게는 위로가 된다. 내가 위로를 건네서가 아니라 자신의 고통이 거짓으로 덮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위로 없이 쓴다는 것은 독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독자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독자가 견딜 수 있다고 믿는다는 뜻이다. 괜찮다는 말 없이도 그 무게 앞에 설 수 있다고 믿는다는 뜻이다.
위로는 때로 독자를 아이로 만든다. 이것은 너무 무거우니 내가 들어주겠다고.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무게를 그대로 건넨다.
독자가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들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옳은지 틀린지는 알 수 없다. 어떤 독자는 책을 덮고 다시 펴지 않는다. 어떤 독자는 그 무게를 오래 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