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 가짜로 읽히는 시대
ㅡ스레드에서 차단당했다. 그날 밤 이 글을 썼다.
오늘 누군가에게 차단당했다.
내가 쓴 댓글이 AI가 쓴 것 같다는 이유였다.
그 사람은 "무아지경에서 쏟아낸 글"을 사랑하는 창작자였다. 달리기할 때처럼 한 호흡에 써내려가는 글. AI에게 절대 맡기지 않겠다는 고집.
나는 그 고집이 좋아서 댓글을 달았다. 감탄을 언발하면서.
내가 왜 굳이 댓글을 달았겠는가? 그 완고함이, 그 타협 없는 태도가 좋아서였다.
썼다. 정교하게 계산하지 않았다. 그냥 반응했다.
하지만 그 반응이 이미 체화된 방식으로 나왔다. 건축가가 건물을 보면 자동으로 구조를 보듯, 나는 글을 보면 자동으로 그 아래를 본다.
즉흥적으로 써도 이제는 습관으로 작동한다.
근데 그게 AI로 읽혔다.
"...님께서 제게 쓰신 답변이 AI에게 제 글을 복사 붙여넣기 하시고 답변을 해달라고 한 것임을 거의 확신하고 있습니다."
차단당했다.
해명(?) 글을 손을 벌벌 떨면서 작성했는데. 차단되니 로드되지 않았다.
처음 몇 시간은 황당했다.
AI? 나는 문장. 한 문장 골라서 썼는데?
왜 AI로 읽혔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내 댓글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정교하려 한 구조. '상태적 리얼리즘'이라는 생경한 용어. '상태값'이라는 개념어. 감정의 즉시성이 결여된 문장.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수고가 삭제된 언어처럼 보였을 것이다.
나는 그 질문을 감정이 아니라 구조의 언어로 다루는 사람이다.
누군가는 달리기의 무아지경 속에서 몸이 먼저 움직이고 언어가 뒤따르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그 글쓰기는 뜨겁고, 살아 있으며, 박동한다. 독자는 그 거친 숨소리를 함께 들으며 달린다.
반면 나는 한 문장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쓰는 과정을 반복한다. 논리를 세우고 단어를 고르고, 문장의 온도를 조절한다. 이 과정에서 즉흥성은 사라지고, 매끄러움과 구조만 남는다.
그래서 내 글은 즉흥성이 없고, 과도하게 매끄러우며, 차갑다.
상대는 같이 헉헉거리며 달리는 동료를 원했는데, 나는 달리기를 분석한 리포트를 건넸다.
처음에는 몇 시간 동안 한 단락을 다듬는 지난한 노동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체화되어 그 시간이 짧아졌다. 댓글을 쓸 때조차 이 프레임이 작동하고, 댓글의 성격상 더 다듬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연산된 데이터 덩어리'처럼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숙고가 체화될수록 기계처럼 보이는 역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AI로 읽혔다는 것보다, 내 댓글이 어떤 지점을 건드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사람의 글은 표면적으로 즐거움의 선언이었다.
"달리기 중 무아지경처럼 쏟아내는 글이 좋다."
"이게 너무 좋아서 AI에게 맡기지 않겠다."
강렬한 긍정. 타협 없는 고집.
나는 그 선언을 읽으면서, 그 아래 깔린 무게를 느꼈다.
정확히는, 내가 오래 붙잡고 있던 무게를 거기서 느꼈다.
_전직 건축가다. 건물을 볼 때 외관보다 구조를 먼저 보는 습관이 있다. 글을 읽을 때도 비슷하다.
선언이 강할수록, 보통 그 아래 질문도 있다. 소설 쓰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인물의 진짜 욕망은 대사 아래에 있다.
"나는 괜찮아"라고 강하게 말하는 인물은 보통 괜찮지 않다.
"이게 좋아"라고 반복하는 인물은 보통 "그래도 괜찮을까?"를 묻고 있다.
이게 어느정도 체화되어 있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댓글을 써도 이렇게 나온다.
그래서 나는 댓글에 이런 질문을 썼다.
"과연 읽히지 않는 텍스트가 의미가 있나? 난 자위하려 책을 쓰나?"
이건 내 질문이었다. 상대가 직접 말하지 않은 질문. 내가 오래 붙잡고 있던 질문.
그래서 어긋났다.
더 정직하게 말하면, 나는 상대의 질문을 읽어낸 게 아니라, 내 질문을 상대에게 투사했을 수도 있다.
"읽히지 않는 글의 의미"는 내가 오래 붙잡고 있던 불안이다.
상대는 아직 그 단계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냥 즐거움을 선언하고 있었을 뿐인데, 내가 거기에 불안을 덮어씌웠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것 역시 나의 방식일 뿐이다.
상대의 글을 읽는 게 아니라, 내 지도 위에 상대를 표시하는 것.
이게 정확한 독해인지, 과잉 해석인지, 나조차 확신할 수 없다.
상대는 아직 그 질문을 직접 꺼내지 않았다. "무아지경이 좋다"는 선언만 했다.
근데 나는 그 아래 깔렸을지 모를 "그래도 의미 있나?"를 먼저 꺼냈다.
내가 아직 열지 않은 서랍을 상대가 먼저 열어본 느낌. 이게 불쾌함이었을 수도 있다.
SNS에서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꽂힌 부분에만 반응한다. "나도 그래요", "맞아요", "힘내세요".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게 안전하다. 이게 자연스럽다. 같은 층위에서의 교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안 했다. 상대가 "나는 이렇게 쓰는 게 좋다"고 선언하고 있을 때, 나는 (어쩌면 혼자) "그래서 이게 의미가 있나?"를 물었다.
상대는 같은 불안을 나누는 대화를 원했지만, 나는 그 불안을 이미 개념화한 언어로 답했다. 상대의 현재 위치와 내 응답 위치가 어긋났다. 이건 같은 층위의 교환이 아니라, 다른 층위로의 이동이다.
즉시 반응이 요구되는 환경에서, 다른 층위로 이동하는 건 계산처럼 보인다. "즉흥적 공감"이 아니라 "구조적 독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상대는 연대를 원했는데, 내가 준 건 분석이었다.
역설이 발생한다.
AI는 점점 더 "인간적인 실수"를 모방한다. 일부러 오타를 넣고, "음..." "아..." 같은 말을 넣는다. 이모티콘을 쓴다. 즉흥적으로 보이려고 한다.
인간은? 맞춤법을 확인하고, 문장을 다듬고, 논리를 세운다. 맥락을 파악하고, 구조를 읽고, 아래 깔렸을지 모를 질문을 찾는다.
둘이 교차한다.
정교함이 인간의 전유물이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정교함은 의심의 근거가 되었다.
사실 나는 극F 성향이다. 너무 공감적인 사람이다.
예전 직장에서 사수는 이런 말을 했다. "넌 사람에 대한 이해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다." 어감상 절대 칭찬이 아니었다.
아내는 내가 둥둥 떠다닌다고 말한다. 누구의 말을 듣든 그 사람 편이 되어버린다고. 중심을 잡으라고, 냉정하길 주문한다.
공감이 과하면 중심을 잃는다. 감정에 함몰되면 판단이 흐려진다.
그래서 일부러 반대 방향으로 훈련했다.
체호프를 읽었을 때였다.
『바냐 아저씨』에서 바냐는 세레브랴코프 교수에게 총을 쏜다. 빗나간다. 두 번 쏜다. 또 빗나간다. 그리고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간다. 바냐는 여전히 불행하고, 소냐는 여전히 사랑받지 못하고, 모두가 여전히 같은 집에서 같은 일을 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바냐 아저씨. 긴긴 날들을, 긴긴 밤들을 살아야 합니다."
해결도 구원도 없다. 그냥 계속 살아야 한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총은 빗나가는가? 왜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는가?
하지만 점점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산다. 총을 쏘지만 빗나간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지만 그래도 살아간다.
체호프는 인물을 심판하지 않는다. 구원하지도 않는다. 그냥 관찰한다. 기록한다.
나는 그쪽으로 이동했다. 판사가 아니라 목격자로.
그 이동은 오래전 일이다. 나는 이미 그 방향으로 몇 년을 걸어왔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방법론을 만들었다. '상태적 리얼리즘'이라고 이름 붙였다.
감정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상태를 기록한다.
"슬프다"고 쓰지 않고, "11도"라고 쓴다. "무겁다"고 쓰지 않고, "1.2kg"이라고 쓴다. 감정 형용사는 독자에게 해석의 틀을 강요한다. 하지만 상태값은 독자가 자기 방식으로 느낄 공간을 남긴다.
타인의 내면을 단정하지 않는다. "그는 슬펐다"고 쓰지 않는다. "그는 슬퍼 보였다", "슬펐겠구나"라고 쓴다. 타인의 감정을 함부로 점유하지 않는다. 관찰만 한다. 추론만 한다.
3미터의 거리를 유지한다. 비극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3미터 밖에서 응시한다. 너무 가까우면 감정에 압도된다. 너무 멀면 냉소가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 상황에서 누가 버티고 누가 부서지는가를 구별한다.
구원하지 않는다. 정당화하지 않는다. 대신 붕괴의 지점을 정확히 측정한다. 누가 이 무게를 견디는가, 누가 이 무게에 짓눌리는가. 그 경계선을 기록한다.
"힘내세요, 잘 될 거예요" 같은 위로 대신, "이 사람은 1.2kg을 버티고 있다"는 측정을 남긴다.
이것이 내가 몇 년에 걸쳐 체화해 온 방법론이다.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어떤 틀 안에서 자동으로 보게 된다.
일상 언어에서도 상태값이 튀어나온다. "오늘 기분 어때?"라는 질문에 "11도 정도?"라고 대답하고 싶어진다. 친구가 "힘들다"고 말하면, "어느 정도?"라고 묻고 싶어진다. 무게로, 온도로, 거리로.
이젠 후유증이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댓글을 써도 이렇게 나온다. 나는 상대의 선언을 읽으면서, 습관적으로 그 아래 깔린 구조를 봤다. "무아지경의 글쓰기가 좋다" → 그 아래 "읽히지 않아도 괜찮을까?" 이건 내가 의도한 게 아니다. 그냥 튀어나온다.
나는 이미 그 질문을 오래 붙잡고 있던 사람의 언어를 쓴다. "무아지경의 글쓰기"를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면, 그 아래 "읽히지 않아도 괜찮을까?"라는 질문을 본다. 왜냐하면 나도 그 질문을 살아왔으니까.
그 언어는 공감보다 구조를, 위로보다 질문을, 선언보다 분석을 먼저 본다.
그래서 같은 질문을 현재진행형으로 사는 사람에겐 "정확하다". 그 질문이 아직 낯선 사람에겐 "침투적이다". 어떤 사람에겐 "AI 같다".
솔직히 억울하다. 나는 그냥 읽었을 뿐인데.
근데 동시에 인정한다. 내 방식이 침투적일 수 있다는 걸.
상대가 "나는 이렇게 쓰는 게 좋다"고 선언하고 있을 때, 나는 (어쩌면 혼자) "그래서 이게 의미가 있나?"를 물었다. 상대의 현재 위치와 내 응답 위치가 어긋났다. 그래서 상대는 이해받았다가 아니라, 분석당했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어쩌면 이건 그냥 서로 다른 각도에서 봤다는 것일 뿐일지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속도로, 서로 다른 지점에 머문다. 나는 이미 그 질문을 여러 번 통과해 왔고, 방법론을 만들었고, 그걸 체화한 상태였다. 반면 상대는 아직 선언의 열기 한가운데 있었을지 모른다.
즉흥이 진심의 증거가 되고, 구조는 생명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꼭 재즈만이 음악인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다.
즉흥이 자유의 증거였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즉흥은 또 하나의 규격이 되었다. 재즈가 자유의 상징이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세기에 재즈는 더 이상 자유가 아니라 또 하나의 양식일 뿐이라는 것을.
"날것의 언어"도 이제는 하나의 양식이다. 문제는 이 양식이 유일한 진정성의 증거로 군림하고 있다는 점이다.
AI가 인간을 모방한다고 말한다. 맞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도 "진정성의 새로운 공식"에 맞춰 자신을 조정하고 있지 않은가? 즉흥적으로 보이기 위해 일부러 덜 다듬는다. 감정적으로 보이기 위해 과장한다. 날것처럼 보이기 위해 계산한다.
과연 누가 누구를 모방하고 있는가?
구조적으로 읽는 것도 진심이다. 즉시 반응하고, 같은 층위에서 공감하는 게 진심만은 아니다. 상대가 아직 말하지 않은 질문을 (어쩌면 혼자) 보는 것도, 비록 그게 내 질문의 투사일지라도, 진심이다.
숙고도 진심이다. 구조도 진심이다. 상태값도 진심이다.
AI가 인간을 모방하는 시대에, 인간이 구조적으로 사유하면 기계로 오해받는다.
즉흥성만이 진심의 증거라면, 구조적 사고는 거짓의 증거인가?
재즈만이 음악인가?
그래도 가끔은, 내가 너무 앞서간 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도 그 질문이 정확했는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렇게 읽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이것을 남겨두기 위한 글이다.
P.S.
이 글을 올리기 전에 오래 들여다봤다. 스레드에서 차단당한 그날 밤부터.
재즈 단락이 먼저 걸렸다. 차단당한 그 하루의 온도 안에서 끝냈어야 했다. 개인의 사건이 시대 진단으로 점프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날이 무뎌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글을 약하게 만드는 지점. 이게 맹점이었다. 그럼에도 못 지웠다. 그 단락이 없으면 이 글이 그냥 차단당한 하루의 하소연으로 끝날 것 같았다. 미련이었는지, 필요였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상태적 리얼리즘 단락도 오래 봤다. 방법론은 오래전에 만들어졌고, 그게 체화되어 이번 사건을 불렀다. 그런데 글 안에서 그 인과가 제대로 살지 않았다. 독자 입장에서는 에세이가 갑자기 선언문이 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사건이 개념을 끌고 와야 하는데, 개념이 사건 위에 얹혔다. 구조를 아는 사람이 자기 글의 구조를 놓쳤다는 것. 이것도 맹점이었다.
하드보일드 정서는 앞부분에만 살아있다. "차단당했다. 해명 글을 손을 벌벌 떨면서 작성했는데. 차단되니 로드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상황만 남겼다. 그 아래 온도가 있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논증이 앞으로 나왔다. "과연 누가 누구를 모방하고 있는가?" "숙고도 진심이다. 구조도 진심이다. 상태값도 진심이다." 지워야 할 문장들이었다. 설명하는 순간 칼날은 무뎌진다는 걸 알면서도 지우지 못했다. 자기 변호가 필요했던 것인지. 아니면 독자가 못 알아볼까봐 친절을 베푼 것인지. 나는 친절한 사람이다. 상태적 리얼리즘이라는 틀을 세운 것도 그 친절함의 반작용이었는데, 결국 글 안에서도 친절이 칼날을 덮었다.
서정적 풍광 속 피빛 칼날. 이 글은 그게 아니다. 칼날은 있는데 풍광이 없다. 피빛보다 형광등 빛에 가깝다. 서정을 포기하고 논증을 택했다. 그게 이 글의 한계이고, 동시에 이 글의 성격이기도 하다. 아직 그 선택이 옳았는지 모르겠다.
글을 지우는 일이 참 어렵다.
지우지 못한 문장들이 이 글의 맹점이고, 동시에 내가 아직 통과하지 못한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