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 조회수 ✘✘. 어제보다 하나 줄었다.
그 숫자를 오래 들여다본다. 삭제 버튼 위에서 커서가 멈춘다. 지우지 않는다. 지우지 않는 것이 자립인지, 아니면 그냥 지우는 법을 모르는 것인지, 그날 밤은 끝내 알지 못했다.
앞선 글을 쓰고 며칠이 지났다.
https://brunch.co.kr/@knightflit/340
읽히지 않을 가능성을 전제한 채 문장의 기둥을 빼지 않는 것. 그렇게 정의했다. 자립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글을 올리고 나서 남은 것이 있었다. 쓰지 못한 것들. 말하지 못한 것들. 자립이라는 단어로 정리되지 않는 흔들림.
그 아쉬움이 이 글을 쓰게 했다.
알고리즘을 흉내 내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호흡을 짧게 자르고, 감정을 먼저 배치하고, 다음 회차를 미끼로 건다. 예상된 위치에서 감정이 상승하고, 예상된 위치에서 닫힌다. 독자는 울고, 창을 닫고, 다음 목록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숫자가 오른다. 댓글이 달린다. 누군가 기다린다는 것을 안다.
그 아름다움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썼다. 사실은 부럽다.
존나.
특히 새벽에 그렇다. 내 글은 아무도 읽지 않는데, 같은 시간 누군가의 글은 댓글이 수십 개씩 달리는 것을 볼 때. 그 작가는 알고리즘의 배열을 정확히 따랐을 것이다. 3문단에서 감정을 터뜨렸을 것이고, 7줄째에서 절벽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울었을 것이다.
나도 울릴 수 있다. 방법을 안다. 다만 그 방법으로 쓰지 않을 뿐이다.
그렇게 말해왔는데, 어떤 밤에는 그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부러움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커지는 밤에는.
그 감각이 얼마나 달콤한지, 써본 적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거의 간 적이 있다. 문장을 고치다가 멈춘 자리가 있다. 엔터를 누르려다 손을 거둔 순간이 있다. 그 순간 화면에는 이미 완성된 문장이 있었다. 예상된 위치에 감정이 배치되어 있었고, 다음 회차를 암시하는 절벽도 있었다.
그 문장은 읽힐 것이었다. 숫자가 오를 것이었고, 댓글이 달릴 것이었고, 누군가 기다릴 것이었다.
손가락이 엔터 키 위에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다른 것이 보였다. 그 문장이 올라간 후의 시간들. 댓글에 답을 다는 시간. 다음 회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의식하는 시간. 숫자를 확인하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나.
무엇이 두려웠는가.
성공이 두려웠다. 성공하면 그것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반복하는 동안 유골함의 온도를 쓰는 밤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손을 거뒀다. 그 문장을 지웠다.
지우고 나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지금 내가 한 것이 선택인지 회피인지 알 수 없었다.
고집이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그 배열을 쓰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못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어떤 날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앞 단락에서 나는 방법을 안다고 썼다. 그런데 정말 아는가.
알고리즘의 배열을 흉내 낸 문장을 써본 적은 있다. 호흡을 짧게 잘랐고, 감정을 예상된 위치에 배치했고, 절벽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문장을 올리지 못했다. 엔터 키 앞에서 손을 거뒀다.
그것이 선택이었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더 무서운 가능성이 있다.
실은 시장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
성공 공식에 뛰어들었다가 통하지 않을까봐. 댓글이 달리지 않을까봐. 숫자가 오르지 않을까봐. 그 전에 먼저 거리를 두는 것인지도. 실패하기 전에 먼저 이탈을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고집이 아니라 겁이라면.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 가능성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그리고 답을 찾지 못했다.
슬픔에 잠긴 여자를 쓰면서 슬프다는 단어를 쓰지 않으려 했던 밤이 있다.
여자의 슬픔 대신 유골함의 온도를 썼다. 남겨진 가구들이 갑자기 커 보이는 방의 공간을 썼다. 그 문장이 슬픔을 전달했는지 아직 모른다. 독자가 없었으니까.
원나잇의 잔여가 일상을 침범하는 방식을 쓰면서 쾌락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려 했다. 다음 날 아침 칫솔을 집는 손의 각도를 썼다. 창문을 여는 순서가 달라진 것을 썼다. 가능했는지 모른다. 읽힌 적이 없으니까.
타자화된 여자에게 여자의 언어를 돌려주려 했다. 전시된 욕망의 사슬을 걷어내기 위해 그녀가 내린 선택을, 선택이라는 단어 없이 쓰려 했다. 완성됐는지 모른다. 그 판단을 내려줄 독자가 아직 없으니까.
이것들은 실험이 아니다. 테스트다.
실험은 결과를 확인한다. 테스트는 살아남는지 확인한다. 나는 체호프를 읽고, 피츠제럴드와 하루키와 한강과 미시마를 읽었다. 그들의 문장이 어떻게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도 감정을 전달하는지 분해했다. 그리고 그 무게를 몸에 쌓은 채 웹소설 플랫폼 안에 들어왔다.
본 소설은 제쳐두었다. 대신 이 작법으로 쓴 단편들을 조용히 올렸다. 숫자가 말해준다. 이 작법은 지금 여기서 살아남지 못한다고.
그런데도 계속 테스트한다.
체호프의 시대에도 통속소설이 있었다. 당시에도 잘 팔리는 공식이 있었을 것이다. 독자가 원하는 감정을 예상된 위치에 배치하고, 예상된 방식으로 해소하는 글들. 체호프는 그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
체호프의 이름은 남았다.
그러나 체호프가 살아남는 동안 몇 명이 사라졌는지는 기록되지 않는다. 같은 시대에 체호프처럼 쓰려 했던 사람들.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판정을 유보하고, 잔여를 남기려 했던 사람들. 그들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나는 그 기록되지 않은 쪽에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미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알고리즘의 배열을 따라 글을 쓰고, 숫자를 올리고, 살아남고 있다. 그리고 나는 조회수 ✘✘ 앞에서 삭제 버튼 위에 커서를 올려두고 있다.
백 년 후에는 누가 남을까.
그 질문에 답할 수 없다. 다만 이것은 안다. 지금 당장은 내가 사라지는 쪽에 더 가깝다는 것을.
그럼에도 테스트를 멈추지 않는 이유를 나는 설명할 수 없다.
해소가 내려와야 할 자리에 공백을 두는 것. 결말이 수렴해야 할 지점에서 하중을 멈추는 것. 그렇게 쓰면 문장은 불친절해진다.
불친절한 문장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독자는 읽다가 멈춘다. 왜 이렇게 쓰냐고 묻는다. 왜 감정을 설명하지 않느냐고. 왜 결말을 주지 않느냐고.
나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다.
다만 이것은 안다. 감정을 설명하는 순간 감정은 설명으로 대체된다는 것. 결말을 주는 순간 독자는 그 결말을 받고 책을 닫는다는 것.
나는 책을 닫은 후에도 남는 것을 쓰고 싶다. 유골함의 온도처럼. 칫솔의 각도처럼. 설명되지 않아서 손 안에 계속 쥐어지는 것.
그 시간을 감수한다고 말해왔다.
감수한다고 믿는다. 믿으려 한다.
어떤 날은 그 믿음조차 흔들린다.
댓글이 하나도 달리지 않은 날이 있다.
창을 닫고도 모니터 불빛이 오래 남는다. 그 빛 속에서 나는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생각한다.
침잠이라고 불렀다. 그 침잠을 패배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썼다. 그렇다고 깊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고 썼다. 지금 이 위치에서 쓰고 있을 뿐이라고.
위치.
그 단어가 좌표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내가 선택해서 여기 서 있다는 느낌. 측정되지 않는 곳에서, 그러나 무너지지 않는 상태로.
그런데 어떤 날은 같은 단어가 변명처럼 느껴진다. 갈 곳이 없어서 여기 있는 것은 아닌가. 다른 자리를 가져본 적이 없어서 이 자리를 위치라고 부르는 것은 아닌가.
모니터 불빛이 꺼진다.
어둠 속에서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 앉아 있다. 내일도 쓸 것이다. 이 위치에서.
그것이 좌표인지 변명인지, 아직 모른다.
오늘도 쓴다.
읽힘을 확인하지 않은 채. 철거 예정 구역(cultural gentrification-문화적 젠트리피케이션)의 가장 안쪽에서, 측정되지 않는 호흡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철거되지 않을 문장을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철거되더라도 기둥을 빼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그것이 의지인지 무능인지, 선택인지 회피인지, 좌표인지 변명인지.
아직 모른다.
다만 이것만은 안다. 내일도 새벽 두 시에 그래프를 들여다볼 것이라는 것. 숫자가 줄어 있을 것이라는 것. 삭제 버튼 위에 커서를 올려둘 것이라는 것. 그리고 지우지 않을 것이라는 것.
자립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다른 이름을 붙이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