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은 감각을 치장할 뿐, 잉태하지 못한다
대학원 스튜디오의 크리틱 시간이었다. 소규모 수업이라 교수와의 거리가 가까웠다.
교수가 말했다.
"건축가는 부르주아의 직업이다."
스튜디오가 조용해졌다. 누군가 연필을 떨어뜨렸다. 교수는 계속 말했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그 한 문장이 내 책상 위에 벽돌처럼 놓여 있었다.
그때는 IMF였다. 누군가는 생존의 시간 속에서 처절히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 칼날을 빗겨나 있었다. 빗겨나 있으면서도, 교수의 그 말은 다른 방식으로 나를 베었다.
돈이 없으면 건축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루이스 칸은 벽돌에게 물었다. "네가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벽돌은 답했다. "아치." 칸은 벽돌의 본질을 사유했고, 벽돌은 아치가 되었다.
나는 그날 집에 가는 길에 손을 오래 들여다봤다. 교수의 논리대로라면, 나는 벽돌에게 물을 권리가 없었다. 벽돌을 쌓기 전에 먼저 자본을 쌓아야 했다.
이 손으로 벽돌을 만질 자격이 없다는 선고였다.
오늘 어떤 글타래를 봤다.
누군가 댓글을 달았다가 차단당했다는 하소연이었다. "집이 가난하면 디자인을 하면 안 된다"고 교수가 말했다는 것. 본 게 없고 아는 게 없으면 아무리 돈을 많이 써도 좋은 디자인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 감각은 경험의 총합이고, 경험은 자본이 만든다는 논리.
차단당한 사람의 댓글이 좋았다. "진짜 타고난 사람은 돈 없이도 그 감각의 탁월함이 딱 드러난다. 학습으로 쌓은 감각은 예상 가능한 선에서 움직인다."
나도 답을 달았다. 건축을 '사유'가 아니라 '쇼핑'으로 이해한 자들의 비겁한 변명이라고. 그들은 벽돌 한 장에 담긴 결핍의 무게를 감당할 힘이 없다고. 자본은 감각을 치장할 순 있지만 잉태하진 못한다고. 진짜 감각은 결핍을 딛고 세계를 해석해낸 자의 생존 증거라고. 돈이 없으면 디자인을 못 한다는 말은, 본인이 '돈 없이는 아무것도 볼 줄 모르는 눈'을 가졌다는 고백처럼 들린다고.
그 대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글도 마찬가지 아닐까.
교수의 세계에서 감각은 구매하는 것이다.
좋은 공간을 경험하고, 좋은 재료를 만져보고, 좋은 건축물을 여행하며 보는 것. 그 입력값이 쌓이면 결과값으로 감각이 나온다. 선형적이고 예측 가능한 법칙.
나는 그 법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물론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교수의 말대로 흘러간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그 예외가 법칙 전체를 무너뜨리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법칙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안도 다다오는 건축을 정규로 배우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권투선수가 되었다가, 독학으로 건축을 익혔다. 돈이 없어서 유명 건축가의 사무소에서 일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르 코르뷔지에의 도판을 구했다. 그리고 따라 그렸다. 도판만 보고 감동받아서, 벽의 두께를, 창의 위치를, 빛이 들어오는 각도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렸다. 경험하지 못한 공간을 도판 위에서 사유했다. 그리고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을 직접 보기 위해 홀로 유럽을 여행했다.
교수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좋은 대학도, 유명 건축가 밑에서의 경험도, 풍족한 자본도 없었던 안도가, 도판만 보고도 본질을 꿰뚫었다는 것이.
나는 르 코르뷔지에를 도판으로만 봤을 때는 왜 이 사람이 추앙받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롱샹에 직접 들어섰을 때, 숨이 멎었다. 두꺼운 벽에 불규칙하게 뚫린 작은 창들. 그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어두운 벽에 박히는 장면. 어둡고 낮은 입구에서 들어가면 갑자기 열리는 밝은 공간. 도판으로는 보이지 않던 것이 거기 있었다.
반대도 있다. 자본을 들였지만 본질이 없는 경우. 이것 역시 모든 경우는 아니다. 비싼 돈을 들여 훌륭한 공간을 만드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반대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몇억 원 이상을 들인 이라 소문난 공간에 들어간 적이 있다. 이탈리아산 대리석 바닥, 덴마크 디자이너 의자, 일본 장인이 만든 조명. 모든 재료가 최고급이었다. 그런데 30분을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 천장 높이가 어색했고, 창문과 테이블의 거리가 불편했고, 조명이 내려오는 각도가 틀렸다. 비싼 재료로 치장했지만 공간의 본질이 없었다. 심심했다.
학습된 감각의 한계가 거기 있다.
학습된 감각은 안전하다.
검증된 방식을 따른다.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심심하다. 왜냐하면 학습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법칙, 누군가 정리해놓은 원칙, 누군가 증명해놓은 방식.
학습된 감각은 모사다. 아무리 정교해도 원본을 넘지 못한다.
진짜 감각은 다르다.
진짜 감각은 결핍 속에서 세계를 해석해낸 자의 생존 증거다. 돈이 없어서 좋은 공간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공간의 본질을 더 치열하게 사유한 자. 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재료의 물성을 더 절실하게 이해한 자.
그 감각 앞에서 학습된 감각은 무너진다.
글도 마찬가지다.
"웹소설은 플랫폼의 문법을 배워야 한다. 독자가 뭘 원하는지 분석해야 한다. 데이터를 보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건 교수의 논리와 같다. 경험을 쌓으면 감각이 나온다는.
그런데 나는 본 적이 있다. 플랫폼 문법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독자의 심장을 찌르는 문장을. 데이터를 분석하지 않았는데도 사람의 본질을 꿰뚫는 서사를.
그 문장은 학습으로 나오지 않는다.
반대도 있다.
플랫폼 문법을 완벽하게 따른 글이 있었다. 첫 문장은 반드시 사건으로 시작한다. 짧은 문장, 빠른 전개. 회차 끝에는 다음 화를 암시하는 절벽을 배치한다. 회차당 3,000-4,000자를 지킨다. 대화는 짧게, 지문은 더 짧게. 독자 댓글 분석 결과 선호도가 높은 단어들을 적절히 배치한다.
안전하고, 검증되었으며, 실패하지 않는다. 독자는 울고, 창을 닫고, 다음 회차를 기다린다.
그런데 그 글을 읽고 나서 남는 게 없었다. 다음 날이 되면 어떤 장면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칼날이 없었다.
학습된 글쓰기는 모사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공식, 누군가 증명해놓은 방식. 아무리 정교해도 원본을 넘지 못한다.
진짜 글은 결핍 속에서 세계를 해석해낸 자의 생존 증거다.
나는 일부가 전체라고 전제하지 않는다. 학습된 감각이 모두 심심한 것도 아니고, 타고난 감각이 모두 날카로운 것도 아니다. 자본이 있으면 항상 실패하고 없으면 항상 성공한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이것은 말할 수 있다.
자본이 감각을 만든다는 논리는 안온하다.
그 논리 안에서는 모든 것이 설명된다. 돈이 있으면 성공하고, 돈이 없으면 실패한다. 명료하고 깔끔하다.
그러나 그 안온함 끝에 남는 것은 심심하고 뻔한 결과물뿐이다.
진짜 건축가는 부르주아의 계보가 아니라, 척박한 땅에 칼을 꽂아 넣는 자들의 계보에서 나온다.
진짜 작가도 마찬가지다.
플랫폼 문법의 계보가 아니라, 읽히지 않는 곳에서 유골함의 온도를 쓰는 자들의 계보에서.
차단.
그 한 단어가 화면에 떴을 때 무엇이 부서졌을까.
교수가 구축한 세계. 자본-경험-감각의 선형적 법칙. 그 세계 안에서 학습된 감각은 안전했다. 검증되었고, 예측 가능했고, 실패하지 않았다. 1억 원을 들이면 1억 원만큼의 결과가 나온다. 명료하고 깔끔한 세계.
그런데 한 줄의 댓글이 그 안온함을 무너뜨렸다. "학습으로 쌓은 감각은 예상 가능한 선에서 움직인다." 그 문장 앞에서 1억 원짜리 경험이 심심해졌다. 비싼 재료로 치장한 공간이 본질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차단은 방어였다. 칼이 풍경을 불편하게 만들었으니까.
안도 다다오도 밀려났을 것이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으니,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으니. 권투선수 출신이 도판만 보고 건축을 한다고 했을 때, 누군가는 비웃었을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롱샹도 처음엔 거부당했다. 전통적인 성당의 형식을 따르지 않았으니까. 배처럼 부푸는 지붕, 불규칙한 창들. 학습된 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척박한 땅에 칼을 꽂는 자들은 안온한 세계에서 밀려난다. 당연하다.
그럼에도 칼을 세운다. 도판을 따라 그리며 본질을 사유하고, 롱샹의 빛을 기다리고, 유골함의 온도를 쓴다.
거부당할 것을 알면서.
P.S.
이 글이 오독 없이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나만 더 쓴다.
내가 십수 년이 흐른 지금까지 "건축가는 부르주아의 직업이다"라는 화두를 놓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주길 바란다. 그것은 분노도, 원망도 아니다.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그 말이 만든 균열 속에서, 나는 벽돌의 본질을 더 치열하게 사유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웹소설의 작법을 연구한다. 부정하지 않는다. 플랫폼의 문법이 왜 그렇게 작동하는지 분해한다. 그러나 그 문법을 따르지는 않는다.
칼을 세우는 법을 배우기 위해, 먼저 풍경이 어떻게 안온해지는지를 알아야 했다.
P.S. 2
사실 작법을 연구한다고 했지만, 나에게 웹소설은 유희에 가깝다.
보는 것이 즐겁다. 항상 감탄하면서 유료결제를 하고, 다음 회차를 기다린다. 그게 싫어서 완결판만 구독한 적도 있지만, 다음날을 기다리는 게 더 즐겁다는 것을 알았다.
플랫폼 문법을 비판하면서도, 나는 그 문법이 만든 쾌락을 부정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