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 시대와 계보
기계가 따뜻하게 쓴다.
이것이 처음 실감되었을 때 나는 한동안 멈추었다. 따뜻함은 인간의 것이라고 믿었다. 차가움은 흉내 낼 수 있어도 따뜻함은 경험에서 오는 것이라고. 상실을 겪은 사람만이 상실을 쓸 수 있다고. 그 믿음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것과 무너지는 것은 다르다. 처음에는 흔들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곧 돌아올 것이라고. 기계가 따뜻하게 쓰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흉내이고 나는 그 차이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차이가 흐려졌다. 알아보기 어려워졌다. 내가 느끼는 것이 기계의 흉내를 구별하는 감각인지, 아니면 내가 기계와 다르다고 믿고 싶어서 만들어낸 감각인지 모르게 되었다.
그때 무너진 것이 있었다. 믿음이 아니라 — 확신이다. 나는 인간이 쓴 것과 기계가 쓴 것을 구별할 수 있다는 확신. 그 확신이 사라졌다.
기계는 따뜻하게 쓸 뿐만 아니라 실수도 한다. 전략적으로. 숨이 가쁜 리듬을 만들고, 오타를 배치하고, 감정의 급가속을 연출한다. 인간적인 불완전함을 계산해서 삽입한다. 그 불완전함이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나는 그 앞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쓴다는 것이 무엇인가.
처음에는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기계는 경험하지 않는다. 아이를 잃은 적이 없다. 봉인된 돌 앞에서 귀를 기울인 적이 없다. 지문 사이의 얼룩을 실제로 느낀 적이 없다. 그러니 그것을 쓸 수 없다고.
하지만 이 논리는 곧 무너진다.
나도 아이를 잃은 여자가 아니다. 고대의 석공이 아니다. 나이트클럽 지하실의 그 남자가 아니다. 내가 쓰는 것들은 대부분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들이다. 경험이 없어도 감각으로 닿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썼다.
그렇다면 기계와 내가 다른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서 오래 멈췄다.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 내가 생각하는 답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계와 인간의 차이를 말하는 순간 그것이 인간의 자기 위안이 되는 것 아닌가.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방어가 되는 것 아닌가. 그 의심을 안고 오래 앉아 있었다.
오래 생각한 끝에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기계는 실패해도 다치지 않는다.
기계는 수천 번 실험한다. 어떤 문장이 독자를 움직이는지 데이터로 확인한다. 실패한 문장을 버리고 성공한 문장을 남긴다. 그 과정에서 기계는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실패는 기계에게 정보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실패하면 다친다.
이 문장이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 때, 거짓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때, 타협하고 있다는 것을 알 때. 그것이 물리적으로 느껴진다. 몸이 안다. 이건 아니라고. 그 앎이 고통스럽다. 지우고 다시 쓰는 과정이 소모적이다. 어떤 장면은 쓰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쾌락의 언어 없이 성애를 쓸 때, 위로 없이 죽음을 쓸 때, 판정 없이 폭력을 기록할 때.
그 고통이 문장 안에 있다.
기계의 문장에는 그 고통이 없다. 그것이 보인다. 설명할 수 없지만 보인다. 매끄럽다. 정확하다. 하지만 어딘가 비어 있다. 무언가를 잃으면서 쓴 흔적이 없다.
인간이 쓴 문장에는 잃은 것이 있다.
이것을 처음 알아챈 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문장을 쓰고 나서였다.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 가슴이 열리지 않았다. 조여왔다. 다시 읽었다. 문장은 정확했다. 그런데 무언가 없었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알았다. 이 문장은 잃은 것이 없다. 내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썼다. 그래서 죽어있었다.
그때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문장에는 반드시 잃은 것이 있다는 것이. 잃은 자리가 문장을 살아있게 만든다는 것이.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야 한다.
은유를 지울 때 — 아름다운 문장이 거기 있었다. 그것을 지웠다. 그 아름다움이 거짓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아름다움이 장면의 압력을 희석시켰기 때문이다. 지우는 순간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문장이 거기 있었는데 내가 지운 것이다. 그 사라짐이 남아 있다. 문장 안에.
위로를 쓰지 않을 때 — 독자가 거기서 멈출 것이라는 것을 안다. 불편해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손을 내밀면 독자가 잡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손을 거두는 것. 그것이 잃음이다. 독자의 안심을 잃는 것. 그 잃음이 문장의 빈자리로 남는다.
의미를 회수하지 않을 때 — 결말이 열린 채로 있다. 닫으면 독자가 편안해질 것이라는 것을 안다. 닫지 않으면 독자가 혼자 남겨진다는 것을 안다. 그 혼자 남겨짐이 때로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닫지 않는다. 그 감수가 잃음이다.
이 잃음들이 문장 안에 남아 있다.
독자는 그것을 느낀다. 여기서 무언가 포기된 것이 있다는 것을. 이 문장이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었는데 가지 않았다는 것을. 그 가지 않음이 선택이었다는 것을. 그 선택이 무언가를 잃으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그 흔적이 문장을 살아있게 만든다.
기계는 잃지 않는다. 그러니 그 흔적이 없다. 기계의 문장이 따뜻하고 정확하고 설득력 있어도 — 그 따뜻함 안에 잃은 것이 없다. 그것이 보인다. 느껴진다. 설명할 수 없지만.
하지만 나는 이 논리를 너무 믿지 않으려 한다.
인간이 쓴다는 것이 자동으로 좋은 것이 되지는 않는다. 고통받았다는 것이 자동으로 진실한 문장을 만들지는 않는다. 잃었다는 것이 자동으로 그 흔적을 독자에게 전달하지는 않는다.
인간도 거짓을 쓴다. 인간도 타협한다. 인간도 독자를 계산하고 알고리즘에 맞추고 읽힘을 위해 문장을 바꾼다. 그렇게 쓴 인간의 문장은 기계의 문장보다 나을 것이 없다. 어쩌면 기계의 문장보다 못할 수도 있다.
적어도 기계는 타협하면서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니까.
이 문장을 쓰고 나서 한동안 멈췄다. 불편했다. 기계를 옹호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면 인간을 비하하는 것처럼. 그런데 지우지 않았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타협하면서 그것이 타협인지 모르는 인간보다 — 타협의 개념 자체가 없는 기계가 어떤 의미에서는 더 정직하다. 이 불편함을 지우면 다음 문장이 거짓이 된다.
인간이기 때문에 좋은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다. 잃으면서 쓰기 때문에 좋은 문장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잃음은 의지의 문제다. 선택의 문제다.
기계가 따뜻하게 쓰는 시대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더 잘 쓰는 것이 아니다. 더 정직하게 잃는 것이다.
차단을 확인하는 행위를 다시 생각한다.
석공이 귀를 기울이는 것.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 그 논리적으로 불필요한 동작. 기계는 이것을 쓰지 않는다. 불필요하기 때문에. 정보를 추가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그것을 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미 닫힌 것을 향해 감각을 여는 것. 이미 없는 것을 향해 손을 뻗는 것. 이미 끝난 것을 아직 끝내지 못하는 것.
이 비효율 안에 인간이 있다.
기계는 이 비효율을 최적화로 제거한다. 나는 이 비효율을 보존한다. 그것이 문장을 살아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살아있음이 기계와 내가 다른 지점이기 때문이다.
다른 유일한 지점인지는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기계도 이 비효율을 학습할지도 모른다. 석공이 귀를 기울이는 장면을 수천 개의 텍스트에서 학습하고 그것을 재현할지도 모른다.
재현된 비효율은 비효율인가. 학습된 인간성은 인간성인가.
이 질문 앞에서 오래 멈췄다.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 답이 있는데 그 답이 두렵기 때문이다.
기계가 석공의 장면을 재현한다면. 귀를 기울이는 동작을,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그 두 문장의 배치를 학습하고 재현한다면. 그 재현된 문장이 독자에게 닿는다면. 독자가 거기서 멈춘다면. 독자의 몸에 무언가가 남는다면.
그때 그것이 인간의 문장인가 기계의 문장인가.
독자는 모른다. 독자에게는 문장만 있다. 누가 썼는지는 문장 안에 없다. 독자가 멈추는 것은 문장 때문이다. 그 문장을 누가 썼는지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썼다는 것이 중요한가. 내가 잃으면서 썼다는 것이 중요한가. 독자가 모른다면. 독자의 몸에 남는 것이 같다면.
이 질문이 가장 불편하다. 인간이 쓴다는 것의 의미가 독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게 있는 것이라면 — 그것은 결국 자기 위안인가. 잃으면서 썼다는 것이 독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 그 잃음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나는 이 질문에 지금 답할 수 없다. 다만 이것은 안다. 내가 잃으면서 쓸 때와 잃지 않고 쓸 때 — 문장이 다르다. 그 다름을 내가 느낀다. 독자가 느끼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느낀다.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한지도 모른다. 어쩌면 충분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지금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AI 시대에 인간이 쓴다는 것은 더 잘 쓰는 것이 아니다. 기계보다 더 매끄럽게, 더 정확하게, 더 효율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그 경쟁에서 인간은 질 것이다. 이미 지고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방향이다.
잃으면서 쓰는 것. 고통받으면서 쓰는 것. 실패하면서 다치는 것. 그리고 그 다침의 흔적을 문장 안에 남기는 것. 기계가 최적화로 제거하는 것들을 보존하는 것.
그런데 그것도 기계가 학습하면 어떻게 되는가. 다침의 흔적을 학습하고 재현하면. 잃음의 패턴을 학습하고 삽입하면. 그때도 인간의 문장은 다를 것인가.
모르겠다. 지금은 모른다. 다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쓰는 것은 — 학습된 패턴이 아니라 실제로 잃으면서 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다치면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오래 유효한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유효하다.
그것으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