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하면 노동이 된다

V. 작가로 사는 것

by leehyojoon ARCH

V. 작가로 사는 것

타협하면 노동이 된다


읽혀야 하는가.


이 질문을 처음 던진 것이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 날 문장을 쓰다가 문득 그 질문이 거기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내가 보지 않고 있었던 것처럼.


읽혀야 하는가.


질문 자체는 무해해 보인다. 당연한 것처럼 들린다. 글을 쓰는 사람이 읽힘을 원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하지만 나는 그 질문이 들어오는 순간 무언가 달라진다는 것을 안다. 공기가 바뀌듯이. 문장을 향하던 시선이 독자를 향해 기울기 시작한다.


그 기울기가 시작되는 순간,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기울기는 처음에 미세하다.


이 문장이 너무 어렵지 않을까. 이 장면이 너무 불편하지 않을까. 이 결말이 너무 열려 있지 않을까. 이 정도면 독자가 따라올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친절처럼 들린다. 독자를 배려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친절이 아니다. 두려움이다.


읽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해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외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 두려움이 독자를 배려하는 척하면서 문장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문장을 바꾸기 시작한다.


어려운 것을 쉽게. 불편한 것을 덜 불편하게. 열린 것을 조금 더 닫힌 방향으로. 하나씩. 아주 조금씩.


조금씩 바꾸는 것이 왜 위험한가.


한 번의 큰 타협은 보인다. 내가 이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안다. 기억한다. 그래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작은 타협은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지나간다. 그 지나감이 쌓인다. 어느 날 보면 문장의 근육이 바뀌어 있다. 더 이상 감정을 온도로 번역하지 않고 감정의 이름을 쓰고 있다. 더 이상 의미를 열어두지 않고 닫아주고 있다. 더 이상 차단을 확인하지 않고 차단 이후의 회복을 향해 가고 있다.


타협은 이렇게 작동한다. 소리 없이. 조금씩. 문장의 방향을 바꾸면서.


그리고 어느 순간 글이 노동이 된다.


노동이 나쁜 것이 아니다.


이것을 먼저 말해야 한다. 노동에는 숙련이 있다. 안정이 있다. 기준이 있다. 독자가 원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가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가 아니다.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글이 나보다 먼저 움직이는 그 감각 때문이다. 내가 통제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뒤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상태. 그 상태에서는 피로가 있어도 소진이 없다. 쓰고 나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득 차 있다. 그 충만함이 내가 계속 쓰는 이유다.


타협이 시작되면 이 충만함이 달라진다.


내가 앞서서 설계하기 시작한다. 독자를 계산하고, 반응을 예측하고, 이탈을 막는다. 문장은 점점 더 매끄러워지고, 독자는 점점 더 편안해지고, 나는 점점 더 비어간다. 결과물은 좋아지는데 나는 좋아지지 않는다.


그때 글은 노동이 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는 그 노동을 더 정교하게 요구한다.


알고리즘에 대해 말해야 한다.


지금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은 알고리즘 안에서 쓴다는 것이다. 검색되고, 추천되고, 공유되는 것. 첫 문장이 독자를 잡아야 하고, 중간에 이탈하면 안 되고, 마지막에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 이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글쓰기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이 구조를 이해한다. 그리고 거부한다.


거부한다는 것이 이 구조를 모른 척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구조를 기준으로 삼지 않겠다는 것이다. 알고리즘이 좋아하는 문장을 쓰는 순간, 나는 알고리즘의 게임에 들어간다. 그 게임에서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만든 문장은 알고리즘만큼 살아있다. 즉 살아있지 않다.


읽혀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미 알고리즘의 게임에 들어간 것이다.


나는 그 게임에 참여하지 않겠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흔들린다.


읽히지 않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이다. 내가 쓴 것이 아무도 읽지 않는 서버의 구석에 쌓이는 것. 그것이 두렵다. 쓰는 행위 자체는 충만하지만 그 충만함이 혼자로 끝나는 것이 가끔 무섭다.


그 두려움이 어디서 오는지 오래 들여다봤다. 읽히지 않는 것이 두려운 것인가. 아니면 읽히지 않음으로써 내가 쓴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는 것이 두려운 것인가. 이 둘은 다르다. 전자는 독자에 대한 갈망이다. 후자는 존재에 대한 불안이다.


쓰는 행위가 완결되려면 읽히는 것이 필요한가. 나무가 숲에서 쓰러질 때 아무도 듣지 않으면 소리가 나는가. 이 오래된 질문이 여기서도 온다. 내가 쓴 문장이 아무도 읽지 않으면 그 문장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오래 쓰고 나서 아무 반응이 없을 때. 정확히 썼다고 느끼는데 아무도 없을 때. 그 침묵이 문장을 향한 것인지 나를 향한 것인지 구별이 안 될 때.


그때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가 중요해진다.


많이 읽히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타협이 시작된다. 침묵이 두려울 때 가장 먼저 손이 가는 것이 문장이다. 이 문장이 너무 어렵지 않은가. 이 장면이 너무 불편하지 않은가. 두려움이 문장을 바꾼다. 바꾼 문장은 더 많이 읽힐 수 있다. 그런데 바꾼 순간 이미 다른 문장이다. 내가 쓰려던 것이 아닌 문장이다.


살아있는 문장을 기준으로 삼으면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도 완전히 맞지 않는다. 살아있는 문장을 썼는데도 흔들린다. 기준이 옳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두려움은 기준과 상관없이 온다. 침묵이 길어지면 온다. 그냥 온다.


그러니 더 정직하게 말하면 이렇다. 흔들리면서도 그 기준을 놓지 않겠다는 것이다.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려움이 문장을 바꾸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허락하지 않음이 의지인지 고집인지 모르겠다. 다만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문장이 살아있는가 아닌가다. 그것만 붙잡는다. 흔들리면서.


순장 소설을 쓸 때 아내는 말했다.


업이 무너지는 장면에서 독자가 따라가기 어렵다고. 조금만 더 설명해주면 어떻겠냐고.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어떤 독자는 그 장면에서 길을 잃을 것이었다.


나는 설명을 넣지 않았다.


넣으면 업의 손바닥에 묻은 흙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흙이 사라지면 그 장면에 남는 것은 무너짐의 설명뿐이다. 설명된 무너짐은 독자를 무너지게 하지 않는다. 이해하게 할 뿐이다.


이해는 거리다. 무너짐은 거리가 없다.


나는 독자가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무너지기를 원했다.


그 선택이 옳은지 지금도 모른다. 하지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가 사라졌을 것이다.


타협하면 노동이 된다.


노동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노동이 되는 순간 무언가가 꺼진다. 설계하는 사람이 된다. 계산하는 사람이 된다. 그 사람이 쓴 문장은 정확하고 매끄럽고 읽힌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내가 아니다.


그러니 타협하지 않는다.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다. 흔들리지 않아서가 아니다. 타협하는 순간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감수가 가장 정직한 순간에 글이 가장 잘 움직인다.


읽히려 하지 않을 때 오히려 읽힌다.


그것만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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