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가 족쇄가 되는 순간

V. 작가로 사는 것

by leehyojoon ARCH

V. 작가로 사는 것

도구가 족쇄가 되는 순간


방법론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위험이 시작된다.


이름이 붙기 전에 그것은 그냥 습관이었다.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 것. 의미를 회수하지 않는 것. 판정을 거부하는 것. 이것들은 내가 쓰면서 자연스럽게 찾아낸 방식들이었다. 찾아낸 것이 아니라 발견했다는 표현이 더 맞다. 어떤 문장이 살아있고 어떤 문장이 죽어 있는지를 반복해서 보면서, 살아있는 문장들이 공유하는 것을 나중에 알아챈 것이다.


그런데 이름을 붙이자 달라졌다.


상태적 리얼리즘. 이 이름이 생긴 순간부터 나는 그것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따뜻한 문장을 쓰고 싶을 때 망설였다. 이것이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설명이 더 정확한 자리에서도 지웠다. 감동을 건네고 싶은 순간에 거리를 두었다. 이것이 타협이 아닌가.


방법이 목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전환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된 것이 아니었다. 조금씩 됐다. 한 문장을 원칙으로 지울 때마다. 한 장면을 감각이 아니라 판단으로 고칠 때마다. 그 작은 선택들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원칙이 감각보다 먼저 오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순간을 알아채지 못했다. 알아챘을 때는 이미 문장이 굳어 있었다.


목적이 된 방법은 감각을 잃는다.


처음에 감정을 설명하지 않았던 것은 설명이 거짓이었기 때문이다. 슬프다는 단어가 그 무게를 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각에서 온 선택이었다. 이 문장이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몸이 먼저 알았다.


하지만 원칙이 된 이후에는 감각보다 원칙이 먼저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 문장은 감정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지워야 한다. 이 장면은 의미를 회수하고 있으므로 고쳐야 한다. 몸이 아니라 머리가 판단했다.


그때 문장이 굳기 시작했다.


굳은 문장은 정확하다.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살아있지 않다. 규칙을 지키는 문장과 살아있는 문장은 다르다. 그 차이가 미세하지만 독자는 느낀다. 설명할 수 없지만 느낀다. 이 문장이 어딘가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감각이 원칙을 만들었는데 원칙이 감각을 죽인 것이다. 이 역전이 얼마나 조용하게 일어나는지 —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다.


체호프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


그는 자신의 방식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선언하지 않았다. 이것이 나의 방법론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썼다. 어떤 장면에서는 설명했고, 어떤 장면에서는 침묵했다. 판단은 매번 달랐다. 그 달라짐이 그의 텍스트를 살아있게 만들었다.


나는 그에게서 방법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에게서 배워야 했던 것은 태도였다. 방법이 아니라 유연성. 규칙이 아니라 감각.


그런데 이 말도 선언이 되는 순간 위험하다. 유연성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 감각을 따라야 한다는 규칙. 그것도 족쇄가 될 수 있다. 족쇄를 피하려는 태도 자체가 족쇄가 되는 것.


이 역설 앞에서 멈췄다. 체호프는 이 역설을 어떻게 피했는가. 아니 피했는가. 어쩌면 피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냥 썼을 뿐이다. 역설을 의식하지 않고. 아니면 의식하면서도 그냥 썼거나.


그 '그냥'이 내가 가장 가지기 어려운 것이다.


이름을 붙인 순간 '그냥'은 사라졌다. 이름이 있으면 의식한다. 의식하면 그냥 쓸 수 없다. 그러니 체호프에게서 배워야 했던 것은 결국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름 없이 이것을 사유할 수 있었는가. 이렇게 쓸 수 있었는가. 이름이 사유를 가능하게 하면서 동시에 '그냥'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모순을 해소할 수 없다.


체호프는 족쇄를 차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찼다. 그리고 그 족쇄 덕분에 이것을 쓰고 있다.


족쇄를 알아챈 것은 한 장면을 쓰다가였다.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장면이었다. 따뜻한 장면이었다. 그 따뜻함이 나중에 오는 상실을 더 날카롭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장면이었다. 처음 썼을 때 그 장면은 살아있었다. 엄마의 손이 아이의 등을 두드리는 속도. 아이가 엄마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 각도. 몸이 먼저 썼다.


그런데 다시 읽으면서 망설였다. 너무 감상적이지 않은가. 너무 직접적이지 않은가. 원칙이 개입했다. 한 문장 지웠다. 다시 읽었다. 또 망설였다. 또 지웠다.


지우고 다시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그 과정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처음 썼을 때 거기 있던 것. 몸이 먼저 알고 쓴 것. 그것이 원칙의 손에 한 번씩 지워질 때마다 조금씩 사라졌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측정값이었다. 아이의 체온 36도. 엄마의 팔이 아이의 등을 감싸는 압력. 원칙에는 충실했다. 정확했다. 그런데 처음에 거기 있던 것은 없었다.


그 장면이 나중에 상실을 더 날카롭게 만들지 못했다. 대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뜻함이 없으면 그것의 소멸도 없다. 방법이 목적을 잃게 만든 것이었다.


그 장면을 지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치면 된다. 따뜻함을 다시 넣으면 된다. 그런데 고치지 않았다. 왜인가. 그 차가운 장면이 내가 족쇄를 찼다는 증거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우면 증거가 사라진다. 증거가 사라지면 이 질문도 사라진다. 그러니 그냥 두었다. 실패한 채로.


실패를 두는 것이 때로는 고치는 것보다 정직하다.


도구는 무엇을 자르기 위해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오래 멈췄다. 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문장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거짓 없는 기록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고통을 그 무게 그대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면서도 찬다. 이것이 더 깊은 문제다. 모르면 배우면 된다. 하지만 알면서도 하는 것 — 그것은 앎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무언가의 문제다.


습관인가. 두려움인가. 이름을 붙이고 나서 그 이름에 기대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인가. 이름이 있으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인가. 이름을 잃으면 자신이 사라지는 것 같기 때문인가.


어쩌면 족쇄는 편리한 것인지도 모른다. 매번 감각으로 판단하는 것은 피로하다. 원칙이 있으면 그것을 따르면 된다. 원칙을 따르는 것이 감각보다 쉽다. 그 편리함이 족쇄를 찬다. 알면서도.


이것이 방법론의 가장 잔인한 측면이다. 이해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에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이 실패한 장면으로 남는다. 아이의 체온 36도처럼.


이름을 붙인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말도 수습처럼 들린다. 사실은 후회할 때가 있다. 이름을 붙이기 전에 더 자유롭게 썼던 문장들이 있었다. 원칙을 몰랐을 때 원칙에 가장 충실했던 문장들이. 알고 난 뒤에 오히려 어색해진 것들이. 그것들이 생각날 때 후회한다.


그런데 돌아갈 수 없다. 이름을 붙이기 전으로. 알기 전으로. 한 번 알아버린 것은 모르는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것이 이름을 붙인 것의 대가다. 자유를 잃는 것. '그냥' 쓰는 것을 잃는 것.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것인지 모르겠다. 후회해도 돌아갈 수 없으니까. 후회가 의미 없으니까. 그것이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의 실제 내용인지도 모른다.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후회를 내려놓은 것.


체념을 후회하지 않음이라고 부르는 것.


나는 상태적 리얼리즘을 쓰는 작가가 아니다. 살아있는 문장을 쓰려는 작가다. 상태적 리얼리즘은 그것을 위해 찾아낸 방식이다. 지금은 이 방식이 가장 정직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언젠가 다른 방식이 더 정직하게 느껴지는 날이 오면 그쪽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쓰면서도 이미 이름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살아있는 문장을 쓰려는 작가라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순간 — 그것도 이름이다. 다른 종류의 이름. 방법론의 이름을 벗으면서 정체성의 이름을 다는 것. 족쇄의 모양이 바뀔 뿐이다.


그 바뀜이 진전인지 순환인지 모르겠다.


도구를 바꾸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족쇄를 차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망치를 내려놓아도 손의 굳은살은 사라지지 않는다.


상태적 리얼리즘을 의식하지 않는 순간에도 그 시선은 이미 내 안에 있다. 사람을 볼 때 조건을 본다. 행동을 볼 때 압력을 본다. 결말을 볼 때 잔여를 본다. 이것은 이제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라 인식의 방식이 되었다.


습관이 된 도구는 의식하지 않아도 작동한다.


그러니 이름을 내려놓아도 된다. 원칙을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쓰면 된다. 문장이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몸이 먼저 안다. 그 감각을 믿으면 된다.


그런데 그 감각도 믿을 수 있는가. 굳은살이 생긴 손이 느끼는 것이 진짜 감각인가. 아니면 족쇄에 길들여진 감각인가. 자유로운 감각과 훈련된 감각은 어떻게 구별하는가. 구별할 수 있는가.


모르겠다. 다만 쓴다. 굳은살이 생긴 손으로. 그것이 족쇄인지 도구인지 모른 채로. 문장이 살아있으면 됐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도 족쇄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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