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는 어디에 서 있는가

IV. 독자와 잔여

by leehyojoon ARCH


IV. 독자와 잔여

독자는 어디에 서 있는가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어딘가에 선다는 것이다.


방청객으로 서기도 하고, 공범으로 서기도 하고, 거울 앞에 서기도 한다. 독자는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항상 의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텍스트는 독자를 어딘가에 세운다. 작가가 설계한 자리에. 때로는 독자가 원하지 않는 자리에.


나는 독자를 어디에 세우는가.


이 질문을 오래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쓰는 방식의 많은 것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판정하는 서사에서 독자는 방청객이다.


법정이 있고, 피고가 있고, 검사가 있고, 판사가 있다. 독자는 방청석에 앉아서 판결을 기다린다. 안전하다. 거리가 있다. 저 사람이 나쁜지 좋은지 판단하면 된다. 그 판단이 끝나면 법정을 나선다.


방청객은 소비한다. 텍스트를 읽고 판결을 수령하고 나온다. 그것으로 끝이다. 자신에 대한 질문은 없다.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물음은 없다.


판결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따짐도 여전히 방청석 안에서 일어난다. 법정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자신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방청석을 만들지 않는다.


위로하는 서사에서 독자는 환자다.


작가는 의사처럼 진단하고 처방한다. 이 고통은 이런 것이고,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 독자는 처방을 받고 안심한다. 이 감정이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받는다. 치료되었다는 느낌을 받고 나온다.


환자는 수동적이다. 처방을 기다리고, 처방을 받고, 나아진다. 자신 안에서 무언가를 꺼낼 필요가 없다. 작가가 이미 꺼내놓았기 때문이다.


그 꺼내놓음이 친절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친절이 독자를 약하게 만든다. 스스로 꺼내는 것을 배우지 못하게 만든다. 처방 없이는 자신의 고통을 읽지 못하게 만든다.


나는 처방전을 쓰지 않는다.


내가 독자를 세우고 싶은 자리는 다르다.


그것을 한 단어로 말하기 어렵다. 방청객도 아니고 환자도 아닌 자리. 텍스트 안으로 들어온 독자가 갑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자리. 이것이 내 이야기인가 하고 멈추는 자리.


관음자라고 불렀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말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관음자는 바깥에서 본다. 내가 원하는 것은 독자가 바깥에서 보다가 어느 순간 안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발견이 있어야 텍스트가 독자에게 가 닿는다.


그 발견은 강요할 수 없다. 설계할 수도 없다. 다만 빈자리를 만들 수 있다. 작가가 채우지 않은 자리. 판정하지 않은 자리. 위로하지 않은 자리. 의미를 회수하지 않은 자리.


그 빈자리 앞에서 독자가 멈출 때 — 무언가를 채우려 할 때 — 독자는 자신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 온도를 나도 안다. 이 마찰을 나도 느꼈다. 이 무게를 나도 손바닥에 올려본 적이 있다.


그 기억이 올라오는 순간 독자는 텍스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다. 텍스트는 그 순간을 위한 입구였다.


그런데 빈자리를 만드는 것 자체가 설계 아닌가.


이 질문과 씨름했다. 빈자리를 만드는 것, 독자가 그 자리에서 멈추게 하는 것, 독자가 자신 안을 들여다보게 유도하는 것. 그것이 더 정교한 조종이 아닌가. 판정하는 서사보다, 위로하는 서사보다 더 깊이 독자를 끌어들이는 방식 아닌가.


모든 텍스트는 설계다.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지, 무엇을 넣고 무엇을 빼는지, 어떤 순서로 배치하는지. 이 모든 것이 선택이고 선택은 설계다.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내가 거부하는 것은 독자의 반응을 예측하고 그 반응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설계하는 것이다. 독자가 울기를 원해서 배치하는 것. 독자가 분노하기를 원해서 쌓아가는 것. 독자의 반응이 목적이 되는 순간 문장은 수단이 된다. 수단이 된 문장은 죽는다.


내가 하는 것은 다르다. 문장이 살아있는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선택한다. 그 선택이 어떤 빈자리를 만드는지는 결과적으로 알게 된다.


독자가 어디서 멈추는지는 내가 통제할 수 없다. 다만 살아있는 문장이 살아있는 독자를 만나면 그 만남이 발생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 믿음이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것 외에 기댈 것이 없다.


조문객들을 생각한다.


장례식날 아이를 잃은 여자를 혼자 두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 화장실 문밖에서도 발소리를 냈던 사람들. 그 발소리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우리가 여기 있다고.


그 발소리가 선의였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그 발소리가 여자에게 무엇을 했는지도 안다. 혼자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자신의 슬픔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슬픔도 완성되어야 한다. 완성되려면 혼자 있어야 할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선의가 빼앗았다.


선의는 그런 의미에서 폭력이 될 수 있다. 의도하지 않은 폭력.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빼앗는 방식의 폭력. 그 폭력은 가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한다. 선의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여자는 알았을 것이다. 혼자이고 싶다는 것을. 그 혼자 있음이 슬픔을 완성시키는 데 필요하다는 것을. 하지만 그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의 앞에서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선의를 거부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텍스트도 같은 방식으로 폭력이 될 수 있다. 위로가 선의처럼 보이면서 독자가 필요로 하는 진공을 빼앗는다. 판정이 친절처럼 보이면서 독자가 스스로 판단하는 것을 막는다.


그래서 나는 선의를 주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이 말이 이상하다. 선의를 주지 않으려는 것 자체가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진공을 주려는 것. 독자가 스스로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만들려는 것. 그것도 독자를 위한 것이다.


선의를 거부하는 선의. 이 모순 안에 내가 있다.


그렇다면 불편함을 의도하는 것도 처방 아닌가. 더 정교한 처방. 불편함이라는 이름의 처방. 나는 처방전을 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 위로 대신 불편함을 주는 것이 다른 종류의 처방이 아닌가. 이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다만 이것을 안다. 위로를 주는 것은 독자의 반응을 예측하고 그 방향으로 설계하는 것이다. 불편함을 의도하는 것은 — 독자의 반응을 비워두는 것이다. 불편해할 수도 있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분노할 수도 있고 그냥 덮을 수도 있다.


그 결과를 통제하지 않는다. 예측하지 않는다. 그 차이가 작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작은 차이가 전부다. 그것 외에 내가 방청석과 처방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


독자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이 질문은 독자에 대한 질문이지만 동시에 나에 대한 질문이다.


나는 아이를 잃은 여자의 이야기를 쓸 때 어디에 서 있었는가. 그 고통 옆에서 기록하는 자리였는가. 아니면 그 고통을 소재로 삼는 자리였는가. 그 경계는 언제 무너지는가.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쓰는 동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손이 떨렸다. 쓰면서 내 손바닥에도 무게가 있었다. 그것이 기록하는 자리에 있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쓰고 난 뒤에 남는 것이 있었다. 텍스트가 남았다. 텍스트는 내 것이 되었다. 그 여자의 고통에서 출발한 것이 내 텍스트가 된 순간 — 그것이 소재가 된 것이 아닌가. 기록이 소재로 전환되는 순간이 있는가. 그 순간을 나는 알아채지 못한 것인가.


텍스트가 완성된 뒤에 그 텍스트를 읽는 독자가 생긴다. 독자는 그 여자의 고통을 읽는다. 그 고통이 텍스트 안에서 언어가 되고 구조가 되고 배치가 된다.


언어가 된 고통은 원래의 고통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언어가 되는 순간 고통은 이미 변형된다. 변형된 것을 내 것으로 삼는 것 — 그것이 소재화가 아닌가. 그렇다면 기록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인가. 언어로 옮기는 순간 이미 소재가 되는 것인가. 기록하려는 의지가 있어도 언어 자체가 그것을 배반하는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오래 멈췄다. 언어가 고통을 변형시킨다면 — 언어로 쓰는 모든 것은 이미 원래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기록이란 무엇인가. 원래의 것을 보존하려는 시도인가. 아니면 원래의 것을 변형시키면서 그것을 보존했다고 믿는 행위인가.


그 믿음이 자기기만인가. 자기기만이라 해도 그것 외에 방법이 없다면 — 기록은 자기기만을 감수하는 행위인가. 손이 떨리면서도 쓰는 것이 그 감수인가.


모르겠다. 다만 이것을 안다. 손이 떨렸다는 것. 그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증거인지는 모르겠다. 바란다는 것이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그것 외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독자가 텍스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처럼, 나도 쓰면서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어떤 것을 지울 때 무엇을 잃는가. 내가 어떤 것을 남길 때 무엇을 지키는가. 그 선택들이 쌓여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보여준다.


선택이 자리를 만든다. 그 자리가 나다.


그런데 그 자리가 고정된 것인가. 한 편을 쓰는 동안에도 자리는 움직이는 것인가. 기록하는 자리에서 시작했다가 소재로 삼는 자리로 미끄러지는 것인가.


그 미끄러짐을 알아채는 것이 가능한가. 알아챈다 해도 되돌아올 수 있는가. 아니면 미끄러짐은 이미 일어난 뒤에야 보이는 것인가.


모르겠다. 다만 이 질문을 놓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래서 독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은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어디에 서 있었는가.


방청객으로 서 있었는가. 환자로 서 있었는가. 아니면 어느 순간 자신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는가. 멈추었는가. 설명할 수 없는데 무언가 남았는가.


나는 그 발견을 강요할 수 없다. 텍스트는 입구를 열 뿐이다. 들어오는 것은 독자가 결정한다.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 입구 앞에서 돌아서도 된다.


다만 당신의 손바닥에 무언가 닿았다면. 온도인지 무게인지 모르지만 있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나도 내가 쓴 것이 무엇을 남겼는지 모른다. 내가 어디에 서서 썼는지도 모른다. 기록이었는지 소재였는지도 모른다.


다만 썼다. 손이 떨리면서.


그 떨림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기록하는 자리에 있었다는 증거이기를 바랐다. 바람이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은 계속 떨렸다. 그것만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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