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독자와 잔여
돌은 완벽했다.
틈이 없었다. 정으로 다듬고 망치로 박아 넣은 돌. 삼 년을 준비한 기술이 집약된 봉인.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석공은 알았다. 아이가 있었다. 노래를 부르던 아이가. 하지만 돌이 자리를 잡은 순간 소리는 사라졌다.
석공은 잠시 귀를 기울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 동작이 왜 일어나는가.
봉인은 완료되었다. 차단은 완전하다.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석공은 안다. 그런데 기울인다. 논리적으로 불필요한 그 동작. 정보를 추가하지 않는다. 상황을 바꾸지 않는다. 그런데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못하는 것과 멈추지 않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무력이다. 후자는 — 의지인지 무력인지 아직 모른다는 것이다. 석공의 동작은 너무 조용해서 판정할 수 없다. 절규하지 않는다. 무너지지 않는다. 그냥 기울인다. 폭력적인 슬픔은 읽을 수 있다. 조용한 확인은 읽을 수 없다. 읽을 수 없는 것이 더 오래 남는다.
차단과 차단을 확인하는 행위는 다르다.
차단은 세계가 인간에게 가하는 것이다. 냉정하고 완전하고 되돌릴 수 없다. 외부에서 온다. 그래서 저항할 수 있다. 분노를 날릴 방향이 있다. 세계를 향해 날릴 수 있다. 원망할 대상이 있다. 그 원망이 인간을 버티게 한다. 외부의 차단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방향을 준다. 저항의 방향을. 분노의 방향을.
하지만 차단을 확인하는 행위는 인간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것이다. 이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귀를 여는 것. 그 확인이 차단을 한 번 더 완성시킨다.
세계가 한 번 닫고, 인간이 확인함으로써 다시 한번 닫힌다. 세계가 가한 차단 위에 인간이 스스로 차단을 한 겹 더 쌓는 것이다.
두 번째 닫힘이 더 깊다. 외부의 차단에는 원인이 있다. 누군가가 했거나 무언가가 일어났거나. 그러나 내부의 확인에는 원인이 없다. 저항할 방향도 없다. 분노를 날릴 대상도 없다. 그냥 하는 것이다. 그냥 기울이는 것이다. 그 '그냥'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설명되지 않는 것이 인간을 가장 깊이 베는 것들 중 하나다. 이유를 알면 버틸 수 있다. 이유를 모르면 버티는 방법도 모른다.
상궁 설이 있다.
봉인이 끝나고 보름이 지났다. 그녀는 창문을 열었다. 지하에서 노래가 올라올 리 없다는 것을 안다. 삼 년 전부터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창문을 열었다. 귀를 기울였다. 바람 소리가 있었다. 나뭇잎 소리가 있었다. 노래는 없었다.
설은 창문을 닫았다.
열고, 기울이고, 없음을 확인하고, 닫는다. 닫기 위해 먼저 열었다는 것. 닫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처음부터 열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열었다. 왜 열어야만 닫을 수 있는가. 세계가 이미 닫아놓은 것을 — 왜 다시 자신의 손으로 닫아야 하는가.
세계가 닫은 것과 내가 닫는 것은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세계가 닫은 것은 내 의지 밖이다. 내 손으로 닫는 것은 — 내 손으로 하는 것이다. 내 손으로 닫으면 내가 닫은 것이 된다. 그것이 무엇을 바꾸는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노래는 여전히 없다. 아이는 여전히 없다. 그런데 무언가가 다르다. 세계에 의해 닫힌 것과 내 손으로 닫은 것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 다만 설이 창문을 닫는 그 동작 안에 그것이 있다는 것은 안다.
독자는 거기서 멈춘다. 닫는 행위 앞에서. 그 멈춤이 판정보다 오래 남는다.
왜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오래 멈췄다. 확인하는 행위가 고통을 두 배로 만든다는 것을 안다. 없다는 것을 이미 아는데 다시 확인한다. 그 확인이 없음을 한 번 더 새긴다. 상처 위에 다시 칼을 긋는 것처럼. 그런데 멈추지 않는다. 왜인가.
확인이 통과 의례인가. 한 번 기울이고, 없음을 확인하고, 그제야 다음으로 갈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애도의 문법이다. 상실을 완성하기 위해 확인하는 것이다. 없다는 것을 내 감각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 머리가 아니라 몸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석공이 귀를 기울이는 것은 떠나보내기 위한 마지막 동작이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귀로 확인해야만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설은 보름이 지나서도 창문을 열었다. 통과했는가. 모른다. 닫은 이후를 쓰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석공도 아마 다음날 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그다음 날도. 통과가 목적이라면 한 번이면 족해야 한다. 그런데 반복된다. 통과하지 못해서 반복되는 것인가. 아니면 통과하지 않으려고 반복하는 것인가.
다음으로 가지 않기 위해 계속 확인하는 것. 이 가능성 앞에서 오래 멈췄다. 확인이 애도가 아니라 애도의 거부라면 — 인간은 상실을 완성하지 않으려고 상실을 반복하는 것인가. 끝내지 않으려고 계속 돌아가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확인은 잔인한 것이 아니라 필사적인 것이다. 없는 것을 향해 감각을 여는 것이 —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있었음을 붙드는 것이라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들렸던 것을 기억하기 위해 귀를 여는 것이라면.
모르겠다. 둘 다인지도 모른다. 애도이면서 동시에 애도의 거부. 통과이면서 동시에 통과하지 않으려는 버팀. 이 둘이 같은 동작 안에 있다. 해소하려 하면 동작이 사라진다. 석공도 설도 사라진다. 그러니 해소하지 않는다. 이 모순을 들고 계속 걷는다. 답이 나오면 그 동작은 끝난다. 답이 나오지 않는 한 석공은 내일도 귀를 기울일 것이다.
유골함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 여자가 있다.
현관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열쇠를 손에 쥔 채로. 문을 열면 아이가 없는 집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열쇠를 쥔 채로 서 있다. 열쇠가 손바닥에 닿는 금속의 온도. 현관 앞의 공기가 복도보다 조금 더 차갑다.
앞으로 가면 확인이 된다. 뒤로 갈 수 없다. 유골함을 안고 있으니까. 그러니 서 있다. 그 서 있음이 전진도 후퇴도 아닌 유일한 자리다.
그런데 그 서 있음도 이미 확인이다. 문을 열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다. 열쇠를 쥔 손이 안다. 공기의 온도가 안다. 문을 열기 전에 이미 확인은 시작되었다. 어쩌면 유골함을 받아 드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이가 처음 아프기 시작한 날부터. 확인은 한 번의 동작이 아니다. 긴 과정이다. 현관 앞에서의 정지는 그 과정의 한 순간일 뿐이다.
그렇다면 확인은 언제 끝나는가. 문을 여는 순간인가. 아이의 방에 들어가는 순간인가. 아이의 물건을 치우는 순간인가. 아니면 끝나지 않는 것인가. 매번 다시 시작되는 것인가. 그것이 가장 잔혹한 것인지도 모른다. 끝나야 하는데 끝나지 않는다. 한 번으로 완성되어야 하는데 완성되지 않는다. 석공도 아마 다음날 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그다음 날도. 확인은 완성되지 않은 채로 반복된다.
차단을 확인하는 행위는 그 직전의 정지 안에도 이미 와 있다.
이 모든 동작은 비효율이다.
정보를 추가하지 않는다. 상황을 바꾸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불필요하다. 그런데 인간은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약함인가. 약함이라 하기엔 그 동작이 너무 조용하고 너무 집요하다. 약함은 보통 소란스럽다. 무너지거나 흔들리거나. 그런데 석공은 조용히 기울인다. 설은 조용히 닫는다. 열쇠를 쥔 여자는 조용히 서 있다. 그 조용함 안에 약함이라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강함도 아니다. 강함이라 하면 선택처럼 들린다. 의연하게 확인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다. 그냥 하는 것이다.
그냥. 이 말을 오래 들여다봤다. 그냥이라는 것은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강해서도 약해서도 슬퍼서도 아니라 — 그냥. 그냥이라는 말이 가장 정직한 말인데 가장 설명이 안 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냥이라는 자리가 있다. 의지도 무력도 닿지 않는 자리. 논리가 멈추는 자리. 그 자리에서 석공은 귀를 기울인다. 설은 창문을 연다. 여자는 열쇠를 쥔 채로 서 있다.
그 자리가 인간이 가장 인간인 자리인지도 모른다.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설명이 닿지 않는 자리에 인간이 있다. 설명이 끝난 자리에서 인간은 그냥 한다. 그냥 기울이고. 그냥 열고. 그냥 서 있는다. 그 '그냥'들이 설명되지 않는 채로 독자에게 간다. 독자의 몸에. 읽고 난 뒤에도. 책을 덮은 뒤에도. 왜 남는지 모른 채로.
서정은 귀를 기울이는 동작에 있다. 칼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이 둘이 항상 같은 문장 안에 있지는 않는다. 귀를 기울이는 동작만 있으면 감상이 된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만 있으면 보고서가 된다. 둘이 동시에 있는 문장을 쓰는 것이 매번 되지 않는다. 안 될 때가 더 많다. 됐을 때 어떻게 아는가. 가슴이 열린다. 그것 외에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문장을 쓰고 나서도 오래 들여다봤다. 감상인지 칼인지. 서정으로 흐른 것인지 압력으로 선 것인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지금도 완전히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그 문장 앞에서 가슴이 열렸다. 그리고 석공이 거기 있었다. 돌이 아니라 석공이.
석공은 잠시 귀를 기울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 두 문장 앞에서 나는 아직도 멈춘다. 핵심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 문장을 쓸 때 가슴이 열렸다. 그것만 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설명하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설명하면서도 설명하지 않는. 소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을 쓰려다가 어느 순간 작법에 대한 해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두려움이 있었다. 지금도 있다.
소설에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상태만 기록한다. 그런데 에세이는 다른 자리에 있다고 생각했다. 설명이 있어야 독자가 따라온다. 깊게 읽지 않는 시대에. 설명이 없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
그런데 설명이 전부를 수거해 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설명은 독자를 데려오는 것이고 — 데려온 다음에는 혼자 세워야 한다. 설명이 끝난 자리에서 독자가 혼자 남겨져야 한다. 그 자리에서 잔여가 생긴다.
내가 그 자리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너무 멀리까지 데려오려 한 것은 아닌지. 이 모순을 숨기지 않는 것이 이 글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