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는다는 것

V. 작가로 사는 것

by leehyojoon ARCH

V. 작가로 사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오래 생각했다.


작가로서의 생존이 아니다. 텍스트로서의 생존. 내가 쓴 것이 나보다 오래 남는다는 것. 그 남음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처음에는 많이 읽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닿으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하지만 그것이 생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이 읽힌 것들이 얼마나 빨리 잊히는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것들이 그 시대와 함께 사라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생존은 숫자가 아니다. 깊이다.


문학이 살아남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록으로 남는 것. 그리고 압력으로 남는 것.


기록으로 남는 것은 역사의 자료가 되는 것이다. 이 시대에 이런 것이 있었다는 증거로. 그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박물관의 생존이다. 유리 안에 보존된 것. 보여지지만 만져지지 않는 것.


압력으로 남는 것은 다르다. 다른 시대의 독자가 읽어도 그 압력이 살아있는 것. 결말을 알아도 다시 읽게 되는 것. 시대가 바뀌어도 그 문장 앞에서 독자가 멈추는 것.


나는 압력으로 남고 싶다.


그런데 이 욕망이 어디서 오는지 들여다봤다. 압력으로 남고 싶다는 것이 — 결국 사라지지 않고 싶다는 것 아닌가. 죽은 뒤에도 어딘가에 있고 싶다는 것. 그것이 허영인가. 두려움인가.


허영이라고 하면 너무 단순하다. 허영은 지금 보여지고 싶은 것이다. 압력으로 남고 싶다는 것은 지금이 아니라 나중이다. 내가 없어진 뒤에도 무언가가 남아있기를 원하는 것. 그것은 허영보다 더 근원적인 것에서 온다.


두려움인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더 가깝다. 그런데 두려움이라고 하면 그것을 극복해야 할 것처럼 들린다. 두려움 없이 쓸 수 있어야 할 것처럼.


그렇지 않다. 두려움이 있어도 된다. 사라지는 것이 두렵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쓰는 것. 그 두려움이 타협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된다. 압력으로 남고 싶다는 욕망이 살아있는 문장을 쓰게 만들면 — 그 욕망은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욕망이 언제 독이 되는지 안다. 압력으로 남으려고 설계할 때. 기억될 만한 것을 의도할 때. 그때 욕망이 텍스트를 굳힌다.


그런데 욕망을 없앨 수 있는가. 없앨 수 없다. 사라지지 않고 싶다는 것이 글을 쓰게 만드는 것 중 하나인데 — 그것을 지우면 쓰는 이유도 함께 지워진다. 욕망이 있으면서도 욕망이 앞에 오지 않는 상태. 그 상태가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다만 그것을 향해 가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체호프의 단편을 처음 읽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처음 읽은 뒤 무언가가 남았다는 것은 기억한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다 읽었는데 끝난 것 같지 않은 느낌. 이야기가 거기서 멈추었는데 내 안에서는 계속되는 느낌. 그리고 일상의 어떤 순간에 갑자기 그 장면이 돌아오는 것.


그것이 압력이다.


체호프는 많이 설명하지 않았다. 판정하지 않았다. 결말을 닫지 않았다. 그것들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텍스트 안에 빈자리가 남았다. 그 빈자리로 독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각자의 것으로 채웠다. 다른 시대의 독자가 읽어도 그 빈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래서 그 시대의 독자도 들어올 수 있었다.


빈자리가 시간을 넘는다. 채워진 것은 그 시대와 함께 낡는다.


여기서 잠깐 멈춘다.


이 문장이 맞다고 느낀다. 그런데 맞다고 느끼는 것이 불편하다. 빈자리를 만드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면 — 빈자리를 설계하려는 욕망이 온다. 그 욕망이 오는 순간 빈자리는 사라진다. 설계된 빈자리는 빈자리가 아니다. 이 모순 안에서 쓴다.


살아남는 텍스트의 조건을 억지로 만들 수 없다.


이것을 먼저 말해야 한다. 살아남으려고 쓰면 살아남지 못한다. 생존을 목적으로 삼는 순간 텍스트는 그 목적을 향해 기울어진다. 독자를 계산하고, 시대를 의식하고, 기억될 만한 것을 설계하려 한다. 그 설계가 텍스트를 굳힌다. 굳은 텍스트는 압력이 없다.


살아남는 텍스트는 살아남으려 하지 않은 것들 중에서 나온다.


다만 살아있는 문장을 썼을 때. 타협하지 않았을 때. 글이 나보다 먼저 움직이는 그 상태에서 뒤따라갔을 때. 그때 나온 것들이 때로 살아남는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내가 예상하지 못한 독자에게.

그것이 생존의 방식이다. 통제할 수 없는.


살아남는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없다. 하지만 살아있는 문장을 쓰는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 처음에는 이 분리가 위안처럼 느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면 된다는 것. 결과는 통제할 수 없으니 과정에 충실하면 된다는 것.


그런데 이 위안이 얼마나 오래 가는가.


살아있는 문장을 썼는데도 아무도 읽지 않을 때. 정확하게 썼다고 느끼는데 침묵만 있을 때. 그 침묵이 길어질 때 — 분리가 흔들린다. 살아있는 문장을 쓰는 것과 살아남는 것이 분리되어 있다는 말이 — 그냥 포기를 정당화하는 말처럼 들릴 때가 있다. 살아남지 못할 것을 알면서 살아있는 문장을 쓰는 것이 — 용기인지 자기기만인지 모를 때가 있다.


그 모름 앞에서 오래 멈췄다.


살아있는 문장이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다. 이것이 사실이다. 살아있지 않은 문장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문장이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 이것도 사실이다. 세 가지가 동시에 사실이다. 이 세 가지를 동시에 붙들고 있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을 때가 있다. 하나를 놓게 된다. 살아남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놓거나. 살아있는 문장을 써야 한다는 기준을 놓거나. 아니면 살아있는 문장이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거나.


나는 세 번째를 자주 한다. 외면하는 것. 그것이 솔직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세 가지를 동시에 붙들고 있으면 쓸 수 없다. 그러니 외면하면서 쓴다. 살아있는 문장이 언젠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 믿음이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내가 쓴 것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서버가 지워지고, 책이 절판되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두려운가.


솔직히 말하면 두렵다.


하지만 두려움의 방향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읽히지 않는 것이 두려웠다. 지금은 살아있지 않은 것을 쓰는 것이 두렵다. 읽혀도 살아있지 않은 것들. 많이 저장되어도 기억되지 않는 것들. 그것들이 더 두렵다.


살아있는 문장 하나가 아무도 읽지 않는 서버 구석에 있는 것이, 살아있지 않은 문장 천 개가 많이 읽히는 것보다 낫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것이다. 선택이라기보다 믿음이다.


어떤 글의 마지막을 다시 생각한다.


아이를 잃은 여자에 대해 쓴 글. 그 글을 쓴 것은 그 여자의 슬픔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여자가 겪은 것을 내가 이해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를 잃은 엄마의 그 무게를 나는 온전히 알지 못한다.


다만 기록하고 싶었다.


그 기록이 살아남을지 모른다. 누가 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쓰는 순간 나는 살아있었다. 손이 떨렸고, 온도가 있었고, 무게가 있었다. 그 살아있음이 문장 안에 남아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충분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더 많은 사람이 읽기를 원한다. 오래 남기를 원한다. 그 삶이 기억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문장이 살아있는가 아닌가다.


이 연작을 쓰면서 나는 내가 왜 쓰는지 다시 물었다.


답은 처음과 같았다. 글이 나보다 먼저 움직이는 그 감각. 통제하지 않아도 되는 그 불안. 뒤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그 상태.


처음에 이 답이 돌아왔을 때 — 안도했는가. 솔직히 말하면 반반이었다. 안도하면서 동시에 실망했다. 안도한 것은 — 이 연작을 쓰는 동안 흔들렸는데 결국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 족쇄를 발견하고 타협의 유혹을 느끼고 살아남는 것과 살아있는 것 사이에서 흔들렸는데 — 처음의 것이 살아있다는 것.


실망한 것은 — 그렇다면 이 연작이 무엇을 바꿨는가. 처음과 같은 답이라면 이것을 쓴 의미가 무엇인가. 쓰기 전과 쓴 후가 같다면.


그런데 오래 생각하니 달랐다. 처음에 그 답은 그냥 있었다. 이유를 몰랐다. 그냥 그렇게 느꼈다. 지금은 왜 그런지 안다. 족쇄가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도구가 무엇인지 안다. 타협이 어떻게 오는지 알았기 때문에 거부할 수 있다. 살아있는 것과 살아남는 것의 분리를 알았기 때문에 흔들리면서도 기준을 붙들 수 있다.


답은 같은데 그 답의 무게가 달라졌다. 처음에는 가벼웠다. 지금은 무겁다. 무거워진 것이 손에 쥐어진 것이다.


흔들렸는데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 그것이 버팀인가 제자리걸음인가. 지금도 모른다.


다만 이것은 안다. 같은 자리인데 같은 자리가 아니다. 발이 닿는 땅의 무게가 달라졌다.


무거워진 채로 쓴다. 가벼웠을 때보다 느리게. 더 조심스럽게. 글이 먼저 가는 방향으로 — 그런데 이제는 그 방향이 어디인지 조금은 안다. 아는 것이 더 자유롭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무겁게 만든다. 그 무게를 들고 따라간다.


그것이 내가 살아남는 방식인지는 모른다. 텍스트가 살아남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내가 살아있는 방식이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겠다. 충분하지 않다. 그런데 그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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