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 시대와 계보
스크롤 시대에 텍스트는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한다.
저장되는 것. 그리고 기억되는 것.
저장은 서버에서 일어난다. 기억은 사람 안에서 일어난다. 둘은 다른 엔진으로 작동한다. 저장은 공간의 문제다. 기억은 압력의 문제다. 서버는 압력 없이 저장한다. 사람은 압력 없이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쓴 텍스트가 데이터 쓰레기장에 쌓인다면. 검색되지 않고, 추천되지 않고, 링크되지 않아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인가.
이 질문이 무섭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무섭다. 하지만 무서움의 종류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발견되지 않는 것이 무서웠다. 지금은 발견되어도 저장만 되고 기억되지 않는 것이 무섭다. 읽혔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 스크롤이 지나간 자리에 흔적이 없는 것. 그것이 더 무섭다.
저장과 기억의 차이를 오래 생각했다.
저장은 수동적이다. 텍스트가 거기 있으면 된다. 서버가 그것을 보존한다. 텍스트가 무엇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존재하면 된다.
기억은 능동적이다. 텍스트가 사람 안에서 무언가를 한다. 압력을 만든다. 그 압력이 사람을 바꾼다. 바뀐 사람이 그 텍스트를 기억한다. 기억은 텍스트와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저장은 사건이 아니다. 상태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저장되고 있는가. 기억되고 있는가.
기억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압력이 어떻게 사람을 바꾸는가.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경험으로 안다. 어떤 문장을 읽고 나서 — 그 문장을 읽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을 때. 세계가 조금 다르게 보일 때. 일상의 어떤 순간에 그 문장이 갑자기 돌아올 때. 그때 기억이 일어난 것이다.
기억은 텍스트가 사람 안에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 자리는 강요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설명해서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압력이 닿아야 만들어진다. 압력은 빈자리에서 온다. 작가가 채우지 않은 자리. 판정하지 않은 자리. 그 빈자리에 독자가 들어오면서 자신의 것을 가져온다. 자신의 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 기억이 시작된다.
그러니 기억을 만들려면 빈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빈자리를 설계하면 빈자리가 아니다. 이 모순 앞에서 오래 멈췄다.
기억되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이 빈자리를 만들려는 의도를 만든다. 의도가 생기는 순간 빈자리는 설계된다. 설계된 빈자리는 독자가 느낀다. 여기서 들어오라고 표시된 자리. 그 표시가 빈자리를 채운다. 빈자리가 채워지면 독자가 들어오지 못한다. 기억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기억을 원할수록 기억이 멀어진다. 이 역설이 잔인하다.
빠져나갈 방법이 있는가. 욕망을 없애는 것인가. 없앨 수 없다. 기억되고 싶다는 것이 쓰게 만드는 것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의식하지 않는 것인가. 의식하지 않으려는 순간 이미 의식하고 있다.
어쩌면 방법은 하나뿐인지도 모른다.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 욕망이 문장 앞에 오지 않게 하는 것. 욕망은 뒤에 있어야 한다. 문장이 먼저 가야 한다. 문장이 먼저 가면 빈자리는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 빈자리에 기억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다만 문장이 먼저 가도록 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렇다면 질문이 바뀐다. 내 텍스트가 저장되는가가 아니라 — 내 텍스트가 사건을 일으키는가.
체호프 시대에도 통속소설은 넘쳤다.
그것들은 살아남지 않았다. 체호프만 살아남았다. 이유는 그가 차가웠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압력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텍스트는 저장되었을 뿐 아니라 기억되었다. 다른 시대의 사람들 안에서 사건을 일으켰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은 너무 많다. 과잉이다. 체호프 시대의 통속과 지금의 과잉은 규모가 다르다. 재발견은 없다. 그냥 데이터 쓰레기로 전락할 뿐이다.
맞는 말이다. 부분적으로.
규모가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기억의 구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이 무언가를 기억하는 방식 — 압력을 받아서, 바뀌어서, 돌아와서 — 이것은 알고리즘이 바꾸지 못하는 것이다. 알고리즘은 저장을 최적화할 수 있다. 기억을 최적화할 수 없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붙잡힌 사람은 있다. 어떤 문장이 한 사람을 붙잡으면, 그 사람이 다음 사람을 호출한다. 그건 알고리즘이 아니라 전염이다.
전염은 느리다. 그런데 멈추지 않는다.
많이 읽히는 것과 강하게 읽히는 것은 다르다.
열 명이 얕게 읽는 것보다 한 명이 평생 다시 읽는 것이 생존에 가깝다. 이 말이 위안처럼 들릴 수 있다. 많이 읽히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는 말처럼.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억의 구조에 대한 말이다. 얕게 읽힌 것은 저장되지만 기억되지 않는다. 강하게 읽힌 것은 기억된다. 기억된 것이 살아남는다.
문학의 생존은 서버가 아니라 기억에서 일어난다.
어떤 글을 쓴 적이 있다. 슬프다는 단어 없이 쓴 글. 손바닥에 묻은 가루, 지문 사이의 얼룩, 식지 않는 미열. 그것들만으로 쓴 글. 아이를 잃은 여자에 대한 글이었다.
그 글을 읽고 어떤 사람이 말했다. 울컥했다고. 설명할 수 없었는데 무언가가 남았다고.
그 한 사람이 나에게는 충분하다. 충분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더 많은 사람이 읽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이 없다면 쓸 이유가 없다. 그 한 사람이 기억했다는 것이 — 그 텍스트가 저장을 넘어 기억이 되었다는 것이 — 내가 계속 쓰는 이유다.
나는 오래 남는 작가가 되고 싶다.
많이 읽히는 작가가 아니라. 이 차이를 선택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두 개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고 믿었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은 안다. 동시에 최대치로는 어렵다.
속도에 최적화된 텍스트와 재독에 최적화된 텍스트는 다른 방향을 향한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런데 재독이 왜 기억의 증거인가.
한 번 읽고 끝나는 것은 저장이다. 텍스트가 사람 안에 들어왔다가 나간다. 흔적이 없다. 다시 읽는다는 것은 — 그 텍스트가 사람 안에 무언가를 남겼다는 것이다. 그 남은 것을 확인하러 다시 간다. 혹은 그 남은 것이 사람을 다시 데려간다. 어느 쪽이든 — 텍스트가 사람 안에서 계속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억이다.
그러니 재독은 기억의 증거다. 결말을 알아도 다시 읽는다는 것은 — 정보를 얻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압력을 다시 느끼러 가는 것이다. 그 압력이 살아있기 때문에. 죽은 텍스트는 두 번 읽지 않는다. 알고 나면 끝이다. 살아있는 텍스트는 다시 읽어도 새롭다. 이미 알고 있는데 새롭다. 그것이 압력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느리고 눈에 띄지 않지만 다시 읽힐 수 있는 텍스트. 그것이 저장이 아니라 기억으로 남는 방식이다. 서버가 아니라 사람 안에서 살아남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타협하지 않는다.
읽힘을 기준으로 재배치되지 않는 언어. 이건 독자를 무시하는 태도가 아니다. 독자를 믿는 태도다. 설명하지 않아도 감지할 수 있는 독자. 즉각적인 감동이 없어도 압력을 느낄 수 있는 독자. 책을 덮은 뒤에도 무언가 남아서 다시 펼치는 독자.
그 독자에게 쓴다. 그 독자가 소수라는 것을 알면서.
당신이 이 연작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아마 그 독자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당신이 왜 여기까지 읽었는지 모른다. 설명되지 않는 것을 붙잡는 사람이어서인지. 아니면 그냥 우연히 흘러왔는지. 어떤 이유로 왔든 — 당신 안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는지 아닌지는 내가 알 수 없다.
다만 이것은 안다. 이 텍스트가 당신의 서버에 저장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 안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는지가 중요하다. 그것이 일어났는지 아닌지 — 그것은 당신만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