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쉬는 동안에도
우울하다는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네 용기가 부럽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항상 내 아픔과 다른 사람의 아픔을 비교하고 싶지도, 비교당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내가 한 말에 내가 더 놀라는 순간이었다.
상담을 통해, 또 스스로 자료를 찾으면서 나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에서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남들의 이야기와 비교하고 있었다. 내가 이런 일로 이렇게 오래 힘들어할 가치가 있을까? 내 주제에, 의지가 부족하니까 혼자 힘으로는 이겨내지 못하는 거 아냐?
내 이야기를 밖으로 꺼냈을 때 내가 가장 듣기 싫었던 말들을 나 스스로 되뇌어 온 것이다.
그 친구도 많이, 오래 힘들었고 속의 이야기를 밖으로 뱉는 데 엄청난 노력과 용기가 필요했을 테지만 나는 그 모든 것들을 그냥 부럽다는 말 한마디로 일단락해 버렸다.
미안하다.
우울에서 빠져나오려 마음먹는 것조차 힘들 수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진부한 위로 한 번 건네기도 전에 부럽다는 말로 일관해 버려서.
그가 우울하며 자해로 그 감정을 해소한다고 털어놓았을 때 내 성대는 자동 반사적으로 부럽다는 말을 내뱉었다. 나는 뭐가 그렇게 부러웠을까?
벌써 1년이 지난 일인데도 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가끔 고민한다. 스스로 내린 결론은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친구든 가족이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도 몇 년동안이나. 애초에 무덤까지 끌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친근한, 내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더 불편했고, 처음 보는, 혹은 한 번 보고 안 봐도 될 사이가 오히려 털어놓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을 하곤 하기 때문이다.
내 걱정과 불안한 감정을 공유한 나의 사람들로부터의 차별적인 시선과 대우를 견딜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걸 견디며 살아갈 바에는 강물로 뛰어내리는 게 더 낫다는 생각도 해왔다. 혼자 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어서, 내가 생각한 차선책은 상담과 글쓰기. 이 두 가지였고 불규칙적이었던 상담 시간은 그 외의 시간을 내가 버텨나갈 수 있는 작지만 견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상담을 고민한 몇 달의 시간이 무색할 만큼, 또 상담을 받는 시간 동안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이냐는 질책에 휩싸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손목에 빨간 줄을 만들기 전에, 내 목을 조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에, 다시 그 선택을 고민할 기회를 주는 주체였다.
좋은 상담사를 만나서 적절한 시기에 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어서 나아졌다기보다는, 그 작고 안전한 공간에서 오고 간 말들의 의미와 영향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이 내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것 같다. 비록 아주 주관적인 내 생각일 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