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모 Nov 24. 2020

3. 저, 자해해요

이해하지 마세요

상담 첫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줄줄이 늘어놓은 이야기들 끝에 내 자해 사실을 밝혔다. 그래. 꾸짖고 비난해요. 다 필요 없으니까. 이해를 바라고 싶지도 않아요. 그 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도 했지만, 선생님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크게 문제 삼지도 않았고, 그걸로 상담 올 때마다 자신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만을 전했다. 놀랐다. 솔직히 말하면 놀랄 힘도 없었는데. 첫 시간 내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있던 사지의 힘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이거 되게 심각한 문제 아닌가?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로 상처를 내시나요? 아뇨. 간단히 이어지는 질문에 건조하게 답하면서 생각했다. 내가 이 공간에 끌고 들어온 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간단히 보지 말아 달라는 취지에서 던지듯이 밝힌 건데 돌아오는 담담한 반응에 나는 오히려 실망했다. 내 이야기가 심각해 보이지 않은가? 나는 죽을 거 같아서 온 건데.. 창문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협박이라도 해야 하나? 


오래 상담을 이어온 사람들이나 상담사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상담 시간에 가지는 의문이나 생각들을 상담사와 공유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내담자인 나는 아직까지도 그게 참 어렵다. 이 글을 상담에 종사하시는 분이 읽으신다면 내담자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한 번쯤 생각해 봐도 좋을 것 같다.


하여튼 실행에 옮기기에는 소심한 인간이었고 비록 죽을 생각에 대한 토로로 시작했지만 갓 생겨난 이 가느다란 관계를 처음부터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내 자해를 아는 소수 중 하나가 된 눈 앞의 사람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또 숨길 생각이 앞섰다. 상처를 세세하게 알게 된 사람 앞에 있는 것이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것보다도 더 쪽팔릴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를 견딜 철판을 깔 자신도 없었다. 


상담사는 다 그런가? 내가 알던 바로는 상처가 생명에 지장을 주는가, 그 정도를 파악하고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을 모색하는 형태로 상담을 이끌어간다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스트레스를 풀 유일한 방법으로 자해를 선택했다는 것을 처음부터 이해받았다. 이상했다. 어떻게 해라, 하지 마라 조언의 어투를 상상하다가 놀라버렸다.


피부에 붉은 선을 달고 간 날, 선생님은 종이에 원하는 필기구로 선을 마음대로 그리라 했다. 자해하는 걸로 본인 눈치를 보지 말라던 말처럼 그 뒤로 다른 특별한 언급은 없었는데, 참지 못하고 터져버린 날이 지나고 다음 상담에서 내 상처를 소리 없이 살피는 선생님을 눈치채고 아차 싶었다. 가릴 여유도 변명할 여지도 없던 내게 크레파스를 쥐어주고 흰 종이에 좍좍 그어보라 한다. 주어진 보기나 예시 없이, 자세한 지시 사항에 따르지 않고 무언가를 하는 것은 한국 교육에 순응하며 살아온 나로서는 답도 없게 어려웠다.


내가 자해한 걸 알고 그를 대신할 방법을 우회적으로 알려주는 건가? 선생님의 의도를 내 마음대로 생각할 뿐이었다. 오 이런 좋은 방법이 있었구나! 내담자들이 이렇게 빠르게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상담사는 필요 없는 세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시키니까 한다는 식으로 마지못해 몇 줄 그리면서 '그런다고 내가 달라질 것 같아?'라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소용없어 보였으니까. 오래 알지도 않은 사이면서 다 이해한다는 태도와 자해를 막으려는 말 없는 방식에 화가 나기도 했다. 차라리 면전에 대고 칼 좀 대지 말라며 압박했다면 그게 더 익숙했을 텐데.


여러 면에서 똑똑한 사람이었고 아직 나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 답답한 날들이었다. 나는 물론 선생님에게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