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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Jul 12. 2019

루틴이 사람을 만든다

#한글 #1 스타일 #루틴

문학 위주 책을 발간하는 작은 출판사의 편집장인 나는, 책을 편집, 디자인하고 인쇄소에 넘겨 완성된 책을 받아볼 때까지 과정이 우리 삶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한컴오피스) 및 Adobe시리즈(포토샵, 인디자인, 일러스트)의 전문 편집 tip에서 글쓰기(스킬이 아니라 에티튜드!), 우리의 삶까지 이어보려 하니, 어여삐 봐주시면 감사하겠다. 이제부터 당신 주변의 모든 텍스트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편집의 시작을 알리는 키보드 비트 


  나는 출판사 편집장으로서, 작가와 출간 협의를 시작하게 되면, 제일 먼저 판형에 대해 논의한다. 정해진 시리즈에 부합하는 원고라면 기존의 판형에 그대로 '앉히면' 되나, 새로운 판형을 원할 경우, 전화기를 스피커 모드로 바꾸고 자세를 고쳐 앉아야 한다. 할 말도 많고 들을 말도 많아지기 때문.

  판형이 일정한 시집이나 산문집(소설집)과 같은 경우, 굳이 인디자인과 같은 전문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고, 일반 사람들도 쉽게 쓰는 한글(한컴오피스)을 편집 프로그램으로 쓴다. 한글의 단축키는 텍스트에 바로 적용되기 때문에 시집 작업은 2시간가량이면 충분하다. 심지어 그 시간 안에 교정교열도 본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

  제목과 본문 또는 소제목, 인용문, 각주 등을 Ctrl+1, Ctrl+2, Ctrl+3... 식으로 스타일 단축키를 지정해둔 판형에 원고를 앉히면서 띄어쓰기 및 오탈자를 순식간에 잡아낸다. 2~3번 교정교열 볼 일을 1~2번으로 줄이기 위해서다. 칼퇴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초집중의 시간. 기계식 키보드의 비트에 어울리는 경쾌한 노동요가 절실하다. 키보드 비트의 RPM을 오래, 높게 유지하려면 믹스커피는 필수. 그동안 내가 출판사에서 쌓은 종이컵의 높이는 못해도 20층 아파트 높이는 될 것이다.    


스타일 : 자주 사용하는 글자 모양이나 문단 모양을 미리 정해 놓고 쓰는 것(단축키는 F6)


줄간격 고정값 18pt 이상, 장평 95% 이하, 자간 -7% 이하로만 설정해도
세상이 달라진다


  스타일 '먹이는 일'을 10여 년 넘게 하다 보니, 스타일이 없는 인쇄물은 눈에 무척 거슬린다. 대학교, 대학원 과제물부터 시작하여 각종 홍보물과 식당 메뉴판까지. 관공서의 문서들은 나를 미치게 한다. 특히 한글 기본 설정에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인쇄물을 보면, 화가 난다. 강박이다. 직업병이 틀림없다. 줄간격 160%, 장평 100%, 자간 0%, 함초롱바탕 10포인트라는 기본값은 얼마나 미학 없는 글밥인가. 화가 난다. 대학원 다닐 때, 학우들의 기본값 페이퍼를 보면, 글의 내용과 상관없이 완성도가 떨어져 보였다. 이 정도면 중증이다. 나는 대학원 학우들, 강의를 듣는 학부생들 등 내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한글 스타일 편집을 알려주려 한다. 다들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그래서, 더 화가 난다.   


Routines maketh man


  흔히들 우리는 어떤 유니크한 혹은 나름의 개성을 드러내는 옷차림을 보고 스타일 있다고 말한다. 즉 남들이 가지지 못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데, 나는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스타일 또는 스타일의 근원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루틴(routine)! 어떤 일을 실행하기 위한 일정한 순서를 지칭하는 말인데, 판에 박힌 규칙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규칙이야말로 매우 중요하다. 루틴(스타일)대로 초고를 앉히는 일이 출판사의 일이라면, 루틴대로 일을 처리하고 관계를 겪어내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매너가 사람을 만들듯이(Manners maketh man), 루틴이 사람을 만든다(Routines maketh man). 루틴에서 비롯되는 단점과 장점이 그 사람을 완성해간다.

  대체로 직장인에게 일은 순서대로 오고 순서대로 처리된다. 변수는 그야말로 재앙.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만의 방식(순서)대로 사람을 사귄다. 여기서 변수는 재앙 혹은 사랑이 될 것이다. 사랑은 순서대로 처리되지 않으니 말이다. (순서대로 처리할 수 있는 자는 아마도 바람둥이일 것이다)


루틴이 없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변수가 될 것이다



무기력은 루틴의 반대말


  여러 문제로 우리는 종종 무기력해진다. 혹은 무기력해지길 원한다. 그러나 365일 노는 것보다, 365일 일하는 것이 낫다고 어떤 선배가 그랬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잠은 무덤에서 실컷 자자. 그렇다. 무기력해질 시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축복일지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보다 더 강해야 가능한 일. 무기력도 능력이다. 아니, 재능이다. 일-중독자들은 절대로 무기력을 용납하지 않는다. 무기력의 재능(ability)이 '선천적으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기력이 지속될수록 무기력은 눈 뭉치처럼 커지고 단단해져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 힘들어진다. 이때부터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때의 무기력은 루틴의 반대말이다. 루틴이 '기계적'으로 반응하여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라면, 이 '기계'가 작동을 멈춘 것이다.


습관보다 루틴


  습관의 중요성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작은 습관, 작은 실천이 삶을 바꾸고 세계를 바꾼다는 슬로건이나 광고문구들. 예,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습관과 루틴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습관은 자주 행동하여 몸에 익숙한 것이고, 루틴은 행동에 따른 결과를 미리 예측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루틴대로 하면 성공률이 높다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습관은 결과가 나쁘더라도 쉽게 고치지 못하는 것, 이를테면 돈을 물 쓰듯 하는 일(응?). 루틴은 수많은 착오 끝에 만들어진 수학 계산식과 같아서,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책 편집도 마찬가지. 나름의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진 완벽한 판형, 세상의 다양한 작품들이 한 페이지 안에 가지런히 정리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판형은, 각 출판사의 큰 자산이자 비급이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루틴


  직장에서의 루틴이 일(job)의 문제라면, 나의 루틴은 삶의 문제일 것이다. 몇 가지 나만의 루틴을 두서없이 생각해 보았다. 그중 변태스러운 것 몇 가지 떠올리면 다음과 같다.

  먼저, 나는 책을 사면, 나만의 '신성한 의식'을 치르기 전에는 절대로 책에 손을 대지 않는다. 택배로 포장된 박스채 들고 다닐 정도. 책을 사면, 가장 먼저 아스테이지로 정성껏 앞뒤 표지를 포장하고, 내 인장을 찍는다. 당연히 책에는 낙서하지 않는다. 스테들러 점보 색연필로 밑줄만 가능. 읽을 때마다 색연필의 색깔은 다르게. 그래서 많은 색의 밑줄이 그어진 문장일수록 중요한 문장이다. 그리고 책을 한 번 정독해야 비로소 책장의 정해진 자리로 배정받을 수 있다. 책장에 꽂히지 못해 방황하는 책들을 보라. 탑을 쌓으면 20층 아파트가 될 것이다.

드래곤볼 모으듯, 모든 색을 다 모았다! 혹시 잃어버릴까 봐 하나씩 더 사는 쎈쓰!


  나는 즉흥으로 갑자기, 느닷없이 이뤄지는 약속에는 거의 나가지 않는다. 미리 정해둔 일정이 있기 때문. 나의 일반적인 하루 일정은 <비몽사몽-아이 어린이집 등원-출판사 혹은 강의-아이 어린이집 하원-가사노동과 아이랑 놀아주기 무한 지옥-공부방(해방? 노동?)-기절> 순으로 '동네 한 바퀴'를 도는데, 무척 고단하긴 하지만, 이 순환이 깨지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나는 사교적인 외교관 'ESFJ'(MBTI 검사)니까.


나는 94% 계획형 인간이다. 나도 내가 무섭다. 51대 49의 아슬아슬한 자아와 에너지는 덤.


  오전 3시 이전(응?)에 잠들지 않는 것도 나만의 루틴. 저 무한순환을 성공적으로 마치려면 새벽 3시쯤 돼야 한다. 공부방에서 하는 일도 당연히 순서가 있다. <스마트폰게임(클라우드계정 최신화를 위한 시간입니다만)-일기 쓰기-못다 한 업무-야식(컵밥의 외식화)-책 읽기-글쓰기> 순이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이 순서는 반드시 지킨다. 주사나 수액을 맞을 정도로 아프지 않다면, 이 순환은 영원할 것이다. 잠은 무덤에 가서 늘어지게 실컷 자는 것으로. 나의 밤은 당신들의 낮보다 아름답다. 대신 나는 당신들보다 수명이 좀 짧겠지.

  강의 준비는 언제나 2주 치를 쌓아둘 것, 마감은 항상 마감 하루 전에 마감할 것, 사람의 전화번호는 3번 이상 연락을 주고받으면 저장할 것, 작업 파일은 반드시 날짜와 시간별로 저장할 것, 책가방(?)은 하루전날 밤에 싸놓을 것, 스마트폰의 각종 메시지 알람 '1'은 반드시, 수시로 없앨 것 등등 또라이 같은 루틴을 내 삶 곳곳에 매설해두었다. 이것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고, 지켜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시집 판형처럼 살고 싶다

     

  어설프게 '편집의 묘'를 부린답시고, 스타일을 제멋대로 하기보다는, 일정한 패턴을 가진, 안정적인 레이아웃이 나는 좋다. 제목과 본문의 간격이 일정하고, 단락이 보기 좋게 나눠진 가지런한 글밥을 보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변태가 맞다. 이런 강박을 가진 나는, 내가 좋다. 나는 시집 판형처럼 살고 싶다. 한두 행 다음 페이지로 넘치지 않고, 한 페이지에 알맞게. 완벽한 세상이다. 당신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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