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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Jul 17. 2019

글쓰기의 처음과 끝

#한글 #2 들여쓰기

이 세상의 글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들여쓰기를 한 글쓰기와 하지 않은 글쓰기.



  작가의 글을 편집하다가, 이마를 손으로 짚는 경우가 종종 있다. 비문이나 맞춤법, 띄어쓰기 등의 문제야 서둘러 수정하면 그만이지만, 이상한 곳에서 행과 연을 나누거나 단락이 나눠져 있으면, 마우스 포인터가 부들부들 떤다. 어쩌지, 하고 말이다. 이상한 곳을 어떻게 아냐고? 간단하다. 나는 편집할 때든 글을 쓸 때든 직접 소리 내어 읽어보기 때문이다. 한 덩어리로 읽어야 할 곳이 띄어져 있거나, 숨차도록 빽빽하게 글로 이어져 있다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아마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글의 흐름을 작가가 컨트롤하고 있지 못하거나, 작가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거나. 시의 경우, 의도적인 행갈이와 연갈이가 있으니 '나름' 존중해야겠지만, 산문의 경우는 다르다. 어쩌면 산문이 그 사람의 글쓰기 실력을 더 적나라하게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엔터를 자주 칠수록 글은 산만해지고, 엔터를 아예 치지 않고 읽어달라는 것은 폭력이다. 적당한 엔터가 필요한 순간!


  책을 기다리는 작가는 글이 아니라 완성될 책을 본다


  어떻게 할까. 나는 고민한다. 일단 내 방식대로 편집하고 나서, 교정본을 보낼까, 아니면 일단 작가의 초고대로 편집해서 그냥 보내버릴까. 엔터 친 곳을 모두 붙이면서, 붙어 있는 곳을 모두 엔터 치면서 수제비 반죽 뜨듯 적당한 크기의 뭉텅이를 만드는 일, 글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야 한다. 1안은 나의 수고를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고, 2안은 눈감아버리는 것이지만, 오랜  경험상 전자를 편집해서 보내든, 후자를 편집해서 보내든 작가는 생각보다 관심이 없다. 왜냐고? 작가 눈에는 모든 글이 예뻐 보이니까!

  책을 기다리는 작가는, 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완성될) 책을 본다. 책을 준비하는 편집자는 책을 보기 전에 (완성시켜야 하는) 글을 본다. 글이 완성돼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다. 원고가 출판사로 넘어가는 순간부터, 이제 작가보다 편집자가 더 글을 많이 읽고 더 고민하게 된다. 시나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출판사에 오래 재직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본인 글쓰기 할 에너지를 편집에 다 쏟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정도 이골(?)이 난 베테랑들은 본인의 글쓰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남의 글은 남의 글, 퇴근하면 그만이다. 남의 글에 퇴근!


이 페이지의 편집이 끝나야 다음 페이지를 편집할 수 있다


  우리는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기보다는 주마간산 식으로 묵독하는 것에 익숙하다. 빽빽한 텍스트보다 스펙터클한 이미지, 자극적인 이미지에 마음이 더 끌리기 때문이다. 이놈의 무한경쟁사회에서 소위 '정보의 홍수'라는 클리쉐 앞에서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는 것은 사치! 눈은 페이지보다 빠르다. 소리 내어 읽으려면 모든 글을 다 읽어야 하니, 그건 다음 생으로 미루는 것으로.

  작가 역시 책 한 권 전체를 염두에 두므로, 쓸 때는 정성 들여 썼겠지만, 일단 원고가 하나의 파일로 묶기게 되면 나무 하나하나보다는 숲이라는 전체를, 멋지게 나올 책만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반면에 편집자는 나무 하나하나의 재질을 느껴가며 지나간다. "이 페이지의 편집이 끝나야 다음 페이지를 편집할 수 있다." 아주 간단한 편집의 정의가 아닌가. 더욱이 책 한 권을 편집할 때, 통일성을 유지해야 하므로, 레이아웃부터 시작해 문장부호나 단락의 길이 등도 일정해야 하니, 작은 수정이 큰 야근을 불러오기 일쑤(얼쑤!).

  나는 묵독보다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좋아하고, 또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추천한다. 가장 기본이면서 가장 어려운 퇴고법이 바로 이것! 소리 내어 읽으면 된다. 이상한 곳은 무조건 턱, 하고 걸린다.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소리 내어 읽고 있다. 특히 문학작품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좋다. 이 세상의 모든 문장은 리듬이 있기 때문이다. 특별하고 고유한, 매력적인 리듬이 있는 글이 곧 매력적인 글이 아닐까.


  글과 밀당하는 일, 들여쓰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브런치라는 플랫폼의 특성상 글밥이 많으면 읽기 힘들다. 중간중간 이미지도 넣어야 하고, 따옴표로 된 소제목도 있어야 하며, 글씨에 색을 넣거나 볼드체를 사용해야, 가독성을 높일 수 있다. 지루하면 바로 스크롤! 그러니, 글이 실리는 매체의 특성을 당연히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누가 읽는지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논리의 흐름. 논리의 흐름이 뒤죽박죽인 글은 읽을 수도 없고 읽기도 싫다. 말 그대로 수다에 머무는 글에, 우리의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지 않은가.

들여쓰기 : 문단 첫 줄이 그 문단 전체의 왼쪽 여백보다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시작되도록 설정하는 것(단축키 Alt+t)


  단락을 배분할 줄 안다는 것은 논리를 질서 정연하게 만들어간다는 말이자, 글의  전체 흐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단락을 만드는 일이 곧 들여쓰기. 들여쓰기는 단순히 몇 칸을 뒤로 밀어 새로운 문단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글의 덩어리를 만드는, 논리의 흐름을 조직하는 밀당 그 자체다. 누구와 밀당하냐고? 첫째는 독자요, 둘째는 자기 자신(체력의 한계!), 셋째는 글 자체. 당연히 고수는 글과 씨름하겠지.

  (글쓰기) 꼬꼬마 시절의 나를 떠올려보면, 한 문장 쓰는 것도 쩔쩔맸다. 거의 팔만대장경급. 한 자 쓰고 절하고, 한 자 쓰고 절하고... 그나마 쓴 문장에, 다음 문장 이어가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 어쩔 수 없이 '그러나', '그래서', '그러므로', '따라서' 등등의 접속사를 덕지덕지 갖다 붙인다. 접속사가 많은 글은, 논리적 흐름이 그만큼 부자연스럽다는 이야기. 다시 말하면, 접속사가 없는 글일수록 좋은 글일 가능성이 높다(그래서 지금 나는 내가 쓴 글을 다시 읽고 접속사를 모두 지웠다네).

  

  난 딴 돈의 반만 가져가


  무작정 원샷원킬, 일필휘지로 문장을 이어가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어떤 글쓰기 고수도, 소설가도 시인도 그렇게 글을 쓰지 못한다(안 한다가 아니라 못한다). 하룻밤 사이에 썼다고 해도, 수많은 퇴고를 거쳐야 한다. 예컨대, 필(feel) 충만한 음주 글쓰기는 그다음 날 바로 폐기 처분하지 않는가. 음주 SNS는 하지 말자 우리.

  어깨에 힘 빼고(무슨 운동이든 간에 힘 빼는데 3년 정도 걸린다고 하더라;;;;) 편하게 문장을 이어가되, 언제든 삭제할 수 있고 수정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경우에는 아예 단락을 통으로 날리는 경우도 있다. 아깝다고 생각하는 순간, 글은 지저분해진다. 타짜의 고니처럼 "난 딴 돈의 반만 가져가"의 마인드로, 반만 살리고 반은 버린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갖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일단 앉아서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이미 글쓰기의 반을 이루었다(고 믿는다)!


"난 쓴 글의 반만 가져가!"(영화 <타짜>)


  반은 살리고 반은 버리는 일이 글쓰기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여기서 살리고 버리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단락! 필요한 단락을 살리고 필요 없는 단락은 버리고, 단락에 필요한 문장은 살리고 필요 없는 문장은 버린다. 과감한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글이 내 손을 떠날 때까지, 이 작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브런치가 뭐라고 지금도 이 글을 며칠째 손보고 있다ㅠㅠ)

  단락 나누기가 글은 보기에도 좋다. 보기에도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고 했다. 글 자체에도 리듬이 있지만, 나눠진 단락을 통해서도 리듬을 만들어낼 수 있다. 들여쓰기된 단락들이 모인 페이지가 꼭 강물의 흐름 같지 않은가. 심지어 책을 읽다가 문맥을 놓치거나 딴짓을 해서 독서를 잠시 중단해도 다시 읽던 곳으로 찾아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 단락 아닐까.  


들여쓰기는 땅따먹기


  나는 일단 쓴다. 무슨 글이든 간에 일단 쓴다. 지금 브런치 글쓰기도 그러하다. 글이 막힐 때마다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소리 내어 읽는다.  그러다 보면 다시 길이(글이) 열린다. 또 쓰다가 안 되면 다시 처음부터 읽는다. 이렇게 반복 X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단락이 만들어지고 소제목이 만들어진다. 나도 글이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다. 그래서 가끔은 글이 두렵기도 하다. 나도 모르는 곳으로 나를 끌고 가니 말이다. 그래서 또 가끔은 흥미진진하다. 글이 어떻게 끝날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 양가적인 감정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듯하다.

  들여쓰기가 단락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라면, 들여쓰기는 땅따먹기와 같아서 논리가 멀리 나가지 않도록 잡아주는 '집'과 같기도 하고, 또 논리가 멀리 나갈 수 있도록 힘을 응축하는 곳이기도 하다. 만약 들여쓰기가 없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디에서 끝내야 할지 망망대해를 헤매는 글쓰기가 될 것이다.

땅따먹기 놀이. 돌을 최대한 멀리 튕기되, 딱 3번 만에 자기 집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2번도 안 되고 4번도 안 된다. (이미지-한겨례신문 2006. 9.22)



   생각해보면, 내 삶도 땅따먹기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얼마큼 노력하면 얼마큼의 결과를 얻는지 미리 계산하고 계획하는 'ESFJ' 유형인지라, 딱 내가 의도하는 만큼 돌을 튕겨 돌아온다. 더 멀리 가지 않고 무리하지 않는다. 무척 안정적이긴 하겠지만, 모험이 없으니 그 이상의 것도 얻을 수 없다. 늘 배팅이 적다. 당연히 많이 잃지도 않는다. 불만은 없다. 그러나 가끔은, 일탈을 꿈꾼다. 특히 소설을 읽을 때 그렇다. 최근 전아리 소설가의 <뱀>이라는 단편을 읽고,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꿈에 소설 내용인 뱀'들'이 나오기도 했다. 이불킥했다. 키 크는 꿈인 줄 알았다.

  들여쓰기에서 멀리 왔다. 들여쓰기로 시작한 글이 이렇게 끝날 줄 몰랐으나, 이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그저 들여쓰기라는 중요한 글쓰기 스킬을 제공하는 것으로 글이 시작되었는데... 이렇게 끝날 줄이야... 이것도 땅따먹기다. 단락 단락 돌을 튕겨 글 전체의 논리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도록 3번 만에 돌아왔다. 땅을 크게 먹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제 당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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