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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May 07. 2020

여름 편지

written by 다온



  이것은 지난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아직도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짓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존재한다. 아무렇게나 찢은 공책의 낱장, 흑연이 묻어 거뭇해진 손날, 나무 냄새가 짙게 나는 연필, 그 연필로 꾹꾹 눌러쓴 진심.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지난 여름을 진짜라고 말해준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하지만 언젠가는 꼭 돌아올 거라 믿는, 우리의 여름 이야기.  


*** 


  슬금슬금 오르는 기온에 따라 하복 혼용기간이 시작되었다. 내일부터 하복 입어도 된대. 여름의 학교는 유독 하복을 허용해주는 시작일이 다른 근처 학교보다 늦어서 잔뜩 불만이 찬 상태였다. 친구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다음 날, 여름은 냉큼 옷장에서 하복을 꺼내 입었다. 한결 가벼워진 느낌에 아직 푹푹 찌기 전인 햇살도 나름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 방학도 금방이겠거니, 어디로든 놀러 갈 계획에 들뜨기까지 했다. 익숙한 교실에 도착해 자리로 오면서 친구들과 인사도 하고, 가방을 책상 옆에 걸고, 책상에 붙여둔 작은 시간표를 확인하며 교실 뒤 사물함으로 향했다. 그 일련의 과정은 학교라는 곳을 다니는 동안 줄곧 변치 않는 아침의 습관이 되었다. 시간표의 맨 앞글자만 따서 중얼중얼 외우며 사물함을 열자, 원래는 없던 낯선 것을 발견했다. 

  곱게 접힌 종이쪽지를. 

  쪽지를 본 여름의 눈부터 시작해 얼굴 전체로 번진 물음표는 마음속까지 파고들었다. 이게 뭐지? 의아함을 담은 손은 쪽지를 집어 들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쪽지를 펼쳤다. 평범한 공책에서 그냥 주욱 찢어낸 듯, 종이의 왼쪽이 반듯하지 못했다. 꺼끌하고 울퉁불퉁한 그 왼편을 검지 끝으로 매만지면서, 여름은 쪽지를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안녕, 여름아.

일단 내 편지가 갑작스러워서 너를 당황하게 했다면 미안해.

하지만 너에게 닿을 방법이 이것밖에 없어서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이해해준다면 정말 고마울 것 같아.

나와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 있다면 답장을 써서 같은 자리에 놓아줘.

또 들를게. 오늘 하루 잘 보냈으면 좋겠다.

─여름에게, 연서가」 


  연서? 모서리를 매만지던 손에 눌려 종이가 뭉개져 있는 줄도 모르고 여름은 짧은 쪽지를 두어번 더 읽었다. 잘 모르는 누군가가 건넨 작은 편지. 닿을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고? 무슨 소리지? 쪽지를 읽기 전보다 더 늘어난 물음표 탓에 사물함 앞에 멈춘 두 발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여름아!”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휙 뒤를 돌자 짝꿍인 친구가 여름의 옆자리에 가방을 내리고 있었다. 시간표 챙겨? 그제야 잊고 있던 본래 목적이 떠올라 조금 허둥댔다. 어어, 대충 대답하고선 어느새 다 잊어버린 시간표를 다시 확인하러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고 벌써 7교시였다. 아침에 사물함에서 따로 챙긴 쪽지는 원래대로 접어 가방 속 안주머니에 고이 넣어두었다. 저녁이 다 되어가도록 내내 쪽지에 신경이 뺏겨서 어떻게 하루가 흘렀는지도 잘 모르겠다. 만약 답장을 한다면 하교 전에는 넣어둬야 할 텐데. 저도 모르게 답장을 하는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가버린 여름은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서랍을 더듬어 평소에 쓰던 작은 공책을 꺼냈다. 낙서와 필기가 적힌 곳을 빠르게 지나쳐 빈 공간에 도달했다. 무슨 말을 써야 할지도 모르지만, 손이 먼저 움직였다. 자주 쓰던 검은 펜이 짙은 글씨를 새겼다. 

  편지를 자주 써보지 않아 서툰 문장이 조금씩 조금씩 종이를 채웠다. 밤하늘 같은 검은 잉크가 마지막으로 이름까지 썼을 때, 여름은 시끌시끌한 교실 사이에서 공책을 찢어냈다. 받은 쪽지랑 어느 정도 닮은 모양새에 왠지 모를 뿌듯함까지 느끼며, 쉬는 시간이 끝나기 전에 사물함 쪽으로 향했다. 의자 끄는 소리가 짝꿍 친구를 깨우지 않게 조심하면서, 어쩌면 이 비밀스러운 편지를 들키기 싫은 마음에 더욱 조용하게. 

  그렇게 사물함을 열어 가지런히 정리된 교과서와 파일들 앞에 조금 남은 빈자리, 연서의 쪽지가 놓여있던 그 자리에 편지를 놓고 쪽지를 접으려는 순간, 흑색 잉크가 옅게 번지는 느낌이 들어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침보다 더 큰 물음표가 가득히 여름을 채우는 순간이었다. 타이밍은 여름을 도와주지 않는 건지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음악 소리가 크게 울렸다. 여름은 사물함을 닫고 종이를 쥔 채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것은 이번 시간이 자율학습이었기에 잠든 짝꿍을 깨우지 않아도 되고 편지에 대한 고민을 지속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검은색이었던 글씨가 조금 연해져 회색이 되어버린 것을 보았다. 반쯤 접었던 종이를 펼치자 글씨는 여름이 보았던 대로 회색이 맞았다. 곧 사라질 것만 같은 자신의 글씨를 보며, 여름은 아까의 펜으로 쪽지에 선 하나를 죽 그었다. 그 선은 편지를 쓸 때처럼 선명하고 짙은 흑색이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편지를 수 분 동안 노려보던 여름은 아침의 편지를 가방에서 꺼내보았다. 고운 글씨로 쓰여있는 쪽지 속 연서의 글씨는 연한 회색, 연필의 글씨였다. 

  연필? 여름은 큰 필통 속을 뒤적여 미술 시간에 쓰고 남았던 진한 4B연필을 발견했다. 이거면 되나? 받은 쪽지 속 글씨보다는 훨씬 진했지만, 여름은 공책의 새 공간에 다시 같은 내용을 연필로 써내려갔다. 조그마한 이야기 하나를 잊지 않고 덧붙이면서.  


「안녕, 연서야. 

음… 일단 조금 놀랐어. 

하지만 닿을 방법이 이것뿐인데도 나에게 다가와준 너의 노력이 고맙다고 느꼈어. 

고마운 마음이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답장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들더라.

아무튼 그래서 너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마음 먹었어. 

편지는 조금 서툴지만 이해해주길 바라. 

답장 기다릴게. 

(P.S. 방금 볼펜으로 썼는데 사물함에 가니까 지워졌어! 연필은 괜찮은 거야?)

─연서에게, 여름이」 


  8교시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학생들은 제각각 석식을 위해 식당으로 내려가거나 하교를 위해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짝꿍과 달리 석식도 먹지 않고 야간자율학습도 하지 않는 여름은 원래 8교시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향한다. 다른 친구들처럼 가방을 챙기고, 잠에서 깬 짝꿍에게 인사도 하고. 그렇게 하교 준비를 마친 여름의 손에는 공책에서 새로 찢어낸 작은 종이가 있었다. 아까처럼 또 사라지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이번에는 사물함에 종이를 놓아도 글씨가 옅어지지 않았다. 연필로 써야 하는구나. 깨달은 사실을 되뇌며 조심조심 쪽지를 접었다. 아침에 보았던 위치에 똑같이 둔 이 쪽지를 연서가 가져가 읽어주길 바라며, 여름은 사물함을 닫고 교실을 벗어났다. 

  가만히 집에 도착해 씻고, 저녁을 챙겨 먹고, 방에 돌아와 가만히 침대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볼 무렵이 되어서야 오늘 하루가 꿈만 같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사실은 지금도 꿈이 아닐까. 볼을 아프게 꼬집는 건 왠지 싫어서 괜히 두 손을 꾹꾹 쥐었다 펴는 것을 반복했다. 분명히 힘이 들어가는 손끝에는 익숙하지 않은 연필의 촉감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여름은 책상 앞으로 걸어가 의자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열어, 안쪽 주머니에 꼭꼭 넣어둔 연서의 쪽지를 다시 펼쳐보았다. 희미한 흑연의 냄새가 콧등을 간질일 무렵, 다시 곱게 접힌 쪽지는 여름이 다 쓴 공책을 모아두는 서랍 속에 살포시 자리했다. 표지가 예뻐 마음에 들었던 공책, 부지런히 채웠던 아기자기한 다이어리, 의미없는 낙서가 가득한 연습장 등 여름의 추억이 가득한 그 서랍에 연서의 쪽지도 들어가게 되었다. 서랍을 닫고 다시 침대로 돌아오는 동안, 요즘 들어 부쩍 더워진 방 공기를 식히기 위해 작은 선풍기를 켰다. 창밖으로는 길어진 해가 세상을 짙은 다홍으로 물들이더니 이제는 서서히 푸른 밤을 가져오고 있었다. 

  그날로부터 비로소 우리의 여름이 시작되었다.  





「안녕, 여름아.

우선 답장해줘서 정말 고마워.

간신히 닿을 수 있게끔 노력한 게 받아들여져서 정말 기뻐.

그리고 네 말이 맞아. 번거롭겠지만 연필만 가능해.

네 연필은 내 연필과 달리 색이 짙고 또렷하구나. 그래서 더 좋은 것 같아. 

날씨가 많이 덥지? 이젠 정말 여름이 왔다고 생각해.

방학 때는 어디 놀러 갈 계획 있어?

아니면 이번 여름에는 할 수 없더라도 나중에 하고 싶은 것이 있어?

있다면 들려줘, 여름아.

─여름에게, 연서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등교를 해버렸다. 매일 아침 거쳐오던 일련의 과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가방만 내려놓고 시간표는 확인하지 않은 채 곧장 사물함이 있는 교실 뒤편으로 향했다. 어제 사물함을 열고 처음 봤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놓여있는 작은 쪽지에 슬쩍 웃음이 나왔다. 남들 몰래 생겨버린 조용한 이 비밀은 어느새 여름의 작은 즐거움이 되어버린 듯했다. 더위에 익어 조금 발개진 볼을 밀고 올라온 입꼬리는 잠시 모른 척 한 채, 여름은 다 읽어내린 편지를 고이 접어 교복 주머니에 소중히 넣었다. 그런 다음에야 자리로 돌아가 시간표를 확인하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하루를 이어갔다.  

  여름아, 쌤이 너 교무실로 와달래. 한가로운 점심시간, 식사를 마치고 교실로 돌아오는 길에 매점에 들러서 샀던 아이스크림은 일찌감치 다 먹어버리고 친구와 재잘대는데 반 친구 하나가 교실 앞문을 열고 선생님의 목소리를 전해주었다. 잘근잘근 잇자국이 난 나무 막대는 대화하던 친구에게 다녀올게 한 마디를 남기고 교실을 나설 때가 되어서야 쓰레기통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에어컨을 튼 교실에 머물러 있었기에 더 후덥지근하게 느껴지는 복도를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 실내화용으로 신는 검은 슬리퍼가 복도 바닥에 탁탁 슥슥 소리를 냈다. 점심시간인 만큼 와글와글 시끄러운 목소리가 여러 교실에서 흘러나와 복도의 낮공기 사이사이를 채웠다. 교무실로 향하는 걸음걸음에 짙은 색의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복도와 계단 곳곳에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여름 바람은 교복 자락까지 닿아왔다. 

  그렇게 맑은 하늘빛을 받으며 두 층을 내려오면 교무실이 바로 보였다. 그리 무겁지 않은 문을 밀어 여니 고개를 들고 있던 담임 선생님과 눈이 딱 마주친다. 교무실에 쏙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고서 잰걸음으로 선생님의 옆으로 섰다. 빨리 왔네, 하는 상냥한 목소리에는 살짝 웃어보였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학급회의 중 회의 내용을 정리해 기록하고 있는 여름이라, 어제 있던 회의 내용에 대해 대화를 조금 나누었다. 이제 올라가 봐도 된다는 말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서려는 순간 교복 주머니에 넣어뒀던 종이의 느낌이 미미하게 느껴져 아, 하고 다시 선생님 쪽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있잖아요.”

  “응?”

  “우리 학교에 연서라는 학생이 있어요?”

  “연서?”

  “네, 성은 저도 몰라요.”


  선생님은 잠시 으음, 소리를 내며 고민하더니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내어놓았다. 여름의 담임 선생님은 올해 새로 이 학교에 발령이 난 선생님이기에 잘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알게 되면 말해주겠다는 선생님에게 고맙습니다아 하며 애교스러운 인사를 남기고 여름은 교실로 돌아갔다. 오늘 5교시가 자습이었으니 답장을 쓰자고 생각하면서.  


「안녕, 연서야. 

나도 모르게 답장이 온 걸 보고 기쁘다고 느끼게 됐어. 

너와 편지를 나눈다는 사실이 즐거운 것 같아. 

내 연필은 아마 미술 수업 때 쓰는 거라서 진한 걸 거야. 

나는 네 연필의 색처럼 연한 것도 좋아해.  

이번 여름에는 방학 보충을 나와야 해서 계획해둔 건 딱히 없는 것 같아. 

그래도 뭔가 한다면 물놀이를 가고 싶어. 

시원한 물에서 실컷 놀고 나른하게 푹 자면 좋을 거야. 

너는 하고 싶은 거 있어?

─연서에게, 여름이」 


「안녕, 여름아.

나도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는 게 신기하고 즐겁고 또 기뻐.

네가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도 기쁘다.

옅은 나를 알아봐 주는 너라서 참 다행이야. 

네가 물놀이 이야기를 하니까 나도 물놀이를 가고 싶어졌어.

시원한 계곡에 발을 담그고 끊이지 않는 물소리를 한참동안 듣고 싶어.

그러면 더운 것도 다 잊을 수 있을 텐데, 그치?

방학 보충 때에는 어떤 걸 해?

─여름에게, 연서가」 


「안녕, 연서야. 

옅다고는 하지만 나에게는 충분히 뚜렷하게 보여. 

언제든 알아볼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  

방학 보충 때에는 학교에 나와야겠지? 

나와서 오후까지 정해진 시간표대로 수업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 

학기 중이랑 별로 다를 게 없어서 이걸 왜 하는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보충을 듣는 학생들이 그렇게 많은 게 아니라서

급식소나 매점 운영을 안 한다는 점이야. 

그래서 친구들끼리 잠시 밖에 나가서 편의점에 가거나, 

각자 도시락을 싸오거나 할 수 있어. 

나도 두 가지 방법을 번갈아서 할 것 같아. 

너는 보충 안 들어?

(P.S. 오늘은 편지가 빼곡해졌어!)

─연서에게, 여름이」 


「안녕, 여름아.

빼곡할 만큼 편지를 써줘서 고마워.

날 언제나 알아봐 준다는 말도 고마워. 앞으로도 그럴 수 있길 간절히 바랄게. 

나는 보충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어. 별로 다를 건 없구나.

도시락이라니 오랜만에 듣는 말이야. 그리운 말이기도 하고.

넌 어떤 메뉴를 주로 가져올 거야?

나는 도시락을 싸면 계란 후라이는 꼭 넣고 싶다고 엄마를 졸랐던 기억이 있어.

그런데 요즘은 날이 더워서 음식을 가져올 때 주의해야 할 것 같아.

여름이 너도 조심하자.

─여름에게, 연서가」 





  그렇게 매일이 반복되었다. 날이 갈수록 기온은 오르고 햇빛은 더욱 따가워졌다. 편지에는 갈수록 덥다는 이야기가 많아졌고 더운 걸 싫어하는 두 사람은 마음을 모아 더위를 장난스레 저주하기도 했다. 푹푹 찌는 더위, 그것과는 별개로 편지를 쓰고 있거나 이 편지를 생각하면 묘한 청량감과 포근함까지 느낄 수 있었다. 여름은 신기하면서도 손바닥 안쪽이 간질거리는 감각에 피슬피슬 웃는 일이 잦았다. 조용하면서도 선명하고, 따스하면서 폭신한. 게다가 가장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지를 읽고 있을 때만큼은 더운 걸 잊을 만큼의 푸른 빛깔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늘 불규칙하게 찢겨있는 낱장의 쪽지는 그저 하얀 바탕에 줄이 그어진, 푸른색은 찾아볼 수 없는 종이였는데도 말이다. 어쩐지 파란색의 느낌이 든다고 연서를 향해 솔직하게 편지를 썼던 다음 날, 연서는 아마 자신이 파란색을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 마음이 여름이 너에게까지 닿는 게 아닐까? 하는 유한 말투와 연한 연필 글씨를 바라보고 있자면 그런 건가 보다 하며 납득하고 있게 된다. 

  어느덧 방학 보충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며칠 후면 학교에 나오지 않는 진짜 방학이 짧게 주어지고 그 뒤에는 2학기가 시작된다. 방학 동안에는 편지를 주고받을 수 없게 된다는 말에 그럼 각자 푹 쉬고 오자고, 개학일에 다시 편지를 넣어두겠다고, 연서가 말했다. 가능하다면 집 주소라도 알려줄 수 있었던 여름은 아쉬운 마음을 꾹꾹 눌러 감춰두었다. 우리의 소통이 학교 속 작은 사물함과 그 속의 조그만 쪽지로 이루어지는 데에 조금 더 의미를 두며 스스로를 달랬다. 

  방학 중에는 연서가 즐겁게 읽었다던 소설을 읽어보고 그 감상을 말해주기로 약속했다. 집과 그리 멀지 않은 도서관에 도착한 여름은 연서가 추천해준 책을 찾아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적당한 두께의 책이었다. 사람들의 손을 많이 거치지 않은 듯 깔끔한 표지를 지나치면 약간 빛이 바랜 베이지색 속지가 눈에 띄었다. 책이 나왔던 때를 찾아보니 여름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세상에 나온 책이었다. 연서는 이런 책을 어떻게 찾아 읽었을까, 정말 책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오후 4시쯤 도서관에 왔던 여름은 하늘이 까맣게 칠해질 때까지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었다. 언젠가의 연서처럼 책장을 넘기고 가상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거의 한 달 정도 주고받던 편지가 없어서 허전하게 느껴지는 방학은 빠르게 지나갔다. 여전히 덥기만 한 날씨지만 서서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점점 가을이 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개학은 싫었지만 연서의 편지가 한없이 기다려졌다. 개학임에도 불구하고 이르게 움직여 교실 문을 가장 먼저 열었다. 달그락 소리를 내는 반 열쇠를 앞문 옆 벽에 붙여진 고리에 걸자마자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사물함으로 종종 걸어갔다. 익숙한 곳을 활짝 열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얌전히 놓인 쪽지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안녕, 여름아.

오랜만이지? 잘 지냈어?

내가 말한 책은 읽어봤는지, 어땠는지 궁금해.

매일 너에게 받고 너에게 쓰던 편지를 잠시 쉬었다고 그게 참 허전하더라.

오늘이 많이 기다려졌어.

아침 공기가 조금 쌀쌀해졌지?

더운 게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오늘도 매점에서 아이스크림 먹을 거야?

─여름에게, 연서가」 


  오랜만이지만 어제도 본 듯이 자연스러운 대화에 여름은 어느새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개학이라 수업이 널널할 테니 오늘은 편지를 길게 써야지 하는 다짐이 일었다. 지난 달에 바뀐 자리는 파랗게 맑은 하늘이 잘 보이는 창가 자리였다. 기분 좋게 자리로 향해 그제야 가방을 내리고, 어김없이 푸르게 느껴지는 편지를 바라보며 필통을 꺼냈다. 그리고 보충 마지막 날 서랍에 넣어둔 모습 그대로의 공책을 꺼냈다. 편지를 쓰기 시작한 뒤로 매일 찢게 되어 속지의 반은 사라진 익숙한 공책. 오늘도 이 공책을 한 장 찢게 될 것이고, 그것은 연서에게로 향하게 될 것이다. 쨍쨍하기만 했던 햇살이 언제부턴가 누그러진 것도 모르는 채, 처음 편지를 썼을 때와 달리 손가락 한 마디가 넘게 짧아진 연필을 바르게 쥐었다. 연서 덕분에 즐겁게 읽었던 소설에 대한 감상을 잔뜩 써내려갈 생각이었다. 





  내일부터는 춘추복 혼용기간이니까, 입을 사람은 제대로 잘 입고 와. 아침 조례 시간에 선생님에게서 혼용기간 소식을 전해들었다. 정말 가을이 오고 있구나.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인 친구는 야자가 끝난 뒤의 하굣길을 위해 내일부터 춘추복을 입을 생각이라고 했다. 반면 더운 걸 질색하는 여름은 혼용기간이 끝날 때까지 하복을 고집할 생각이었지만. 오늘 1교시는 교실에서 동영상을 시청하는 수업이었으므로, 답장을 일찍 쓰기 시작했다.  


「안녕, 연서야. 

나 이제 공책이 몇 장 안 남았어. 

같은 공책을 다시 사러 내일 문구점에 갈까 해. 

몰랐는데 연필도 많이 줄어들었더라. 그래도 여전히 긴 편이지만. 

내일부터 춘추복 혼용기간이라는데

나는 그래도 더워서 계속 하복 입고 다닐 거야. 

연서 너는? 

─연서에게, 여름이」 


  익숙하게 쪽지를 접고 교복 주머니에 조심스레 집어넣은 뒤에야 또 거뭇해진 손날을 발견했다. 문구점에 가는 김에 비교적 연한심의 연필을 새로 살지 고민하게 된다. 그럼에도 늘 이렇게 편지를 나누었다는 흔적이 남는 게 내심 좋기도 했다. 교탁에 서서 출석부를 펼치고 항상 지니고 다니는 다이어리에 무언가를 정리하던 선생님이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들어 여름을 찾았다. 틀어주는 영상을 보지 않고 편지를 쓴 다음에 고개를 들고 있었던 여름은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했다. 선생님은 작게 손짓을 해 여름을 앞으로 불러내었다. 영상을 보는 반 친구들이 있기에 선생님과 여름의 대화는 조용히 가라앉았다. 


  “선생님 왜요?”

  “예전에 여름이가 물어본 거 말이야.”

  “네?”

  “기억 안 나? 연서라는 학생이 있는지 물어봤던 거.”


  여름은 그제야 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여러번 끄덕였다. 있었어요? 반짝이기 시작한 눈을 알아본 선생님은 그저 어딘지 쓸쓸하게 미소를 짓고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지금 학교를 다니는 학생 중에는 없는 것 같아. 관둔 학생들의 이름 중에도 없었고. 다른 친구를 잘못 안 거 아닐까? 기대와는 다른 대답에 여름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선생님은 반짝이는 빛이 사라진 여름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고는 여름을 자리로 돌려보냈다. 짝꿍 친구가 궁금증을 보였지만 대충 심부름 같은 이야기로 둘러대고서 주머니에 들어있는 쪽지를 생각하려고 했다. 친구가 여름에게 말을 걸기 전까지는. 


  “여름아, 그거 알아?”

  “응? 뭐를?”


  호기심을 끌어올릴 만한 말로 소곤소곤 여름의 주의를 끈 친구가 여름에게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야 지금 교실 앞 모니터에서 나오는 영상이 무엇인지 눈에 들어왔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의 대처 요령. 새빨갛게 피어오른 불길이 위협적이었다. 

  우리 학교 엄청 오래됐잖아. 완전 옛날부터 있던 건물 공사하고 고치고 그렇게 계속 여기 있었던 거 알지. 지금은 없어졌는데, 원래 학교 뒤편에 소각장? 그런 게 있었대. 그 옆에는 창고도 같이 있었고. 근데 거기서, 학생 하나가 죽었대. 범인이 있었는지 아님 그냥 사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각장에서 불이 난 게 창고까지 번졌다는 거야. 근데 그 창고 안에 있던 학생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죽은 거래. 


  “누가 문을 밖에서 잠근 게 아니면 못 나올 이유가 없잖아.”

  “응,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건지 자세한 건 나도 잘 못 들었어. 엄청 옛날에 있었던 일이래.”


  무섭지 않아? 그래서 그 뒤로 소각장도 창고도 다 없앴고 지금 그냥 거기 나무들만 있잖아. 진짜 무서워. 여름은 친구가 속닥이며 마친 이야기를 가만히 곱씹었다. 그러게, 무서웠겠다. 자꾸만 그 이야기와 겹쳐서 생각나는 말들이 있었다. 이제껏 뜨거운 여름의 한 가운데에서 우리가 잔뜩 주고받았던 편지 속에 들어있는 연서의 목소리였다.   


「더운 거 진짜 싫지. 나는 무섭기도 해.」

「머리 끝까지 물에 다 담겨서 전부 시원해지면 좋겠다.」

「더워 죽을 것 같아? 나도 그런 것 같아.」 


  이제껏 궁금한 점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연서가 여름의 사물함에는 언제 들르는지, 방학 보충도 하지 않는다면서 어떻게 편지를 사물함에 넣어두는지. 닿을 방법이 편지뿐인 이유는, 연필만 가능한 이유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이유는.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연서는 어딘지 아득한 느낌으로 말을 해왔고, 여름은 그 간격을 감히 좁힐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방학 중을 제외하고는 매일 빠지지 않던 이 편지를 오늘 전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매일 함께하면서도 사실은 함께가 아닌 듯한 이 알 수 없는 위화감에 혼란해져서 편지를 보내지 않으면, 그러면. 

  일렁이는 감정을 꾹꾹 무시한 채 하루를 보냈다. 아직 사물함에 넣지 않은 쪽지는 여전히 여름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흐물해진 입술 껍질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고민했다. 하교 시간이 다가와서야, 가방을 메고 사물함 앞에 도착해서야,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이를 악 물었다. 여기서 갑자기 울 수는 없어. 꼭꼭 지켜온 비밀을 끝까지 지키고파 여름은 눈물을 삼켰다. 

  주머니에 넣어뒀던 쪽지를 꺼냈다. 사물함을 열고 늘 놓던 자리에 올려두었다. 사물함을 닫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결국은 닿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마지막으로 네가 목소리를 낸 거라면, 그렇다면 내가 그걸 들어주는 게 맞는 거잖아. 닿고 싶다면 얼마든지 닿자. 옅은 너여도 나는, 언제든 알아볼 수 있어.  

  그날 밤, 학생들이 모두 돌아간 깊은 밤. 아무도 남지 않은 교실에서 연서는 조용히 여름의 편지를 읽었다. 하루종일 여름의 주머니 속에서 온기를 받아, 여름의 깊은 마음까지 연서에게 닿아왔다. 게다가 추가로 덧붙인 말은 눈물이 흐를 정도로 상냥해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P.S. 많이 무서웠지? 내가 더 들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말해줘. 내가 다 들을게.」


  더 옅어지기 전에, 더 사라지기 전에, 연서는 답장을 두고 교실을 떠났다. 이젠 놓을 수 있었으니까.  


「안녕, 여름아. 

이젠 정말 여름이 다 끝났네. 

사실 나는 오랫동안 여행을 하고 있었어. 

기억에 의지해 추억을 쫓는 여행을. 

길고 긴 여행의 끝에 너와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어. 

사진으로도 간직했으니까, 우리는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공책도 연필도 새로 살 필요 없겠다. 

하지만 나를 최대한 잊지 말아줘. 

언제든 알아볼 수 있을 거라던 네 말을 믿을게. 

나는 덥지 않고 위험하지 않은 곳에 갈 수 있게 됐어. 

언젠가 꼭, 꼭 다시 만나자. 

내 청춘을 접어주어서 고마워. 

고마워, 여름아. 

─여름에게, 연서가」 


  온 힘을 다한 덕분에 평소보다 짙게 쓰여진 연필의 글씨. 그 쪽지는 조용히 사물함 속을 지켰다. 가을 하늘이 서서히 밝아와 하얀 달님의 밤빛을 걷어내고 아침이 올 때까지, 푸르른 하늘 아래 세상이 변함없는 하루를 시작할 때까지. 

  어린 날의 한 자락에 마주친 인연이 앞으로도 계속되길 바랐다. 파아란 추억을 새겨준 어느 여름의 찰나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게.  



____ 다온 writerda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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