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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May 07. 2020

Film

written by 장미




여기 한 사진 가게가 있습니다. 새로 생기는 많은 가게들보다는 조금 낡고, 지저분한 간판이 가게 주인의 자랑인 아주 작은 가게지요. 주인은 가끔 아날로그 필름을 현상하러 온 손님들에게 이 간판을 처음 건 날을 자랑하곤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자신의 젊음이었으니까요. 어쩌면 오늘 이후로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르는 타인이지만 자신의 찬란한 그 날이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웠는지 알아주었으면 하니까요. 주인은 이제 가게의 간판처럼 낡고 지친 사람입니다. 젊음이 사라지고, 세월의 흐름이 지나간 자리가 얼굴에 가득한 그 이는 결혼을 했는지, 아이는 있는지, 혼자 사는지, 다른 이들과 어울려 지내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노인의 눈에는 언제나 쓸쓸함이 가득했고, 미소에는 따스함이 녹아있습니다. 외로운 이라기에는 따뜻함이 있고, 가족이 있는 이라기에는 가게와 주인장 곁에는 싸늘함이 맴돕니다. 그래서 이곳에 찾아온 손님들은 가게 주인이 모두 비밀이 가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가게 주인은 비밀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픔 대신에 찾아온 탐스러운 비밀이 이 가게와 그의 것이지요. 주인은 이곳에서만 특별한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오랜 여행을 마치고 찾아온 이들의 사진을 현상해주는 아주 특별한 일말이에요. 여행을 마치고 자신의 추억을 담은 필름을 가지고 오는 이들은 그저 그런 평범한 손님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주인이 받는 손님은 다릅니다. 자신이 평생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며, 주마등을 한 발, 한 발 직접 밟아보고 발자국을 꾹꾹 찍어본 후에야 오는 손님들은 평범하다고 보기에는 어렵지 않을까요?



** 



“오늘도 오는 이가 아무도 없군. 이제 그만 문을 닫아야겠어.”


노인은 제 오랜 친구와 다름없는 간판을 마른 걸레로 쓱쓱 닦은 후 사다리에서 내려오며 혼자 중얼거렸다. 연인이 떠난 후, 한참을 홀로 지내는 노인의 유일한 친구이자 그날의 증거인 간판은 노인의 가장 큰 보물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렇게 마감 시간이 다가오면 매일 같이 사다리를 꺼내들고 마른 걸레로 뿌옇게 쌓여가는 먼지를 닦았다. 점점 나이가 들고, 허리가 굽어 닦을 수 있는 범위는 좁아졌지만, 아직 제 간판을 직접 닦을 수 있다는 것이 노인의 확실하게 남아있는 작은 행복이 되었다. 언젠가 이 일도 하지 못하게 되겠지만, 그때까지는 힘닿는 데까지는 해볼 참이었다. 사다리를 다 정리한 노인이 반 정도만 깨끗하게 닦인 간판을 바라보았다. 위의 반은 뿌연 먼지 때문에 회색으로 변하고, 아래의 반은 때가 묻은 꾀죄죄한 하얀색이지만 아직 찬란한 그때와 변한 게 없어 보인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고 마지막 인사까지 한 노인은 곧바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차르르륵, 미닫이문이 굳게 닫히고 자물쇠는 집을 지키기 위해 입을 꾹 다문다. 노인은 오늘 저녁에 먹을 식사를 생각하며 작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저기요.”


미닫이문을 쿵쿵 두드리는 불청객이 찾아오기 전까지 말이다. 노인은 제 평화로운 저녁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침음을 흘렸다. 불이 다 꺼진 가게에 우당탕탕 소란이 일었다. 가게 안에 딸린 작은 노인의 방을 시작으로 모든 방의 불이 환하게 켜졌다. 오랜만에 나가서 혼자 즐기려던 식사는 이미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아닌 밤에 불청객이 되어버린 어린 손님은 안에서 일어나는 소음에 발을 뒤로 물렀다. 언제나 찾아와도 된다고 했는데…. 속으로 작게 떠오르는 생각을 꿀꺽 삼키고 가만 기다리자 곧 문이 열리고 노인이 나타났다. 낮에는 쓰고 있던 안경은 어디로 갔는지, 침침한 맨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손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저기요? 손님은 다시 노인을 불러본다. 노인은 아직도 아무 말이 없었다. 저기요? 저기……. 손님이 몇 번이고 노인을 부르자 노인은 손님의 손목을 덥썩 잡고 가게 안으로 끌어당겼다.


“저기, 저기? 할아버지? 아니, 할머니? 아니, 아니, 사장님! 갑자기 이렇게 당기시면 어떡해요?”

“예끼! 어두운 곳은 다 무섭다하더니 이 시간에 여길 왜 와!”


네? 저를 아세요? 멍청한 물음이 터졌다. 노인의 한숨도 함께 푹, 공기 속에 자리를 잡았다. 죽는 것은 어쩌면 모든 것을 한 번에 잃게 된 순간일지도 모른다. 생명을 다한 이는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저가 살아온 삶도, 제 소중한 기억도, 자신이 사랑했던 이들도. 오늘 온 손님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야 자신이 살아온 발자취를 찾기 위해 떠돌다가 이곳에 다시 왔을 것이다. 살아생전에 맑게 웃던 이는 어디로 갔는지, 생기는 찾아보기도 힘들다. 다만 두 눈만이 여행을 다녀온 흥분을 잃지 못하고 반짝이는 생기를 담고 있었다. 오늘 노인을 찾은 손님은 아주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노인이 아주 젊을 적에, 간판이 아직 깨끗한 하얀색을 가지고 있을 때에 노인의 사진 가게를 늘 찾던 손님이었다. 어느 날은 필름을 사기 위해 왔고, 또 어느 날은 필름 속에 사진을 빼곡 채워 가지고 오기도 했다. 노인과 친해진 이후에는 그저 그냥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도 자주 찾던 손님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더니 꽤 오랫동안 여행을 다닌 모양이었다.


“언제든 오셔도 된다고 했잖아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생각나서 들렀어요.”

“다 까먹은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어째 까먹지 않았나보지?”


그러게요. 아무 것도 기억을 못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네요. 잘 지내셨어요? 여상하게 웃는 꼴이 더 약을 오르게 해서 노인은 흥, 콧방귀만 끼고 손님을 자리에 앉혔다. 툭툭, 말을 건네긴 했지만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반가운 것을 숨기기는 어려웠다. 간단하게 따뜻한 유자차를 준비한 노인은 얼른 손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것저것을 묻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여행을 시작했는지, 무엇을 찍어왔는지, 어떤 여행이었는지, 손님이 기억할만한 것들만 물어볼 수 있었지만 생각보다 이야기는 더 풍부하고 즐거웠다.


“눈뜨니까 저도 모르는 곳이었어요. 아마도 계속 아팠었나봐요. 병원이더라구요.”


아, 아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억울했나? 그랬었던 거 같아요. 가야할 시간인 건 아는데 가기 싫더라구요. 그냥, 그냥 여기에서 벗어나면 억울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옛날에 가지고 있던 카메라가 제 머리맡에 있어서 그것도 챙겨서 걸었어요. 더 많은 곳을 가고 싶었고, 더 많은 곳을 보고 싶었는데 그걸 못해서 이렇게 억울한 거 같아서 발이 가는대로 걸었어요. 좀 덜 억울하면 갈 수 있을 거 같아서. 한참 걷고, 또 걷고, 또 걸어도 사진도 찍기 싫고, 억울함이 풀리지도 않았어요. 그제야 발이 멈춰서 보는데 여전히 모르는 곳이고, 억울한 것도 그대로였어요. 내가 원했던 게 이게 아닌가? 다시 그런 생각이 들어서 병원으로 들어갔어요. 어차피 제가 있던 병원이 어딘지는 모르니까 그냥 가까운 병원으로 바로 들어가서 가만 앉아있었어요. 원하는 게 생각날 때까지, 내가 덜 억울할 때까지 있어볼 참이었죠.


“걷는 것도 몇 년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병원에 있던 건 더 오래였어요.”


몇 십 년을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죠. 지나다니는 간호사들, 의사들의 얼굴에 주름이 늘고, 익숙한 얼굴이 새로운 얼굴로 바뀌고, 자주 보이던 환자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어요. 어느 날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하루 종일 생각만 하고, 또 어느 날은 아무 생각도 안 들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봐요, 저는 지금 사장님도 기억 못하는데 사장님은 저를 아시잖아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냥 모르는 채로 보내는데 병원에서 다니는 많은 사람들 중 제가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게, 그게 이제 너무 억울한 거예요. 내가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을 잃어버린 거. 그래서 그 때부터 다시 움직였어요. 그러니까 또 생각이 나긴 나더라구요. 옛날에 내가 살던 우리 집이 생각나고, 우리 가족들 얼굴도 어렴풋이 떠오르고, 뭐 이것저것 떠올라서 그것들을 찍기 시작했어요. 처음에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난 게 신기할 정도로 이것저것 떠올라서 또 몇 년을 신나게 사진을 찍고 다녔죠.

이제 진짜, 진짜 안 억울한가봐요. 사진 현상을 하러 온 거보니. 여행을 끝낼 때도 된 거죠. 사장님이 이렇게 나이가 들 때, 저는 이렇게 여행만 했으니까요.


“오늘 사진 현상하러 왔어요. 부탁드릴게요.”

“……벌써 이리 가려구?”

“‘벌써’라뇨. 저 많이 여행했어요. 더 여행하면 끝도 없어요.”


부탁드릴게요, 사장님. 어느새 따끈했던 유자차는 다 식어버리고, 시간은 훌쩍 지난 뒤였다. 노인은 손님이 조심스럽게 밀어준 카메라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손님이 몇 번 노인을 불렀지만 노인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손때 묻은 카메라에 노인이 지나왔던 그 오랜 세월이 간판처럼 묻어있다. 오래, 오래 만지고 아꼈겠지. 생전에도 그렇게 카메라를 좋아하던 이였으니까. 한참을 보지 못한 반가운 이가 죽은 이후에 한 모든 것은 언제나 어색하기 그지없다. 노인은, 이런 특별한 기적을 겪기 전의 노인은, 누가 보아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이런 기적으로 평범한 이가 할 수 없는 많은 경험을 하고 있지만, 아직 그냥 평범하게 살아 숨쉬고, 점점 죽어가는 인간이었다. 이미 제 시간을 뛰어넘은 이를 볼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오늘을 위해 지금까지 기적을 끌어안고 살아왔을까. 노인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갑작스럽게 죽은 사람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갑자기 볼 수 있게 된 죽은 사람들은 늘 저에게 손때 묻은 카메라를 맡겼다. 현상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매 번 똑같은 말을 하면서 말이다. 노인은 처음 죽은 사람의 카메라를 받아들고, 사진을 현상하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감출 수 없어서 평소보다 더 팔에 힘을 주고 버티고 있어야 했다. 사진을 현상해주어서 너무 고맙다고 인사하는 손님을 보낼 때까지 노인은 그렇게 꾹, 꾹 힘을 주고 있었었다. 손님이 가자마자 까무룩 잠이 들어 꿈이 아닌지 의심을 했었다. 이제야 익숙해서 가끔 오는 손님들이 어색하지 않지만 젊을 적에는 그랬었다.

젊을 적에는 그랬으나 이제야 익숙해서 가끔 오는 손님들이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아는 사람이 오곤 하면 늘 괴로웠다. 이별을 마무리 짓는 사람이 꼭 본인이어야 하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제 손으로 매듭을 짓는 이별은 상상 이상의 고통을 만들어낸다. 나도 아는 장소, 나는 아직까지 잊지 못했던 추억, 내가 자주 가던 단골집을 찍어와 현상하기를 바라는 나를 모르는 사람들, 내가 사랑했고, 사랑하는 사람들. 노인은 그런 이들을 제 손으로 보내야만 했었다.

꽃은, 풀은, 나무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쉬이 생명을 다 하고 떠나기 마련이다. 그들이 떠난 후에 남아있는 이들만 괴로운 것이다. 노인은 아직까지 늘 남아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얼른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암실에 같이 들어가 볼 생각 없는가?”

“암실에요? 어, 그래도 괜찮아요?”

“으응. 오늘 마지막 손님이니 그 정도는 괜찮아.”


당신은 늘 들어가고 싶어 했잖아. 노인은 처음으로 하나뿐인 암실에 손님을 초대했다. 붉은 빛 외에는 한 점의 빛도 허락되지 않는 곳에 손님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어렸을 적, 아마도 이 공간을 궁금해 했던 것 같다. 사진사 외에 아무도 허락하지 않는 곳이니, 어둡기만 한 공간에서 추억을 현상하는 곳이니 꼭 한 번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기억을 모두 잃어버려서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손님은 아마도 그랬을 거라고 믿으며 까만 공간에 들어왔다. 익숙하지 않은 기계들과, 낡은 필름들, 잘못 뽑힌 사진들이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어지럽혀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손님의 눈에 띈 것은 다 말라버려 당장이라도 바스라질 것만 같이 위험한 모습을 하고 있는 꽃병에 꽂힌 꽃다발이었다. 꽃은 언제나 빛을 필요로 하던 존재가 아니던가. 빛으로 삶을 연명하고 이어가는 존재가 이 어두컴컴한 곳에 있으니 그 무엇보다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무슨 색인지 알아볼 수도 없게 변해버린 꽃다발은 형체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지만 노인은 조심스럽게 꽃병의 물을 비우고 새로운 물을 채워 넣었다.

저렇게 물을 주어도 마실 수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당연하게 들었지만, 손님은 노인의 눈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물을 부어주는 이의 눈동자가 더욱 파랗게 물을 머금고 있어서, 눈에 슬픔이나 그리움 따위가 묻어나 보여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꽃이 뭔지 알겠어? 그 눈은 어느새 손님을 향하고 있었다. 꽃을 볼 때보다 더욱 일렁이는 파랑이 손님의 마음을 술렁이게 했다. 꼭, 손님이 알지 못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 이 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떤 꽃인데요? 손님은 조용히 물었다. 배신, 배신의 산물일까. 노인은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손님은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배신이요?”

“잘 모르겠어, 저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몇 십 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해.”

“아…….”

“자네는 알겠는가? 안다면 가기 전에 꼭 알려주게.”


지금부터 현상 시작할 테니 너무 어둡다 싶으면 나가도록 해. 이제 어두운 건 덜 무서워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노인은 퉁명스럽게 이야기하면서도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암백을 꺼내들었다. 평소라면 암실에 모든 불을 끄고 작업을 시작했겠지만, 아무래도 손님이 신경 쓰여 붉은 조명을 끌 수 없었다. 암백에 필름과 릴을 넣고, 릴에 필름을 감기 시작했다. 익숙하게 움직이는 손이 오랜 연륜을 보여주었다. 손님은 검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집중하고 있는 주인의 붉은 얼굴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집중하는 모습이 꼭 언젠가 보았던 모습 같아서 그리운 냄새가 났다. 천에 사람의 피부가 쓱쓱 지나다니는 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조용한 시간이 이어졌다. 금방 끝날 작업임에도 오늘은 누군가가 보고 있어서 조금 더딘 느낌이 들었다. 한 번도 암실에 누군가를 들여 본 적 없는 노인은 오늘이 너무나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괜히 어색한 기분에 눈을 몇 번이고 굴린 노인은 더듬더듬 아무렇게 생각나는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당신, 프리지아의 꽃말은 기억하는가?”

“프리지아요?”

“응. 노오란 꽃인데, 혹시 꽃도 기억 못하는 건 아니겠지?”

“아뇨, 아뇨. 기억해요. 꽃말까지는 잘 모르지만….”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아주 사랑스러운 꽃이지. 누군가의 시작을 응원하는 꽃이니 말이야. 나는 그걸 이 사진 가게가 시작할 때, 그 때 처음 받았어. 한 두, 세 송이 정도를 예쁘게 포장해서 받았지. 그 날 얼마나 기뻤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그 노란 꽃이 어찌나 탐스럽고 어여쁜지, 그 날 꽃을 건네주는 이의 얼굴이 얼마나 다정했는지,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선명히 기억해. 이렇게 늙어서까지 잊지 못할 기억이지.


“사실 그 날부터 나는 그 이를 사랑했을 거야.”


담담하게 시작한 노인의 이야기는 손님의 가슴에 커다란 돌을 얹은 것만 같은 기분을 선사했다. 저와 달리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이 늙은이는 꼭 저보다 더 어린 청년과 같은 기운을 뿜어냈다. 사랑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이 이는 그 어느 때보다 생기 넘치고, 밝아서 아까 눈에 일렁이는 파랑은 이미 새로 떠오른 일출을 반기듯 잠잠하게 가라앉아있었다. 노인은 금방 필름을 릴에 감아 정리하고 암백에서 꺼냈다. 릴이 현상 탱크에 들어간 채로 나와서 필름의 모습은 이제 볼 수 없었지만, 이제 시작인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기대하는 마음이 불쑥 튀어올랐다. 노인은 자연스럽게 작업을 이어나갔고, 그 사이사이에 계속해서 꺼내드는 이야기가 손님에게 파랑을 일으킨다. 사진을 현상하고 있어 설레는 마음과 노인이 주는 파랑과 알 수 없는 또 다른 기분이 손님의 가슴 속에서 쉴 새 없이 섞이고, 요동친다. 이렇게 많은 감상과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또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았다. 손님은 어떤 기분으로 이곳에 자신이 앉아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그 다음 꽃은 무엇이었더라.”

“…….”

“아마…, 그래, 내가 프리지아의 답례로 카메라를 선물한 날이었을 거야.”

“…카메라요? 그 비싼 걸 선물하셨어요?”

“응. 그 당시의 나는 젊고 호기로웠으니까. 그 비싼 카메라를 선물로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어. 나도 모르게 사랑하는 이였으니까.”

“와아, 대단하시네요.”

“그러고 이렇게 말했지. ‘꽃 외에는 아무 답례도 받지 않을 테니 그렇게 아세요!’ 그랬더니 다음 날 문 앞에 처음 보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어. 라그라스였지.”


‘당신의 친절에 감사하다.’ 너무 그 이다운 인사라고 생각했어. 나는 그 때부터 꽃말에 대해 알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지. 그 사람이 주는 메시지를 모두 해석하고 싶었거든. 어렸던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메시지 하나하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 이는 꽃다발을 내게 선물하고, 사진관에는 하나, 둘씩 꽃다발이 걸리기 시작했어. 나는 그 이에게 무얼 해줄까, 가만 고민하다 내가 그날 받은 꽃 한 송이씩 필름에 담기 시작했네. 나는 당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그걸 하나씩 드렸지. 그것을 보고 너무 예쁜 사진이라며 환하게 웃던 그 이의 얼굴도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못할 거야.

꽃다발에는 언제나 안개꽃이 섞여있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어. 나는 현상하고 남은 필름통에는 꼭 말려놓은 안개꽃을 줄기까지 다 잘라낸 후에 꽃송이로 가득 채워놓곤 했지. 가끔 꽃집을 열지 않고 쉬는 날에 여기로 놀러온 그 이는 그것을 몰래 챙겨가곤 했어. 아주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현상탱크에 물을 넣고 이리저리 흔들며 노인은 말을 이어나갔다. 필름에 묻어있던 불순물들이 물에 녹아 하나둘씩 떨어져나간다. 마치 필름에 딱 달라붙어 있던 미련이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물이 흔들리는 소리가 암실에 가득 울린다. 그 위로 쌓이는 노인의 옛 추억은 반짝이는 모래와도 같아서 현상탱크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여행을 하며 누군가를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 사람도 노인처럼 삶을 이어나갈 때 사랑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찬란하고 아름다운 거라 이야기를 해주었던 그 사람도 빛나고 아름다웠지만 노인처럼 묵직한 무언가를 느끼게 하지는 않았다. 그 사람이 모자란 게 아니라 노인의 이야기가 넘칠 것처럼 버거웠다. 손님은 노인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적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울지라도 차라리 그것을 겪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어느 날은 팬지였고, 또 어느 날은 장미였지. 정말 끝도 없이 많은 선물을 받았어.”

“…….”

“그렇지만 마음이 가장 울렁였던 꽃은….”


안개꽃으로만 가득한 꽃다발이었어. 그때까지 나는 안개꽃은 꽃을 빛내기 위해 섞이는 들러리 같은 꽃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는데도 말이야. 늘 예쁜 꽃들을 빛내기 위해 주변에서 머무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안개꽃도 그저 다른 꽃과 다를 바가 없는 한 송이의 꽃이었는데. 그 이는 그런 나를 혼내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그냥 기쁘게 할 생각이었는지 안개꽃으로만 가득한 꽃다발을 선물했어. 처음으로 꽃의 꽃말은 생각하지 않은 선물이었지. 내가 좋아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만들어준 그 이가 너무 사랑스러웠고, 이렇게 예쁜 꽃을 들러리라고만 생각한 내가 어리석다는 생각을 했어. 그 이는 그 꽃다발을 가지고 와 평생을 약속해주었어. 함께 인생의 끝까지 걸어 가보고 싶다고 말이야.


“그 흔한 반지도, 정성을 담은 편지도 없었는데 그게 뭐라고 모든 걸 다 받은 기분이었을까.”


현상탱크에는 쉼 없이 액체가 들어찬다. 물이 들어차고 난 뒤에는 현상을 하기 위한 현상액이 들어찼고, 현상액이 빠지자마자 현상을 정지시켜주는 액체가 들어차고, 또 금방 정착액이 들어찬다. 꼭 손님의 가슴에 파도가 들어차고, 빠지는 것과 같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데 노인이 이야기한 모든 일을 직접 본 것만 같다. 기억 어느 한 곳에 그것들이 가득 담겨있을 것 같다. 노인이 너무 자세히 이야기를 해준 탓일까? 울렁이는 가슴을 꾹, 꾹 누르며 손님은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현상하지 말 걸. 그냥 카메라만 가지고 갈 걸. 어리석은 생각도 해본다. 지금 이 순간이 신기하고 벅차오르면서도 너무나도 괴로워서 말이다. 금방 마지막 작업을 마친 노인이 암실에 불을 켰다. 붉은 빛 대신 하얗게 차오르는 빛이 어둠에 익숙한 눈을 괴롭게 만들었다. 눈을 양껏 찌푸린 손님은 빛에 적응하기 위해 한참 눈을 깜박여야 했다.


“그거 아는가? 나는 그 이와 헤어지자마자 죽은 이들을 보았어.”

“네?”

“여행을 마친 사람들을 보기 시작했지. 필름에 추억을 잔뜩 쌓아온 사람들이 나를 찾기 시작했어.”


죽어서도 그것들을 가지고 가고 싶으니 말이야. 나는 그 때부터 이 일을 해왔네. 나만 만지고 다룰 수 있는 필름을 현상하고 사진을 만들어주었어. 처음에는 부들부들 손이 떨릴 정도로 겁을 먹었는데 이제는 자네에게 내 어린 추억을 이야기할 만큼 능숙해졌군. 시간이 참 빨라. 어릴 때에는 하루하루가 참 느리다고 생각했는데 하루가 다 모이니 벌써 이렇게 나이가 들어버렸지 뭔가. 어쩌면 이제 곧 가게를 접어야 할 날이 다가올지도 모르겠어.

쏴아아아.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이 필름을 흠뻑 적시고 지나간다. 탱크 속에서 꺼내진 필름은 곧바로 물에 씻겨진다. 방금 전까지 필름에 추억을 붙이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액체들이 속절없이 쓸려 내려간다. 추억을 남기기까지 고민하고 걸었던 날들이 마치 사라지고 없어진 기분이 들었다. 금방 다 씻어낸 필름들이 건조를 위해 집게에 집혀 대롱대롱 매달려졌다. 에구구구. 노인은 그제야 구부러진 허리를 세웠다. 늙으니 다 펴지지도 않는 허리가 언제나 말썽이었다.


“필름이 다 마르려면 조금 걸리니 잠깐 나가도록 하지.”

“아, 네.”

“그동안 사진이라도 찍는 게 어떤가?”

“사진이요?”


증명사진이라도 찍어둬. 어쩌면 천국에 들어갈 때에도 증명사진 하나 내야 할지 모르는 거 아닌가. 하나 있어도 나쁠 것 없지. 노인은 그렇게 말하곤, 곧바로 촬영을 위해 꾸며놓은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은 어색하게 가게 안에 걸려 있는 거울을 보고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죽은 것을 깨달은 이후로 한 번도 자신을 찍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손님이 가져온 카메라에 금방 필름을 넣은 노인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촬영 준비를 마쳤다. 하얀 배경 앞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손님이 자리를 잡았다.


“너무 굳어있지 말고, 활짝 웃게. 천국에 가려면 인상이라도 좋아보여야지.”


사실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는 관심도 없었다. 그냥 오랜만에 보는 이의 사진이 하나쯤은 남았으면 해서, 그리고 죽은 이들에게 늘 해왔던 일이라서 노인은 사진 찍을 준비를 했다. 마지막에 자신이 어떤 얼굴인지 기억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몇 년 전부터 노인은 이렇게 필름을 건조하는 동안 손님들의 마지막 사진까지 찍어주기 시작했다. 조명을 켜고, 스튜디오에 손님들을 앉히면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흐릿하게 보였지만, 사진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확실하게 남았다. 오늘 온 손님은 특별하게 꽃다발도 쥐여 주었다. 노인이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던 안개꽃 사이에 보랏빛의 아네모네가 탐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암실에서 보았던 다 죽어가던 아네모네와는 확연히 다르게 생기 넘치고 어여쁜 모습이었다.


“암실에 봤던 꽃과 같은 꽃이네요.”

“아아, 응. 그 어두운 데서 그것도 보았어?”

“네. 굉장히 오래 가지고 계신 꽃다발 같아 보였어요.”

“그 이가 마지막으로 준 것이라 그래.”


나는 속절없이 빠져드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배신이었지. 노인은 렌즈 너머로 손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님은 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아까까지도 기억 속에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었는데, 렌즈 너머로 노인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꼭 이랬던 적이 있는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쩐지 이런 적이 있었던 거 같아요. 찰칵, 찰칵, 필름에 사진이 각인되는 소리 사이로 손님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노인은 굳이 손님의 말에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사진 찍기에 집중을 할 뿐이었다.


“왜, 왜 배신이에요?”

“그 이는 그 꽃을 마지막으로 사라졌거든.”


배신이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치졸한 사람으로 보일 것 같지만 어쩌겠어. 그 때의 그리움과 배신감은 죄 없는 꽃의 말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게 했지. 몇 날 며칠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무너지는 마음을 어찌할 줄 모를 때 그 꽃이 얼마나 미웠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꽃을 해치지는 못해서 남은 그것이라도 너무 소중해서, 암실에 있는 꽃은 거기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야. 언젠가 올 그 사람을 기다리며.


“그래서 그 분은 오셨나요…?”

“…….”

“…안 오셨어요?”

“어찌 말해야 할까, 왔다고 해야 하나, 아니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갈 거면 건강했어야지. 아프지는 말지. 노인은 손님에게 못할 말을 꿀꺽, 꿀꺽 삼켰다. 뜨거운 조명에 손도 따뜻하게 데워진 줄 알았는데 어느새 차갑게 식어있었다. 둘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 나버렸다. 노인은 손님에게 쥐여 준 아네모네를 보며 치졸한 제 마음을 비웃었다. 아무리 그리웠어도 어떻게 저 꽃을 다시 저 이에게 쥐어줄 수 있을까. 울컥 올라오는 원망을 다 내뱉고 싶었다. 사실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너무 벅차올라서 마지막으로 본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다시 그 꽃다발을 들고 있으면 그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그럼에도 배신이라고 이야기하는 저 자신이 너무 멍청하고 추악해서 노인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원래는 그런 마음이었다.

잠시 다녀오지. 이번에는 노인 혼자 암실에 들어갔다. 붉은 조명 외에 한 점의 빛도 허락하지 않는 공간에 노인은 홀로 앉아있었다. 새로 카메라에 자리 잡은 필름에는 손님의 얼굴이 가득이다. 이것도 같이 현상을 해야 하는데 어쩐지 손이 가지 않았다. 인화기에 필름을 고정시키고 확대경에 시선을 고정한 노인은 곧바로 생각을 지우고 사진을 현상하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준비해둔 인화지에 상을 맞추고 노광을 시작했다. 인화지는 일정한 시간에 맞춰 빛을 쬐고 금방 현상액에 몸을 담근다. 추억이 불에 타오르는 것처럼 붉은 조명 아래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물에 잠깐 몸을 뉘인 인화지는 마지막으로 픽서 속에서 추억을 고정한다. 주마등은 여러 사진 속으로 자리 잡았다. 노인은 처음으로 모든 작업을 끝내고 허탈한 기분을 느꼈다. 사진 현상이 끝났다는 건 이제 이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뜻이었다.

하기 싫은 마음을 겨우 누르고, 방금 찍어둔 필름들도 현상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제 사랑 이야기를 전하던 아까와는 다르게 암실은 적막으로 가득했다. 바깥의 손님이 신경 쓰였지만 얼굴을 볼 자신은 없었다. 금방 일을 끝마치고 건조를 위해 필름을 걸어놓은 노인이 바깥으로 나오자 손님이 웃는 얼굴로 반겨주었다. 그 얼굴이 이제 마지막이라서 마주 웃어주기 힘들었다.


“제가 사장님이 작업하시는 동안 생각을 해봤는데요.”

“으응?”

“배신은 아닌 거 같아요.”

“어?”

“그렇게 사랑했으니까, 아네모네는 절대 배신이 아니었을 거예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사장님처럼 속절없이 사랑에 빠져들었다고 고백하는 거였을 거예요.”


그냥, 그냥 만약 그 분이 저라면 그랬을 것 같아요. 가슴에 뜨거운 것이 밀려들었다. 노인의 눈에서 툭, 툭 눈물이 떨어졌다. 오랜 삶의 흔적 사이사이로 눈물이 파고들고, 가슴 속을 뒤흔들었다. 손님은 갑자기 우는 노인을 보고 놀란 듯했지만, 한 평생의 응어리가 녹아내려간 노인은 그것을 신경 쓰기 힘들 만큼 이미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사실 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이가 말하는 것은 배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곁에 없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한 평생 그렇게 믿는 척 해왔다. 그 이가 그 꽃을 주는 것은 나를 배신하겠다는 이야기야. 나를 떠나겠다는 이야기야. 늙은이가 말도 안 되는 것을 꾹꾹 고집해오는 게 얼마나 추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당장 모든 것을 내려놓고 뛰쳐나갈 것만 같았었다.


“왜, 왜 그렇게 우세요? 울지 마세요. 저 어떻게 가라고 그러세요.”

“너무, 너무 기뻐서 그래. 너무 기쁘고, 이제 다시 볼 일이 없는 게 아쉬워서 그래.”

“…….”

“당신 보내고 나면 이제 어찌 살까 싶어.”


곧 동이 튼다. 오늘 온 손님이 떠날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그친 노인은 붉은 눈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 손님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다시 암실에 들어가서 오늘 찍은 사진을 현상하면 곧바로 이별이었다. 마무리를 짓고 싶지 않은데 꼭 챙겨갔으면 하는 마음에 노인은 다시 암실에 들어갔다. 손님은 이번에도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노인을 기다리기로 했다. 심혈을 기울여 마지막까지 사진을 현상한 노인은 사진 크기에 맞는 하얀 봉투에 사진과 필름을 깔끔히 정리해 넣었다. 손님에게 이것을 전해주면 이제 끝이다.


“저 이제 가보겠습니다.”

“조심해서 가. 갈 때 지치면 쉬었다 가는 거 잊지 말고.”

“네, 오늘 밤 내내 너무 감사했어요.”


내가 더 고맙지. 당신이 이리 와주었으니. 노인은 주름이 빼곡 채워진 손으로 손님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손님은 그리움으로 가득 찬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노인을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잘 지내시고, 건강하세요. 마지막 인사를 뒤로 하고 손님은 사진 가게를 떠났다. 문 앞까지 배웅하고 들어온 노인은 허전한 공간을 보고 다시 울음을 삼켜야만 했다. 이제 정말 이별이었다. 그 이는 저를 기억하지 못한 채 그렇게 가버렸다. 손님이 앉았던 그 자리에 주저앉은 노인이 엉엉,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터뜨렸다. 한 평생을 원망하고 살았는데, 아프게 떠난 그 이가 밉고, 한참을 기다리게 해놓고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가버린 그 이가 밉다. 차라리 아프지 말지, 차라리 아프지 말지. 노인은 계속 그 말만 반복하며 울었다. 소파 앞에 있는 테이블에는 아직까지 손님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다 마시고 껍질만 남아버린 유자차가 든 머그컵도, 손님이 이제 더는 필요치 않아 두고 간 카메라도, 손님의 추억 하나하나가 담겼던 필름통도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노인이 마지막으로 손님에게 쥐여 주었던 아네모네 꽃다발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보랏빛의 아네모네는 누가 마법을 부렸는지 빨갛게 변해있었다. 노인은 그 꽃의 꽃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반쯤 열린 필름통에는 안개꽃송이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노인은 붉은 아네모네를 가만 바라보다 손님의 카메라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마지막으로 찍는 꽃다발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당신을 떠나보내리라. 나 죽는 날까지, 내가 여행을 마치고 그대의 품에 가는 그 날까지.


그 날의 꽃은 사진 속에 아름답게 남았다.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선명하게 말이다.



____ 장미 therosenove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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