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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May 07. 2020

찬란(燦爛)

written by 장미

※ WARNING :  이 글은 아동 학대 및 자살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이에 관한 트라우마를 가지신 분은 글을 읽을 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어렸을 때에는 내 처지를 이해하지 못해서 엄마의 손을 잡고 물은 적이 있었다. 엄마,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해? 엄마는 아주 따스한 손으로 내 차가운 손을 꽉 잡으며 속삭였다. 찬란이가 행복하면 너도 행복한 거야, 찬란아. 우리 찬란이는 착하니까 양보를 잘 하잖아. 그렇지? 엄마가 다정히 속삭여주는 목소리가 따스해서 그랬을까,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엄마의 따뜻한 모습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서 그랬을까, 나는 그 말에 언제나 고개를 가만 끄덕였다. 그렇게 끄덕이면 엄마는 더 환하게 웃곤 했으니까. 응, 찬란이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 엄마. 그 말을 해주면 엄마는 더욱 더 기뻐했다.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미소를 보고 나면 나도 너무 행복해져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어도 그것이 진실 같았다. 그렇게 얘기하는 내 얼굴을 보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이상하고 잔인한 이야기를 하며 마주 웃는 제 자식의 얼굴이 사랑스러웠을까? 혐오스러웠을까? 나는 이제야 엄마가 했던 이야기들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 대답을 알지 못한다. 그 때 너무 이상했어.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기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렸을 때부터 길들여져 온 머리는 바른 사고를 잘 하지 못한다. 나는 그림자인 게 익숙해서,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게 당연해서 잠깐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넘기면 끝이었다. 나만 입을 닫으면 모든 것은 정상과도 같았다.


“찬란이는 공부를 잘 하네. 크면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될 거야.”

“찬란이는 운동도 잘 하네? 아주 못하는 게 없어. 대단해, 정말.”

“찬란이는 뭐든 열심히 하는구나. 잘 쉬고 있는 거지?”


엄마는 어릴 때 하고 싶은 것을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집에는 돈이 없었고, 머리는 그리 좋지 않은 편이라서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최고는커녕 꼬리를 겨우 붙잡고 버티는 것도 힘들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곤 했다. 그래서 우리를 이렇게 낳았다고 했다. 혼자면, 바보 같은 찬란이 하나면 엄마와 다를 바가 없으니까 둘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쌍둥이로 태어난 나와 찬란이는 태어난 날에 누가 먼저 엄마와 눈을 맞추었는가에 더 나은 인생이 결정되었다. 나보다 더 눈을 먼저 맞춘 찬란이는 빛, 그 뒤에 사는 나는 그림자와 같은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나는 인생이 없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냥 찬란이와 아주 똑같이 생겼고, 엄마가 바깥에서 나를 잘못 부르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찬란이다. 가짜 찬란이. 가짜 문찬란. 엄마는 먼저 눈이 마주친 찬란이만 출생신고를 했고,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살 수 있는 것도 진짜 문찬란 뿐이다. 가짜 문찬란이 하는 일은 찬란이 하지 못하는 일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대신해서 필요할 때만 잠깐 진짜 찬란이인 척 하는 일이다.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나를 교육시켰다. 손님이 올 때 숨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방을 주었고, 찬란이가 못하는 것들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빼곡한 책장을 놔주었다. 찬란이가 못하는 운동도 대신 잘해야 했기 때문에 밤에 운동 연습을 하고, 낮에 자는 것도 자주 있던 일이었다. 내가 듣는 칭찬은 모두 찬란이를 향한 칭찬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노력을 하고, 또 해도 내가 들을 수 있는 칭찬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너무도 당연하게 해온 일이어서 이렇게 살아온 게 잘못된 인생인지 알지 못했다. 진짜 찬란이도, 엄마도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행동해서 나도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얼마 전까지, 그 애를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너는 이름이 뭐야? 찬란이 아니잖아. 그치?”


휘경이는 찬란이 반에 새로 전학을 온 친구였다. 휘경이 전학을 온 날 진짜 찬란이가 내 손을 잡고 아주 좋은 친구라고 조잘조잘 떠드는 것을 나는 분명히 기억했다. 잊어버리지 말아야지. 새 친구를 알아보지 못하면 엄마한테 크게 혼이 날 거야. 몇 번을 되새김질 하며 기억을 해두어도 찬란이를 대신해서 학교에 갈 일이 없어서 금방 잊고 말았는데, 교실에서 나를 보자마자 하는 말에 기절을 할 뻔했다. 그 오랜 시간동안 가짜와 진짜를 구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 둘은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닮았기도 했고, 엄마가 나랑 찬란이가 혹시라도 다른 점을 보일까봐 내 습관도 찬란이를 보고 배워 익히도록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찬란이는 엄마가 보는 앞에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나에게 이야기 해주는 시간을 가졌고, 나는 그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오랜 세월을 한 사람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작은 오차도 없이 손발이 잘 맞는 편이었다. 휘경이 절대 알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굳건히 믿을 만큼 말이다. 그렇지만 오늘 처음 나에게 인사를 하는 휘경이는 금방 내가 찬란이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엄마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찬란이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해준 적이 없어서 나는 그의 말에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쳐다만 보았다.

내 존재를 알아차려줘서 기쁜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그 마음을 내비추기에는 당장 집에 가서 엄마에게 혼날 미래가 더 무서웠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엄마가 얼마만큼 화를 낼지, 얼마만큼 혼이 날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엄마가 며칠을 무시하면 어떡하지. 작은 방에 나를 가둬두고 못 나오게 하면 어떡하지. 몇 번 당한 적 있는 체벌은 다 무서운 것이어서 덜컥 겁부터 났다. 휘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가만 바라보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지만 나는 그것을 신경 쓸 틈도 없었다. 엄마한테 말하지 말까? 휘경이 알아봤다는 걸 찬란이가 모르면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닐까? 휘경이한테 부탁하면 들어줄까? 내가 혼자 수습하지 못할 일을 혼자 수습하려니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왜 체육 선생님은 찬란이가 못하는 어려운 줄넘기로 평가를 하겠다고 한 거지? 왜 오늘 줄넘기 시험이랑 수학 쪽지 시험이 같이 있는 거지? 찬란이는 왜 이걸 다 못하지? 내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면 무서운 벌을 받을 거 같아서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원망해보았다. 그럼에도 기분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고 불안함만 더 커져갔다. 너무, 너무 무서웠다.


“찬란아. 일단 진정하고, 이제 수업시간이니까 점심시간에 이야기하자. 나 지금 너한테 궁금한 게 너무 많아.”


휘경이는 내 등을 다정히 쓸어주면서 찬란이 자리에 나를 앉혔다. 다정하고 따스한 목소리가 엄마의 목소리와 조금 닮아 보여서 나도 모르게 금방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휘경이 말대로 수업 종은 이미 울렸었는지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선생님이 들어와서 아직 일어나 있는 친구들을 진정시켰다. 나도 선생님의 말씀에 진정하고 있는 아이들처럼 차분하게 진정을 해보려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린 이성이 잔뜩 달아올라 있는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었다. 겁이 나서 너무 흥분해버렸다. 점심시간에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면 괜찮을 거다. 찬란이가 휘경이는 좋은 친구라고 말해주었으니까 찬란이의 좋은 친구는 분명 내 말도 들어줄 것이다. 확신이 없는 말을 되새기며 나는 억지로 수업에 생각을 돌렸다.



“너는 누구야?”


금방 식판을 비운 휘경이는 밥을 다 먹지 못한 나를 이끌어 학교 뒤뜰로 데려왔다. 찬란이가 먹는 속도에 맞춰 느릿느릿하게 밥을 먹는 게 습관이 된 나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입맛이 하나도 없어서 미련 없이 식판을 비운 나는 휘경이를 따라가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정리하기 바빴다. 나는 찬란이가 맞고, 네가 찬란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내가 찬란이 맞는 건 사실이야. 의심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해도 믿지 않으면 솔직하게 말하고 무릎을 꿇고 빌어야지. 제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줘. 심지어 진짜 찬란이한테도 말이야. 옷을 잡고 매달리면 너무 불쌍해서 봐줄지도 모르잖아.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해보면서 말이다. 소각장이 있는 학교 뒤뜰은 경비원 아저씨도 자리를 비워서인지 조용하고 한적했다. 아무도 없는 너른 공터에 휘경이와 나 둘 밖에 없었다. 휘경이는 뒤뜰에 와 놓고도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나는 긴장된 마음을 꾹꾹 누르며 휘경이 하는 말을 가만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냈다간 실수를 할 게 분명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닮았네.”

“어, 응?”

“너랑 찬란이 말이야. 찬란이 대신 올 정도면 당연히 닮았겠지만 여기서 보니까 교실에서보다 더 닮은 거 같아서.”

“아니, 난 그게 아니라….”

“너는 이름이 뭐야? 찬란이 동생이야? 동생이라서 대신 와준 거야? 너는 학교 안 가?”


이름이 뭐야? 그 말은 너무나도 쉽게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단번에 바닥 친 기분은 아주 깊은 어둠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새까만 손이 내 발목을 잡고 나를 지옥으로 이끈다. 이름, 사람은 이름이 없으면 안 되는 걸까? 이름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걸까? 태어날 때부터 이름을 가져본 적도 없었고, 누군가가 내 진짜 이름을 물은 적도 없어서 이런 기분이 들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쉽게 나락에 빠져버릴 줄 몰랐다. 무슨 말이야? 나는 문찬란인데, 나는…, 문찬란이야. 준비했던 말은 이미 목구멍 밑으로 꺼져버렸다. 휘경이 내 이름을 물어서인지, 나라는 존재를 분명하게 구분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문찬란이란 이름은 다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내 것이 아니란 게 너무 여실히 느껴졌으니까.


“나, 나는, 나, 나, 아니, 나….”

“음, 조금만 진정하고 얘기하는 게 어떨까? 들킨 적이 없어서 그래? 미안해. 네가 이렇게 당황할 줄은 몰랐어.”


네가 찬란이와 참 재미있는 장난을 친다고 생각해서 쉽게 물었던 거야. 너에게 실례가 될 말을 물은 거였다면 미안해. 재미있는 장난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당황하지 않고 쉽게 말할 수 있을 텐데. ‘오늘 찬란이가 몸이 안 좋아서, 찬란이한테 이야기하고 내가 엄마 몰래 여기에 와봤어. 아무도 모르는데 네가 알아봐서 신기해.’ 이렇게 말이야. 그게 아니라면 ‘휘경이 너 장난이 심하잖아. 나는 문찬란인데 내가 문찬란이 아니면 누구란 거야.’라고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고 재미없는 인생이라서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가라앉아버린다. 나를 알아봐서 기쁜 것 같다고 생각한 아주 조그만 마음조차 저 심연 아래로 가라앉아 모습을 감춘다. 너무, 너무 무서워. 이제 더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될까? 마음속으로 휘경이에게 빌었다. 더 이상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섭다. 나는 빛에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지금처럼 쥐 죽은 듯이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 행복할 거다. 찬란이의 행복은, 성공은, 찬란한 인생은 모두 나의 행복과도 같으니까.


“…찬란이야. 나, 나 찬란이 맞아.”

“응?”

“찬란이…. 문찬란이야. 나, 문찬란.”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추지 못하고 잔뜩 불안한 얼굴로 말을 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이렇게 말하면 그 누구도 믿지 않을 텐데. 거짓말하는 내가 뻔히 보일 텐데. 이것보다 더 분명히 말하기 어려웠다. 이것보다 더 또렷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단정한 목소리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냥 휘경이 더 이상 묻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말을 끝마치고 눈을 꼭 닫았을 때에 내 작은 방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고, 나만이 나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그 작은 방. 가끔 찬란이 문 밖에서 나를 불러내며 내 방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리곤 했지만, 엄마는 작은 방이 더럽고 초라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 무엇보다 내게 가장 편안함을 선사하는 그곳이 생각났다. 거기에 숨어서 귀를 막고 싶었다. 휘경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고 싶지 않아서. 나를 비웃고, 낮잡아 볼 것 같아서.


“아, 음, 그래. 찬란아. 내가 미안해.”

“…….”

“네가 잘못 봤나봐. 기분 나빴다면 정말로 미안해.”


많이 당황한 게 분명하지만 나를 비웃거나 낮잡아보지 않는 차분하고 다정한 음성. 분명히 진실을 알고 있지만 부드럽게 넘어가주는 휘경이의 말이 파도처럼 내 마음을 휩쓸고 지나갔다. 꼭, 찬란이의 행복이 내 행복이라고 속삭여주던 엄마의 따스한 얼굴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않는 다정이 나를 흠뻑 적시는 기분. 따뜻한 빛이 내 몸 위로 쉴 새 없이 내리는 비 같이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 …어쩌면 누군가에게 구원받는 기분. 형용할 수 없는 황금색의 무언가가 내 몸 구석구석을 휩쓸고 지나간다. 가라앉은 기분이 두둥실 떠올라서 볼이 발갛게 물든다. 나와 함께 해도 찬란이에게 가던 친절이, 오늘만은 나에게 직접 다가와 마주한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기뻐서 조심스럽게 사과하는 친구의 앞에서 큰 소리로 아무렇게나 웃어버렸다. 찬란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나를 찬란이라고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누군지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서, 걱정했던 것이 사라졌음에도 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라서 나도 모르게 나를 내보였다. 가짜 찬란이 말고, 이름도 없이 아무도 모르는 인생을 살아가는 나를 말이다.

처음 나를 타인에게 내보이는 느낌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개운하고 통쾌해서 내 기분은 정말로 걷잡을 수 없이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마 그것이 눈으로 보였다면 구름 너머로 사라지는 것도 직접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잔뜩 풀이 죽어 있던 내가 금방 기운을 되찾고 방긋 웃는 게 웃겼는지 휘경이도 나를 따라 허허, 웃기 시작했다. 나는 이날부터 나와 휘경이의 아주 크고도 작은 비밀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



생각보다 내가 찬란이를 대신해서 학교에 갈 일이 잦았다. 그 날 이후로 혹시 휘경이 찬란이에게 솔직히 이야기했을까봐 겁이 났는데 찬란이가 학교에 갔다 오고 난 후 반응을 보니 그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엄마도, 찬란이도 모를 비밀이 생겼다는 사실은 한동안 내 기분을 계속 들뜨게 만들었다. 한 사람으로서 인생이 단 한 번도 없어서 그랬을까. 나는 처음으로 나로 존재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 전까지는 찬란이를 대신해서 학교에 가면 늘 긴장되고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그런 기분이 덜 했다. 찬란아. 나를 부르지 않지만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가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엄마한테도, 찬란이한테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나는 휘경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었다. 혹시 실수라도 할까봐 엄마는 내가 학교에 가는 날은 무조건 데리러 오시곤 했다. 그래서 찬란이의 친구들과 사적으로 만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오늘 아무도 몰래 휘경이를 만나게 되기 전까지는!


“어, 왔어?”

“응, 안녕. 휘경아.”


바깥에서 돌아다니면 엄마나 찬란이를 아는 사람들한테 연락이 올 수도 있으니 휘경이가 살고 있는 빌라 옥상으로 올라왔다. 엄마랑 찬란이는 모두 외출을 해서 두 사람이 귀가하기 전까지 들어가면 아무 일도 없겠지만, 우리 집 근처에 있는 휘경이 집까지 오는 그 짧은 길에도 큰 일이 날까 싶어서 온몸과 얼굴을 꽁꽁 싸맸다. 답답할 수밖에 없는 차림이었는데도 이상하게 개운하고 시원했다. 꼭 누군가의 손 안에서 벗어난 기분. 나 혼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휘경이를 알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많은 기분이 나를 스쳐지나갔다. 빌라에 도착하자마자 단숨에 옥상으로 올라가서 문을 잡아당기자 휘경이 곧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탁 트인 빌라 옥상 위는 무척 시원해서 마음에 들었다. 휘경이 집에 있는 것을 가져왔는지 그리 크지 않은 텐트가 옥상 정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를 이끌고 텐트로 들어온 휘경은 저가 집에서 가져온 것들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잘 보던 만화책, 요새 인기가 많은 게임기, 찬란이 좋아해서 저도 자주 먹었던 과자 봉지들이 작은 텐트 안을 빼곡 채우고 있었다.

우리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거기에서 시간을 보냈다. 둘이 각자 만화책을 읽으며 아무 말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내가 게임기를 잡고 휘경이가 옆에서 도와주어서 처음 해보는 게임을 정신없이 하기도 했으며, 과자를 배부를 때까지 정신없이 먹기도 했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평범한 휴식시간은 바람처럼 시원하고 달디 달았다. 이 시간이 더 가지 않고 멈췄으면 할 정도로 말이다.


“찬란아. 나 이제 좀 물어보고 싶어.”

“응? 뭘?”

“네 이름. 문찬란 말고 네 이름.”


이제 휘경이 이름을 물어도 불안하지 않았다. 찬란이나 엄마에게 말하지 않을 거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그럼에도 대답을 할 수 없는 건, 나는 찬란이 아니었지만 찬란이었기 때문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찬란이의 그림자가 될 운명이어서 엄마는 내게 이름 같은 것은 주지 않았다. 이름이 있어봤자 불러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엄마가 내 이름 때문에 밖에서 헷갈리면 안 되니까. 나는 이름 없는 가짜 찬란이었다. 빛나는, 찬란한 인생을 살라고 찬란이에게 붙여진 이름은 나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야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욕심이 났다. 휘경이에게 똑바로 말할 수 있는 이름이 갖고 싶다. 찬란이나 휘경이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예쁜 이름. 나는 언젠가 찬란이 내게 해주었던 말을 기억한다. 휘경이도 이름에 들어가는 한자가 다 빛이 뜻인 한자래. 나처럼 말이야. 너무 예쁘지 않아? 나도 빛이 뜻인 예쁜 이름을 가지고 싶다. 나도 내 인생이 있으면 좋겠다. 당당하게 휘경이와 친구를 하고, 나 자신을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인생을 가지고 싶다. 한 번 나를 드러내기 시작하니 욕심이 치민다. 꾸역꾸역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다. 찬란이의 행복이 네 행복이야. 엄마의 말을 아무리 되새기고 다시 떠올려도 욕심은 차오른다. 나도 빛이면 좋겠다.


“이름이, …없어.”

“뭐?”

“엄마가 이름 같은 건 안 지어줬어.”

“…….”

“나는 찬란이 대신 살아가는 가짜 찬란이거든.”


그래서 이름 같은 건 필요 없나봐. 엄마는 밖이 아니면 내 이름을 부를 일이 없으니까, 나는 밖에서는 늘 찬란이니까 이름은 필요 없다고 했어. 그런 거 없어도 예쁜 엄마 자식이니까 괜찮다고 했어.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이름이 없어. 너한테 얘기해주고 싶어도 나는 그냥 찬란이야. 문찬란. 가짜 문찬란. 휘경이 모든 얘기를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이 잘 가지 않지만 어쩐지 다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 모두 털어놓았다. 휘경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토해내고 후련해진 나는 우스꽝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울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는데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아마도 이렇게 살아온 내가 스스로 너무 불쌍하다고 느껴져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당장 울고 있는 나는 웃으면서 우는 내가 너무 우습고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만든 자국이 시야에 들어오자 더 눈물이 나서 계속 웃으며 울었다.


“야, 야. 왜 그렇게 울고 그래? 울 거면 그냥 울어. 웃지 말고.”

“…….”

“너 웃는 게 더 안쓰러워. 내가 이름 지어줄게. 엄마가 못 지어준 이름 내가 지어줄 테니까 그냥 마음 편하게 울어.”


엄마는 언제나 사람을 구원으로 삼지 말라고 찬란이에게 말했다. 본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잔뜩 술에 취하면 찬란이를 끌어안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인간을 구원으로 삼지 마렴. 너는 혼자 네 인생을 살아가렴. 네 뒤는 엄마가 만들어줄게. 네 그림자는 엄마가 만들어줄게. 엄마의 구원은 엄마를 버렸다. 아빠는 엄마를 버렸다. 세상을 혼자 살아가던 엄마에게 아빠는 한 줄기의 빛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아빠는 너무나도 손쉽게 엄마를 버려서 엄마는 엄마의 인생이 실패라고 말했다. 엄마의 새로운 구원은 찬란이다. 그래서 엄마는 새로운 구원을 붙잡아두기 위해 기꺼이 나를 뒤에 세웠다. 너는 빛나는 삶을 살아야지. 엄마가 밝게 빛나는 너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게 말이야. 엄마의 찬란은 밝게 빛날수록 나는 점점 어두워지는데 구원은 찬란이 혼자라 엄마는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걸 바라보며 나는 작은 방에서 늘 다짐했다. 찬란이가 사람을 구원으로 삼더라도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엄마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하지 말아야지.

그랬는데, 그렇게 살아왔는데 휘경이는 내 모든 걸 쉽게 흔들어 버린다. 편하게 울라는 말도, 내게 이름을 준다는 말도 아무도 해주지 않던 말이라 그런지 더욱 커다란 안정으로 다가온다. 이름이 꼭 필요한 걸까. 잠깐이나마 그렇게 생각했던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이름을 받고 싶다는 욕심으로 그득그득 차있는 새까만 인간이 이상하게 웃으면서 울고 있다. 처음 나를 알아본 것만으로도 구원이 되어버렸는데 이제야 깨달아 버린 것이다. 되돌릴 수도 없게 말이다. 이전까지 살아온 삶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나로 존재하고 싶다는 마음이 풍선처럼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오늘은 아주 큰 변화의 시발점이 될 것이 분명했다. 변화가 나에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아주 작은 텐트에서 푹 쉬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



그 날 이후 처음으로 내가 찬란이를 대신해서 학교에 간 날, 휘경이는 꼬깃꼬깃 접어놓은 쪽지를 내게 쥐어주었다. 빛을 뜻하는 한자가 가득 적힌 쪽지였다. 예쁜 음의 한자는 이미 휘경이의 이름과 찬란이 이름에 다 들어간 것 같아서 새로 이름을 짓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말해놓고 예쁜 이름을 지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휘경이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 묻어났지만 나는 쪽지를 받은 순간부터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름을 꼭 가져야할 거 같았는데 내 이름이 될 수도 있었던 한자들을 받고 나니 그것만으로도 배가 부른 것처럼 만족스러웠다. 쪽지는 내 옷 주머니 가장 안쪽에 자리 잡았다. 내 신분증이나 학생증을 대신해서 말이다.

내 인생을 가지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을까. 이름을 가지게 되어서일까. 이후로 휘경이의 작은 텐트에 가는 일이 꽤 많아졌다. 그 전에는 찬란이를 대신하여 외출하는 날 이외에는 아예 나가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엄마와 찬란이 몰래 나갔다 와야 했기에 나가는 과정도 들어오는 과정도 늘 순탄하지 않았지만 그 작은 텐트에서 보내는 짧은 시간이 큰 힘이 되어서 나는 늘 위험한 모험을 선택했다. 찬란이가 눈치를 챌 때까지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하면서까지.


“너, 너 요즘 이상해.”

“뭐가?”

“너 요새 엄마 몰래 나가지?”

“어?”


나와 똑같은 얼굴, 나와 너무 다른 인생. 찬란이와 단 둘이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로 굉장히 미묘한 기분에 휩싸이게 했기 때문에 엄마가 같이 있지 않으면 우리 둘은 대화를 크게 많이 하지 않았다. 찬란이가 나를 부른 것부터 너무 어색해서 적응하지 못하는데 그 뒤에 나온 말은 더욱이 상상도 못한 말이라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거짓말을 하려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야 하는데 휘경이 앞에서도 그렇고, 찬란이 앞에서도 그렇고, 금방 불안한 얼굴을 해버려서 늘 거짓말은커녕 모두 들켜버리고 말았다. 한 번도 찬란이나 엄마가 들어오기 전에 도착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안 거지? 휘경이가 말했나? 내가 말을 잘못한 적이 있었나? 내가 너무 티가 나게 굴었나? 머리를 세차게 굴려 봐도 들킨 이유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뭐야, 진짜야?”

“…어, 어떻게 알았어?”

“엄마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 보면 알지.”


너랑 나는 쌍둥이잖아. 네가 달라진 것쯤은 곧바로 눈치 챌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찬란이의 표정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미묘하게 굳어있었다. 찬란이가 내 변화를 눈치를 챈 것처럼 나도 찬란이의 표정을 잘 읽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조금 기쁜 거 같기도 했고,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내 인생을 살아서 기분이 나쁜 걸까? 나는 그 오랜 세월을 자기 뒤에서 살아왔는데 이 작은 일탈도 화가 날 만큼 나를 하찮게 여긴 걸까? 나쁜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내가 내 인생을 살면 찬란이가 불행해질 거라고 엄마는 늘 말했으니까 당연하게 찬란이도 그것을 굉장히 싫어할 거 같았다. 휘경이 보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게 나를 위로해줄 거 같아서. 지금 당장 곤두박질치는 기분을 끌어안아줄 거 같아서.


“잘 됐다. 누구 만나는데?”

“어……?”

“휘경이? 휘경이 맞지?”


휘경이 이름을 말하는 찬란이는 안심한 것 같은 얼굴이어서 순간 얼이 빠져버렸다. 내 인생을 살면 분명히 찬란이가 불행하다 말했는데, 엄마는 찬란이가 행복하려면 이러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했는데. 찬란이는 차라리 후련한 얼굴이었다. 괜찮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묻자 찬란이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해주었다. 내가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안 괜찮을 게 아주 많지 않을까? 내가 내 인생을 살면 찬란이는 불행해지고, 내가 찬란이를 대신해줄 때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찬란이는 곤란해질 텐데. 나 하나 때문에 우리 모두가 불행해질 수도 있는데 왜 안 괜찮을 게 없지. 엄마가 말한 것과 찬란이의 반응이 너무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뭐가 괜찮은 것이냐고 물어볼 수 없을 만큼.

휘경이 착하지? 다음에는 나랑 같이 휘경이 보러 가자. 너도 괜찮고 휘경이도 괜찮으면 말이야. 찬란이는 잔뜩 굳어버린 내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지 기쁜 얼굴로 조잘거렸다. 엄마가 말한 거랑 너무 달라. 불행하지 않아. 찬란이는 불행하지 않아. 혼란스러워. 머릿속에 엄마의 목소리가 웅웅 울린다. 찬란이의 행복이 네 행복이잖아, 찬란아. 가짜 찬란아. 이게 엄마가 말했던 것일까? 내가 마음대로 지어낸 상상일까?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데 분명한 건 찬란이의 반응이 상상했던 것과 달라서 기쁘긴 했다는 것이다. 엄마의 말과 다른 것은 의아했지만 휘경이와 찬란이와 같이 있는 내 모습은 보기 좋아 보였다. 찬란이를 대신해서 누군가와 있는 게 아니었고, 찬란이와 함께 있어서 더 나 혼자가 또렷해보였다. 엄마 몰래 찬란이와 함께 작은 텐트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이서 놀면 더 재미있겠지. 더 행복하겠지.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던 태풍이 진정되고 나서야 드는 햇빛에 행복해진 나는 밝게 웃으며 찬란이의 말에 대답을 했다. 아니, 하고 싶었다.

경악으로 가득 찬 엄마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너, 너, 너…. 너 누구 만나니?”

“어, 엄마. 아니, 있잖아요.”

“찬란아. 네가 얘기해보렴. 얘, 너 모르게 누구 만났니?”

“엄마. 진정해봐요. 우리 차분히 얘기를 해요.”

“문찬란! 엄마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엄마의 날카로운 말이 귀에 박힌다. 방금까지 몽글몽글하게 자리 잡던 따스한 분위기는 이미 냉랭하게 식어버린 지 오래였다. 어쩐지 나는 저기 멀리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얼굴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나를 혼낼 때에도 본 적이 없는 냉기만 가득한 얼굴, 한 점의 온화함조차 남아있지 않은 얼굴. 덜컥 겁이 나서 나는 무작정 달렸다. 뒤에서 찬란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을 듣고 멈출 자신이 없었다. 처음으로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나로 존재하며 세상 속에서 달리고 있다. 엄마가 따라오고 있는 걸까, 찬란이도 같이 따라오고 있는 걸까. 누군가 나를 자꾸 뒤쫓는 느낌이 들어서 쉬지 않고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발은 익숙하게 휘경이가 살고 있는 빌라로 나를 이끌었다. 작은 텐트가 기다리고 있는 옥상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엄마는 틀렸다. 엄마는 틀린 거야. 엄마는 틀렸어. 나는 내 인생을 살아도 되었는데, 찬란이는 내가 내 인생을 살아도 불행하지 않은데, 싫어하지 않는데. 엄마는 내가 찬란이 뒤를 도와야 행복할 거라 말했다. 엄마의 구원을 지키고 싶어서, 엄마의 구원에게 버려지고 싶지 않아서. 짧은 삶이 뒤집어진 기분이었다. 내 모든 것을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쉼 없이 달리는데 토기가 올라왔다. 당장 모든 것을 쏟아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는 엄마 때문에 이렇게 살았어. 내 인생은 엄마가 빼앗았어. 이기적인 건 엄마야.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더 달릴 수 없을 때가 돼서야 다리를 멈추었다. 이미 옥상에 도착한 후였다. 꼬깃꼬깃한 쪽지를 펴 어려운 한자들을 다시 소리 내어 읽었다. 눈물이 터져서 내 목소리가 너무나도 볼품없었다. 이름도 없는 내 인생이 볼품없었다. 뒤에서 문을 열고 뒤따라온 엄마와 찬란이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엄마가 다가오니 피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어서 발을 다시 옮길 뿐이었다. 등 뒤에 차가운 난간이 느껴졌다.


“얘, 찬란아. 너 이리로 와. 거기 위험하잖니.”

“엄마, 엄마는 틀렸어.”

“찬란아. 여기로 오고 얘기하자. 위험하다고 했잖아.”

“엄마는 틀렸다고. 나는 찬란이가 아니잖아. 그렇게 부르지 마.”

“찬란아….”


햇빛이 강렬하다. 뒤에 닿은 난간의 온기와 다르게 뜨거웠다. 우는 엄마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올려 태양을 바라봤다. 옥상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너무나도 가까워보인다.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말이다. 어쩐지 아래에서 휘경이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기도 하다. 지금 태양을 등지고 저 바닥으로 떨어지면 휘경이를 만날 수 있을까. 아니, 난간 위로 올라 손을 뻗으면 태양에 손이 닿을까. 어디에 닿아야 나는 빛에 가까워질까. 쿵덕거리는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웅웅,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커서 어느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기에서 모든 것을 놓으면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엄마의 구원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내 존재하지 않는 인생에서도, 행복하지만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드는 되찾은 내 인생에서도 벗어날 것 같았다. 태양이 자꾸 내게 가까워진다. 찬란한 빛이 나를 비춘다. 그림자는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태양을 향해 뛰었다. 몸이 추락한다. 자유를 되찾는다. 나를 되찾는다.  



____ 장미 therosenove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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