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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Oct 19. 2020

브런치를 하기 전에는 몰랐다

이혼 후 이야기 #. 29



어렸을 때 

놀러 갔던 잘 사는 친구 집에서

에나멜 구두처럼 겉표지가 반짝반짝하고 튼튼한 책들이 

한 책장에 주욱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위인전 전집이었다.


우연히 한 권을 빼 읽었는데 그렇게 새로운 세계가 없었다.


책 속의 글자만 읽었을 뿐이었는데

눈앞에선 생생하게 위인들이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그야말로 내 혼을 쏙 빼놓고 있었다.


책꽂이 앞에 앉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것도 잠시

아쉽게 책을 덮고 밖으로 나가야 했다.

놀러 왔으니 방에 있지 말고 마당에 가서 놀아야 한다고 친구 엄마가 내보냈기 때문이다.


그 책들을 다시 읽기 위해 

친구 비위를 최대한 맞춰가며 하교 후에 그 친구 집에 놀러 가려고 애를 썼다.

그 방에 있는 책들의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자주 가지는 못했다.

"쟤는 왜 항상 방에서 책만 들고 혼자 따로 노느냐."

친구 엄마가 눈치를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는 책이 없었다.

전집을 사다 주실 돈이 없었다.



문제집은 재미없었고 책은 살 돈이 없었다.  

읽고 싶은데 책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쓰는 것'으로 관심이 옮겨갔던 모양이다.


중학교 때부터 일기를 썼다.

엄마는 식당에서 일하느라 늦게 왔고

언니는 언니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각자가 바빴다.


스멀스멀 올라왔던 태풍 같던 사춘기의 요동을 티 내기엔

주변에 받아줄 사람이 없었다.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고 싶지만 어린 나이에도 그건 아니다 싶었고

거리에서 방황하고 싶었지만

읍내는 멀었으며

결정적으로 돈이 없었다.



숙제를 대충 해놓고

일기장을 폈다.


언니가 쓰지 않는

삭막하게 줄 간격이 좁은

어른들 회계 장부 같은 노트에 뭔가를 끄적였다.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반에서 어떤 친구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는다라는 것부터

할머니는 왜 엄마를 괴롭힐까라는 주제까지


울면서 쓰던 날도 있었고

나름의 논리로 누군가에게 반박하며 쓰기도 했고

욕을 잔뜩 쓰기도 했고

감성이 퐁퐁 솟아나는 사춘기 여중생의 일기를 쓰기도 했다.


친구가 많지는 않았지만 세 손가락 안에 꼽는 몇몇의 친구와 오래오래 주고받은 편지 많았다.

패션잡지를 뜯어 여백에다 편지를 쓰고 예쁜 스티커를 붙여 교과서보다 더 소중하게 가방에 넣고 한달음에 학교로 갔다.


친구 교과서 사이에 살포시 편지를 몰래 넣고 나올 때면 늘 짜릿했다. 

경쟁하듯 답장을 더 길게 썼다. 

겨우 여중생들이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았을까...



그때 알았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노는 것보다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넌 나중에 글을 써봐.
책을 내도 좋고. 너 안에 가진 게 많아서 읽는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글을 분명 쓸 수 있을 거야.


언젠가 친구가 내게 말했다.


퇴근해서 저녁을 먹고 치우기 바쁘게 내일 먹을 반찬을 준비해놓느라 한참을 부엌에 있었다.

 

갑상선의 기능을 약에 의존하는 나는 언제 피곤해질지, 지금이 피곤한 건지, 아니면 지금이 좋은 컨디션인지 스스로도 모를 때가 많았다. 

한차례 집안일을 하고 나면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이 몰려왔다. 


몸이 땅 밑으로 꺼지는 느낌과 얼굴 전체에 돈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안면 저림은 갑상선암 수술 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겨우 책이라도 읽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이혼하고 나서 많은 것들이 좋아졌지만 일단 마음이 고요해지니 책을 다시 읽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나와 아이들 이외의 것에 에너지를 쓰지 않기로 했다. 

그동안 나를 외면한 채 '보여주기식 착한 역할극'은  최악의 결과를 냈다는 것을 경험해서였다.


어쩌면 고립과도 비슷했지만, 힘들었던 결혼 생활과 수술, 이혼을 지나오면서 나는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정리되었다. 


몸과 마음이 아프자 무엇이 내게 중요한지 판단이 섰다. 

불필요한 인연들은 모두 정리했다. 

결혼생활로 만나게 된 시가 사람들이 대표적이었다.


여름방학이 되었다.

아이들이 아빠네 가고 난 뒤 저녁 시간이 조금 한가해지자 그동안 생각만 했던 브런치를 떠올렸다.


식탁을 닦고 김 봉지, 과자 봉지를 한쪽으로 치웠다.

커피를 한잔 내리고 노트북을 켰다.


브런치를 접속하고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

도화지처럼 하얀 화면에 깜빡거리고 있는 커서를 보자 호기롭던 시작과는 달리 막막함이 툭 떨어졌다.


뭘 쓰지? 뭘 어디서부터 쓰지? 
이 많은 일들을 대체 어디서부터?



브런치를 시작한다면

반드시 나의 결혼생활과 이혼에 대해 쓰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래서 '무엇을' 쓸 건지는 고민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써야 할지 첫 페이지를 잡는 게 힘들었다.


아주 어렸을 때

성인이 된 이후

결혼을 한 이후

이혼을 한 이후

단락단락마다 나는 꺼내놔야 하는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나올 것 같지만 결국 모든 게 이어져 있었다. 

조각난 과거들이 현재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고, 결과적으로 예전의 내가 지금의 나였다.




잔뜩 긴장했던 손가락에 힘을 뺐다.

'잘 써서 누군가에게 검사받을 것도 아니잖아.'


그냥 내 이야기만 있는 그대로 쓰면 될 일이었다.

누가 내 브런치를 검사할 것도 아니었고

이 부분은 잘 썼네, 글이 별로네 하는 평가를 받을 것도 아니었다.


기억을 더듬었다.

아니 더듬어 볼 것도 없었다.

마치 어제처럼 생생했기 때문이다.


이혼을 결정하고

집을 보러 다니고

3천만 원짜리 집을 내 손으로 고쳐나가던 날부터


아니 그전에 있었던 결혼생활들

아니다. 아빠 돌아가시고 엄마랑 고생했던 그 시절

그것보다 더 이전, 아빠에게 신나게 맞으면서 살았던 유년시절

...


고구마 줄기처럼 기억들이, 장면들이 속속 소환되어 나왔다.




맞고 서 있는 내가 있었고

우는 내가 있었고

첫아이를 안고 행복한 내가 있었고

가정법원에서 입술을 깨물고 있는 내가 있었다.



이제는 조금 무뎌졌겠지 싶어 꺼내기 시작한 그때의 감정과 민낯으로 만났을 때 

나는 그 전처럼 다시 눈물이 났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지!

왜 나한테 그랬을까? 생판 모르는 남에게도 이러지는 않잖아. 


억울함이, 슬픔이, 분노가 키보드에 얹혀있는 손끝에서 줄줄 새어 나왔다. 


쓰다가 노트북을 덮기도 했다. 

더 쓸 수가 없는 순간이 왔다. 


당장에 핸드폰을 열어 "니가, 니 가족이 어쩜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고 대뜸 문자를 할뻔하기도 했다. 

눈물 콧물을 닦으며 닫혀 있는 노트북을 째려보다가 다시 열었다.



아무도 읽지 않아도 좋아. 나는 쓸 거야 계속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글을 쓰면 쓸수록 나는 꼭 이 글들을 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그 글에 달린 댓글들과 다들 잠든 시간에 홀로 라이킷을 누르며 글을 읽는 구독자들을 보면서 나는 느낀 것이 많았다.


한낱 개인적인 투덜거림에 지나치지 않을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읽히기도 하고 공감의 글이 되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어른이 된 지금도 과거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며, 그것을 감추기 위해 저마다 '척'을 한다는 것.

 

안 아픈 척

괜찮은 척

밝은 척

그리고 이젠 뭐 괜찮은 척까지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도 아프면서 모르는 타인에게 무한의 격려를 해준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지만 글에는 표현이 되지 못했던 말들을 댓글로 써주시는 구독자도 있고

고질적인 내 단점을 짚어주시는 분도 있다.


그리고 당장에 글을 쓰셔야 할 것 같은 숨은 고수님들의 능력을 댓글 몇 문장으로 만나기도 한다.



가장 많은 수혜를 보는 사람은 역시 나다.

직장에서 중간중간 브런치를 들어와 볼 때마다 알림 종에 하늘색 점이 찍힌 것으로 누군가가 나의 글에 똑똑 노크를 한 것을 본다.


반가움과 고마움이 올라온다.

갓난아이를 키우는 새내기 엄마.
나보다 더한 세월을 보내고 홀로서기에 성공한 엄마.
아내를 위해 시가와 연을 끊은 남편.
전쟁 같은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아내.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지만 내 글을 보며 엄마를 생각한다는 아가씨.
이혼을 고민하며 불면의 밤을 새우는 엄마.
아버지를 떠올리지만 이미 그런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있는 중년분까지.



또한 댓글을 남기지 않아도

내가 글을 올릴 때마다 바로 찾아오는 구독자님들이 있다.


조용히 다녀간다. 

읽었다는 발자국만 보이지만 나는 알 수 있다.

참 따뜻한 분들이다.




언젠가는 

나의 이야기도 끝이 날 것이다. 


더 이상 글을 쓰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그동안의 일들을 다 뱉어냈으니 속이 후련해서 브런치와 만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어느 순간부터는 겁도 난다. 

구독자가 늘어날 때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브런치를 통해 만난 분들이 나에게 얼마나 조건 없이 따뜻한 어깨를 잠시 내주었는지 기억하고 있다. 


뽀송뽀송하게 마른 하얀 수건의 감촉 같은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나는 글을 올렸고 사진을 찾았고 발행을 눌렀다. 


내 글을 써서 올리기에도 바빠 브런치의 다른 글들은 얼마나 세련되고 무지막지하게 멋진 작품들 일지 구경할 시간이 잘 없었지만 


가끔 내 손끝에 걸리는 글들을 눌러보면 나의 허접한 글들과는 차원이 다른 좋은 이야기들이 참 많다.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대단한 필력을 자랑하는 수준 높은 글이 못된다.


그저 나에게 일어났던, 그리고 내가 겪어내고 있는 가공되지 않은 떫고 설익은 시간들을 먼지 나는 마당을 쓸듯 묵묵히 좌우로 치우는 것의 반복과도 같다.



나는 그저

브런치를 열고 글을 쓴 지 이제 겨우 두 달밖에 되지 않은 

평범한 가장이고 엄마이고 직장인이다.





저에게 용기를 주시고 

응원을 해주시고 

늘 건강과 행복을 빌어주시는 구독자님들께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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