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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Oct 21. 2020

당신이라면 애 보면서 하루 종일 장모랑 같이 있을래?

이혼 후 이야기 #. 30




부부는 바라보는 방향이 같아야 한다.

상대방과 보는 방향이 다르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조율을 하되 적어도 강요하진 말아야 한다.


"당신은 왜 나랑 결혼하려고 했어?"


"당신이 어머니 모시고 산다고 해서. 소개팅했던 여자들은 어머니 모시고 살거라 하니까 그 뒤론 연락을 안 하더라고."


말 한번 이쁘게 한다.

전남편은 참 꾸밈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순수함이 '우리'가 아닌 자신의 가족이 우선이고 배우자를 정하는 기준마저 계산된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뭔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지갑을 버스에 두고 내린 것을 3초  알았을 때의 그 무시무시한 심장 떨림이랄까.



그런 남자보다 더 멍청한 여자가

바로 그런 사람과 결혼이란 것을 하기로 한 ''였다.






나는 정규직이 되고 싶었다.

필요하다면 사내정치라도 했어야 했지만 그저 열심히 묵묵히 일만 하면 알아줄 거라는 순진한 생각만 했었다.


비정규직으로 회사에서 퇴사를 해야 했을 때 나를 버린 그 조직에 욕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미련을 못 버려 우울해했다.


회사에서 내쳐지는 것이 단지 인원감축 때문이 아니라 나의 존재 자체를 버림받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을 때 남편이 심각하게 말했다.


자신의 소원은 와이프가 앞치마를 매고 생글생글 웃으며 퇴근하는 남편을 위해 저녁을 차리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결혼 전부터 내가 나의 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 이상 직장에 안 나갔으면 한다고 했다.


내가 25살이었다.


"젊은 여자가 집에서 뭐해 그럼? 하루 종일 어머니랑 같이 집에 있어?"


시어머니보다

가까이 살아서 언제든 집에 들이닥치는 시누들이 더 부담스러웠다.


시누들은 가정주부였다.

아이들이 아직 한참 공부하는 학생이라 어디 나가서  벌 생각을 못한다고 했다.


아이와 힘겹게 떨어지며 출근하는 나에게

애는 엄마가 필요한 시기에 꼭 있어줘야 한다며 나중엔 후회한다고 했다.

돈으로 다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비정규직 월급만 겨우 받고 있었는데

돈독이 오른 여자가 되었다.


월급도 얼마 안 돼요~라고 하면

그 몇 푼 때문에 애를 떼놓고 가냐는 소릴 들을 것이 뻔했다.

이래도 저래도 욕을 먹긴 매한가지였다.




우리 집과 가까운 덕분에 시누들은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자주 왔다.


친정엄마를 보러 오는 그 기분이야, 내가 모를 수가 있을까.

하지만

엄마가 혼자 지내고 있으면 모를까 너무 잦은 출입도 함께 사는 내게는 부담이 되었다.


내가 집에서 가정주부를 하는 그날부터 시어머니와 시누들의 기사가 될 것이 뻔했다.


나는 운전이 익숙했다.

타고 나서도 아니고 경력이 오래되어서도 아니었다.

내 가족을 태우고 다녔으니 사력을 다해 안전운전에 집중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시누들은 운전이 무섭다고 했다.

남편 차니까 어디 접촉사고라도 날까 봐 운전이 싫다고 했다.


평소에도 시어머니와 아이를 태우고 옆동네 시누 집에 가서 그들을 태워 한 시간 넘게 달려 또 다른 시누 집에 모시고 가야 했다.


집에 올 때도 시누들을 차례로 내려주고 파김치가 되어 밤늦게 들어왔다.

처음엔 고마웠겠지만 그것이 반복되자 당연하게 운전과 기름값, 톨게이트 비용은 내 몫이 되었다


남편은 별말이 없었다.

느끼는 게 없었다가 정확할 것이다.

뭔가 느꼈다면 중간에서 교통정리라도 했어야 했다.


아내보다 더 아끼는 자신의 가족들에 관한 것이었으니 뭐가 잘못이라는 건지 애초부터 모르고 있는 듯했다.


불평을 할수록, 나는 시가를 미워하고 엄마와 누나들 흉을 하는 여자가 되어 갔다.



<집에서 노는 여자>가 되면 집안일과 육아는 독박일 것이 뻔했고 돈 번다는 이유로 효도와 집안일, 육아까지 모두를 나에게 일임한 남편은 속 편하게 일만 하고 회식이나 꼬박꼬박 가고, 술을 많이 먹은 날에는 나보고 데리러 와달라고 혀 꼬부라진 전화나 하면 될 일이었다.



앞날이 눈앞에 그려졌다.


어차피 내 가정의 일이니 그건 한다 쳐도,

이제 25살의 내가 집안에서 아이만 보고 어머니를 모시고 시누들과 시댁일들을 감당하는 것은 너무 어려워 보였다.


신혼초부터 하나 둘 겪으면서 나는 서서히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내가 집에 머물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다.


(우리 엄마 말처럼) 사지가 멀쩡하고 애 봐줄 시어머니도 있는데 젊은 여자가 집에 들어앉아서 뭐할 건가라는 내 생각과 왜 밖에 나가서 자꾸만 일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남편의 의견은 물과 기름 같았다.


"이런 이야기하면 내가 정말 못된 며느리 같지만, 한 집안에 여자가 두 명이서 살림을 쥐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돼. 어머니 편히 계시고 내가 나가서 벌어오겠다는데 그게 왜 나빠? 당신이 나라면 25살에 집에서 애 보고 살림하면서 장모님이랑 하루 종일 얼굴 보고 살 수 있어?"


사실은 나쁜 년 소릴 듣더라도 더 진심을 말했어야 했다.


'어머니랑 같이 안 살고, 당신 누나들 자주 안 찾아오면 집에서 살림하는 걸 고려는 해볼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남편은 효자 DNA가 충만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못마땅해하는 남편을 두고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비정규직으로 잘린 씁쓸함을 안고라도 말이다.


여자 앞 일은 모른다. 어떻게든 직장은 붙들고 있어라.

"아이를 키워야 할 때는 어쩔 수 없지만 넌 어르신이 아이도 봐주잖아. 그럼 집에서 뭐할 거야. 얼른 같이 벌어서 집도 사고 편하게 지내야지. 젊은 사람이 집안에만 있으면 병난다. 네가 주는 돈 받아가며 편하게 집안에서만 있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직업을 가지고 있어. 그게 나중을 위해서라도 좋아."


엄마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나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말은 안 했지만 엄마도 의 결혼생활 판을 들여다보자니 막막했던 걸까.


엄마는 20년 동안이나 나를 키웠다.

내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성향이고,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지 또 못 견뎌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엄마였다.


엄마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나는 집에서 육아와 살림만 하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남편의 월급만 가지고 속된 말로 콩나물 값을 깎아가며 살고 싶지도 않았다.


시어머니 용돈에 시댁행사에 들어가는 돈까지, 남편의 월급만으론 대출을 끼고 늘 제자리일 것이 뻔했다.

정규직이 되지 못해 쫓겨 나온 그 회사의 비정규직으로 다시 들어가겠다고 했다.


오기가 생겼다.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나를 쫓아내? 다시 해볼 거야.'

나에게는 애증의 회사였고 조직이었다.


꼭 정규직이 된 후, 내가 필요할 때 회사가 붙잡든 말든 보기 좋게  뻥 차고 나올 거라고 다짐했다.

남편은 혀를 내둘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엄마품을 떠나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나와 달리 남편은 자동으로 정규직이 되고 어머니의 돌봄을 받으며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부자리까지 정리해주고 출근, 출장가방도 알아서 다 싸주는 엄마랑 살고 있는 남자였다.


부족한 건 누나들이 챙겨주며 이미 서른이 다 돼가는 남동생 하나를 온 가족이 알뜰살뜰 키우고 있었다.




아이들의 양육권을 가지고 싸울 때도 내가 비정규직이라 생활이 불안정한 양육자라며 약점을 들췄다.


"정규직 되나 두고 보겠어. 내가 그렇게 되게는 안 할 거야."


인맥이든 술맥이든 다 동원해 방해하겠다는 것이었다.

남도 아닌 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는 아내에게 정규직이 되지 말라는 악담이나 하다니...



시간이 흐르고 나는 정규직이 되었다.

목표했던 대로 나를 잘랐던 회사에 비정규직으로 다시 들어갔다.


힘든 근무지를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악착같이 다녔고

마침내 정규직이 되었고 

남들보다 빨리 승진을 해나갔다.


정규직이 되었을 때 남편은 나에게 축하한다는 문자를 했다.


그것이 진심이든 비꼬는 것이든 내게는 상관없었다.

바로 답장을 했다.


당신이 나한테 축하한다는 말을 할 자격이 있어?
예전에 나한테 정규직 되는지 두고 보겠다고 했지?
나는 그 말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거야.
왜, 정규직이 되니까 이제 배가 아파?


남편과 나는 많은 부분에서 가치관이 달랐다.

그 사람은 무조건 혈연주의였다.


신혼집 마련의 토대가 되어야 할 천만 원도 나를 만나기 전에 자신이 모았던 돈이라는 이유로 결혼생활을 시작하자마자 형에게 줬다.


시조카가 결혼하는데 다들 돈을 모아서 혼수를 사주자고 했다.


결혼하는 시조카에게 내가 왜 혼수를 사라고 돈을 보태줘야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친정 언니도 나도 결혼자금은 알아서 모은 후 결혼을 했다.

물론 엄마도 이것저것 들어가는 자잘한 비용이 많으셨겠지만 혼수나 예물, 이바지 음식이나 함까지도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엄마에겐 고운 한복과 전세버스를 맞춰드렸다.


엄마가 우리를 이때까지 키웠으니 대학이든 결혼이든 성인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각자가 알아서 책임지고 해결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뻐하던 큰 손녀가 결혼을 한다며 시어머니는 "그래도 네가 작은 엄마니까 축의금은 50만 원 정도 해야 면이 서지 않겠냐."라고 하셨다.


십만 원을 넣었던 봉투를 슬그머니 백에 도로 집어넣고 한복을 입은 채 길 건너 ATM기에 가서 50만 원을 인출했다.



남편이 갑자기 회사 퇴직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싶다고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조카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급했길래 자기 부모님도 아니고 당신한테 돈을 빌려? 어디 아파?"


직장을 다니던 조카가 카드대금이 연체되어 신용불량자가 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에 빨리 막아줘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경제관념이 잘 없던 나조차도 그때는 어이가 없었다.


그걸 왜 못 빌려주게 하냐며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남편을 보았다.



엄마 집에는 정작 보내 주는 돈이 없었다.

결혼생활 내내 한 번도 쌀을 산적이 없었다. 엄마가 병원 근무 틈틈이 쉬는 날에 농사를 지어서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쌀값 한번 드리지 못했는데 시가에는 때때마다 돈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걸 당연하게 여겼던 사람.

'친척들 도와주는 것도 좋지만 가정을 꾸렸으면 당신과 내가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우선이 돼야 한다.'는 말을 시가를 싫어하는 불량 아내로 여겼던 남편.


우리는

처음부터 생각하는 각도의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서로 맞추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각도는 엄청난 거리를 두며 벌어지고 있었다.


결혼하기 전에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다.

같이 살아보기 전까지 나는 세세하게 알 수가 없었다.


나에게만 이상한 사람이었지, 또 맞는 누군가를 만나면 잘 살 수 있는 남자였을지도 모른다.

평화로웠을 집안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남편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챙기는 형제들조차도 결국엔 각자의 가정이 우선이라는 것을.


남동생이 이혼소송을 당하고, 재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다시 혼자가 되어도 누나들은 그 인생을 도와주지 못한다. 오히려 남동생 뒤치다꺼리를 해야 할까 봐 몸을 사릴 것이다.


아무리 귀한 남동생이지만 누나도 누나대로 생활이 있고 내가 끝까지 희생하며 도와주기는 싫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힘들 때

나를 도와주고 내 어깨를 감싸줄 사람은 가족밖에 없다.

부모 형제 말고 자신의 의지로 이룬 나의 배우자와 아이가 있는 가정말이다.


사람을 만날 때 배우자를 정할 때 적어도 삶에 대해, 결혼생활에 대해 어떤 기준이 있고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깊이 있게 대화해 봤어야 했다. 


지금 모습 그대로 결혼해서도 이렇게 낭만적이고 다 포용하는 사람이겠거니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시락을 싸 다니면서 아니라고 말리고 싶다. 


나만큼 미련하고 우둔한 사람은 없겠지만 

혹시나 '어떻게든 되겠지'하며 내 삶을 그저 운명에 맡긴다면 


그리고 잘못된 걸 처음부터 바로 잡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살면 나같이 울고불고 징징거리면서 이렇게 긴 이야기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일은 집에서 육아와 살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게는 너무 힘들었다. 


*집에 있는 여자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하는 여자 

*가정주부 

*경력 단절녀


이런 억울한 말을 들으며 티도 안나는 집안일에 매일을 희생하는 엄마들에게 진심으로 진심으로 존경과 위로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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