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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Oct 22. 2020

마누라를 잘못 골랐다

이런 여자와 왜 결혼했을까





나는 이혼했고 재혼도 한  남자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땐

아무것도 모르는 21살 아가씨였다.


서른이 되기 전에 나도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소개로 여자들을 만났지만,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를 결혼해서도 같이 모시며 살겠다는 내 소신발언에 여자들은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집사람을 만났다.


나는 서른을 목전에 두고 있던 29살,

아내는 23살에 결혼식올렸다.

결혼 전에 말했던 대로 어머니와 함께 짐을 싸서 아내의 직장이 있는 동네로 올라왔다.


좁은  집이었지만 그나마 안방은 어머니가 지내시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결혼 전 출장을 길게 갔다가 결혼식 3일 전에야 집에 왔다. 그동안 결혼 준비를 아내 혼자 하고 있었지만 크게 불만이 없어 보였다.


보통의 여자들처럼 귀찮게도,

쫑알쫑알 거리지도 않았다.

명품이나 좋은 집을 바라지도 않았다.


어머니와도 사이가 괜찮은 듯 보였다.

사치도 없었고 성격도 무난했다.



신혼집을 차린 곳은 누나들과 20분 거리에 있는 동네였다.

마음이 든든했다.


맞벌이 었지만 낮에는 누나한테 와달라고 할 수도 있고 형이나 다른 누나들도 근방에 살고 있었다.

결혼과 함께 최상의 여건이었다.


직장에서는 부모님을 모시는 보기 드문 젊은 부부라고 칭찬했다.

아내도 노력하는 듯했다.


나를 대신해 휴일에는 어머니와 교회에 가 주었고 식구들 모임에도 즐겁게 참석하는 것 같았다.

갈 때는 내가 운전했지만, 아내가 운전이 가능해서 나는 마음 놓고 술을 마실수 있었다.



아내는 가 좀 이상했다.

유순한 것 같은데도 내가 볼 땐 모 난구석이 많았다.


자고 일어나서 내 이불을 정리하지 않는 것을 지적했다.

밥상을 어머니가 들고 나르는 것을 내가 보고만 있다고 싫어했다.


어머니는 늘 하던 것이었는데 아내는 나보고 젊은 아들이 그 밥상을 앉아서 받아먹고 있냐고 타박했다.

어머니도 하지 않던 잔소리를 아내가 했다.


큰아이를 임신했을 때 산부인과 검진 가는 시간에 늦잠을 자고 있었다고 화를 냈다.

먼저 준비를 하고 나를 깨우될 것을, 미리 일어나지 않았다고 화를 내고 저 혼자 차를 끌고 가버렸다.


좀 늦게 가는 게, 더 자고 있었던 게 뭐가 그리 나쁜 일인가.


아내는 미리 계획된 일을 하지 않고 있으면 못 견뎌했다.

시간 약속도 지체하는 걸 싫어했고 즉흥적으로 누나 만나러 가자고 하는 것도 싫어했다.


일요일 아침마다 어머니와 교회에 가면서 예민하게 굴었다.

그렇게 싫으면 안 가면 되지 꼭 나에게 눈치를 주고 갔다.


그래도 우리 어머니나 누나들 정도면 남들에 비해 정말 착하고 괜찮은데 아내는 저 혼자 늘 그렇게 화가 나 있었다.



 

첫째 아이를 임신했던 늦가을 입덧이 없던 아내는 갑자기 호떡이 먹고 싶다고 했다.


"겨울도 아니고 갑자기 호떡이 어디 있겠어?"


 아내가 어디서 알아봤는지 집 근처 에버랜드 안에 호떡 파는 곳이 있다고 알려줬다.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했다.


"여보, 호떡 그거 천 원짜리 사자고 에버랜드 입장권을 몇만 원 주고 들어간다는 게 말이 돼? 아무리 에버랜드가 가깝지만 그건 좀 아니지 않아"


나는 사다 주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타산이 맞지 않는 일 아닌가.


겨울이 오고 아내가 출산을 했다.

길가에 흔하게 붕어빵과 호떡을 팔고 있었다.


아. 그때 호떡이 먹고 싶다고 했지.


나는 자랑스럽게 호떡을 5000원어치 한가득 샀다.

그걸 지금도 기억하고 있냐며 감동하면 어쩌지? 

자랑스럽게 집에 들고 들어 코앞에 들이밀었더니 아내가 화를 냈다.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성격이 참 별났다.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다.

고마움을 모르는 여자였다.


아내는 큰아이를 낳고 밤에 가끔 혼자 나갔다.

아이가 잠들었으니 어머니한테 말해 놓고 심야영화라도 보러 가자고, 드라이브라도 잠깐 나가자고, 시내 가서 어묵 하나만 먹고 오자고 졸랐다.


나는 피곤했다.

한밤중에 어딜 간단 말인가.


"꼭 평일에 가야 돼?"


안 가겠다고 했다.

어느새부터인가 아내는 밤에 혼자 나갔다.

혼자 심야영화를 보거나 깜깜한 동네를 드라이브하다 들어왔다.


애엄마가 저렇게 밤늦게 다니다니, 이해가 안 됐다.


저녁에 가끔씩 치킨을 시켜서 맥주를 같이 했다.

아내는 모유수유 때문에 못 먹을 때도 있었고 술을 잘 먹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술 마시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 알았다. 그때 먹지 왜 안 먹었냐니까, 당신이 술을 마시는 데 갑자기 애랑 어머니가 아프기라도 하면 누가 운전해서 병원 갈 거냐고 했다.


일어나지도 않는 일을 미리 걱정하는 게 이해가 안 됐다.

택시도 있고 119도 있는데.


즐겁게 시작한 치맥 타임은 늘 싸늘한 말싸움으로 끝이 났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은지 기분 좋게 술을 먹는 나에게 아내는 불만을 쏟아냈다.


들어보면 가끔 이해는 가지만

결국 내 식구들에 대한 불만이었다.


아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주니  지금 그런 소릴 듣자고 하는 거냐고 화를 내고, 말을 더 하면 싸움이 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더니 왜 한마디도 없냐고 화를 냈다.


미칠 지경이었다.


누나들이 근처에 있어서 좋고, 어머니가 집안 잘 되라고 교회 가자고 하시는 거고(물론 나는 안 간다) 우리 집 식구들이 다 모이는 건 우애가 좋다는 건데 그게 왜 힘든지 왜 불편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에게 쏴 붙이고 정작 모임 때는 군소리 없이 웃어가며 설거지를 하고 운전을 하는 걸 보면 아예 싫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하여튼... 이중적인 여자였다. 


나는 결혼 생활하면서 큰 걸 바란 것도 아니었다.

적은 월급이지만 내가 밖에 나가 벌어올 테니 평범하게 생활비 아껴 쓰며 어머니도 좀 즐겁게 해 드리고 애들 잘 키우고 뭐 그런 것들이었다. 


누나들이 살갑게 잘해줄 터이니 그 덕도 보면서 같이 어울려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하고 얼마나 좋은가.


아내가 나가서 일을 하니 내가 마치 능력이 없는 남자같이 보였다.


"요즘 맞벌이는 정말 중소기업이야, 일하면서 그만큼 벌어오는 와이프 흔치 않아."

라며 주위에선 부러워했지만 나는 평범한 삶이 좋았다.


아내는 직장을 나가니까 집안일도 내가 거들어주길 바랬다.

여자역할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굳이 퇴근해서 쉬는 나에게 시키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자기도 똑같이 일을 하니까 집안일도 나눠서 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했다.

내가 나가서 벌어오라고 한 적도 없는데 늘 그런 이유를 댔다.


어머니가 그나마 많이 도와주시고 그 덕분에 편하게 지내면서 남편이 집에서 쉬고 있는 것조차도 못 봐주겠다니 정말 배가 부른 여자였다.


부부가 굳이 같이 집안일을 해야 할 필요가 뭐 있는가.


남자보다는 그래도 여자가 더 섬세하고 꼼꼼하니 집안일을 해도 자기가 하면 될 일을 굳이 나한테 고무장갑을 끼워주고 앞치마를 둘러주며 등을 떠밀었다.



큰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내가 샤워하러 들어가면 꼭 아이를 같이 들여보냈다. 

씻는 김에 아이도 같이 씻겨서 나오라고 했다.


좀 더 크면 아빠랑 안 씻으려고 할 테니 지금이라도 많이 씻기라고 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왜 아이를 씻겨야 하지?

나는 가장인데.


아내가 그럴 때마다 짜증이 났다.

한 번은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내가 씻으러 들어갈 때 아이를 같이 들여보내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싫다고.


그러자 아내는 외계인 보듯 나를 쳐다봤다.

당신 딸인데도 그렇게 씻기기 싫으면 나보고 저녁 준비를 하라고 했다.


항상 저런 식이다.

 아니면 모다.


밥 다 먹고 자기가 씻을 때 같이 애를 데리고 들어가 씻으면 좋으련만 꼭 나한테 시켜야 속이 후련했나 보다.



매사에 그렇게 나에게 집안일을 시켜먹으려고 했던 아내가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닫았다.


조용하니 좋았다.


더 이상 누나들에 대해,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식탁에서 말없이 식사하는 날이 늘었다.


하지만 나는 불편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내 식사를 챙겨주셨고 내 속옷을 챙겨주셨고 내가 운전해서 누나들 집에 놀러 가면 되니까.


아내가 침대에 돌아누워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낼수록 집안의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여자가 잘 들어와야 한다는 옛말이 틀린 것이 아니구나.


왜 저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다 말을 시켜보면 송곳처럼 나를 찔렀다.

어느 순간부터 아침도 안 먹고 새벽 출근을 하는 아내였다.


아이가 소풍을 가는 날이었는데 새벽에 도시락을 싼 아내가 회사에 늦었다며 차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나는 비몽사몽 하며 어제 술을 먹고 술집 앞에 두고 왔다고 말했다.


아내가 분노했다.

어머니도 계시는데 감히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나보다 더 벌지도 못하는 여자가 그 잘난 회사에 늦었다며 차를 거기에 두고 오면 어쩌냐고 새벽부터 화를 냈다.


미친 여자가 아니고서는 저러지 못한다.


말수가 없어진 아내는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어머니와 아이들만 데리고 주말이면 누나 집에 가버렸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몇 번이고 간곡하게 너도 가서 놀자고 이야기해도 안 간다고 매몰차게 대답하는 여자는 그냥 집에 혼자 놔둬도 된다.


멍하게 앉아 있거나 하루 종일 누워서 미동도 하지 않는 아내를 보면 화가 나서 집에 있기도 싫었다.


얼마나 더 편하고 얼마나 더 자기 멋대로 해야 풀린단 말인가.


술 먹은 나 대신 운전을 해주고, 누나 집에 가서 설거지도 싹싹 잘해주고, 어머니를 모시고 미용실에 가주던 아내는 이제 없었다.


아이들에게만 웃어 보일 뿐, 집에 있는 꼴을 보는 것도 싫었다.


어머니와 사이가 점점 나빠지는 듯했다.

'어머니가 멱살을 잡았다, 욕을 했다, 의심을 한다.'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만 늘어놨다.


친하게 지내는 누나 같은 여자와 몇 번 밥을 먹고 술을 한잔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다 같이 찜질방을 좀 다녔는데 외도를 한다고 의심했다.


아니라고 설명을 해주기도 싫었다.  

명하지 않았다.

내 자존심을 깎아먹는 여자에게 설명해주기도 싫었다.


대화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일찍 와도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아내가 꼴 보기 싫어 밖에서 술을 한잔하고 들어왔다.


아내가 아이들과 거실에서 자고 있었다.

나를 존중해주지도 않고 어머니한테도 막 하는 여자가 태평스럽게 자고 있으니 화가 났다.


내 집에서 자고 있는 것조차도 싫었다.

그래서 그날은 술김에 손찌검을 한번 했는데 아파트 주민들이 신고를 해서 경찰서로 가게 되었다.


아내에게 부탁해 없던 일로 하고 나서 일은 무마되었지만 나에게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드는 여자와 살 수가 없었다.


꼴도 보기 싫었다.

이혼을 하자고 했다.






아내는 애들을 봐서 이혼은 하지 말자고 했다.

어머니와 싸우지 않겠다는 믿을 수 없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이혼은 안된다고 했다.


표정 없이 글을 읽듯 무미건조하게 부탁하는 얼굴을 보니 더 싫었다.


그렇지, 이혼해봐야 비정규직 주제에 어떻게 살겠는가.

하지만 난 냉정해지기로 했다.


그동안 어머니를 잘 보살펴드리지 않았고, 아내의 의무도 소홀히 했고 수술하나 한 것 가 가지고 피곤하고 힘들다고 늘 침대에 누워만 있는 여자와 같이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저 여자만 나가면, 저 여자만 내 인생에서 없어지면 아이들과 어머니를 모시고 잘 살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 없이는 안 나간다고 했다.

'애들이야 나중에 다시 찾아오면 되지.'

비정규직이니 데리고 가봤자 생활고에 허덕이다 백기를 들고 아이들을 데리고  것이다. 


그럼 아이들과 나가라고 했다.

벌벌 떨며 빌어도 봐줄까 말까인데 아내는 알았다고 집구 할 시간을 한 달만 달라고 했다.


한 달?

그 시간 안에 집을 구하겠다고? 무일푼으로?


그러라고 하고 속으로 마음껏 비웃었다.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아이들은 나보고 키워달라고 할 것이 뻔했다.


그런데 한 달이 채 못되어 아내는 이삿짐 차를 불러 아이들과 짐을 가지고 집을 나가버렸다.

나와 분리되어 나가 버렸다.


그래, 속 시끄러웠는데 당분간 좀 떨어져 살아 봐야 남편 귀한 줄도 알고 그동안 어머니가 얼마나 며느리를 위해 힘들게 집안일을 했는지 알지.


지금까지 어머니 도움 없이는 직장생활이 불가능했으니 곧 연락이 올 거다. 


이사를 가고도 나는 아이들과 만났다.

집만 다를 뿐 아이들과 서먹함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아내도 자기가 아쉬운 게 있으니 나와 끈이라도 하나 연결해놓으려고 아이들을 보여주는 게 아니겠는가.


그 속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어차피 젊은 여자가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쨌거나 남편이 있어야 하고 고정된 수입이 있어야 애를 키울 것 아닌가.


나는 자유로웠다.

집에 들어서면 표정 없는 아내를 보는 짜증도 없어졌고, 술을 먹고 있으면 누구랑 그렇게 늦게까지 먹냐고 독촉하는 전화도 없었다.


내가 주말에 늘어지게 잠을 자도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었고, 아이들이 없으니 나 혼자 들어가서 편하게 씻고 나오면 었다.


내가 외박을 하든,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든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어머니가 늘 우셨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도 예전 생활은 숨이 막혔으니까.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섬이며 강원도며 직장 따라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녔다.

아이들 전학이 잦을 텐데 걱정이 되었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생활비 이야기를 하길래 애들 키우기 싫으면 보내라고 했더니 불같이 화를 냈다.


다른 건 몰라도 애들이랑 관계된 것에 아내는 심하게 예민했다.

저런 성격이니 내가 못 참은 것이다.


결국 우리는 별거한 지 4년 뒤에 이혼했다.

나는 속이 후련했다.


이혼해도 나는 늘 아이들과 연락을 하고 있고 좋은 아빠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오면 용돈도 주고 삼겹살도 사준다.

아빠를 잊지 않게 늘 전화도 한다.


아내는 아니 전처는 독한 여자가 맞다.

아이들을 데리고 혼자 이사를 해가면서 꾸역꾸역 아이들을 키운다.

저러니 내가 같이 살면 숨이 막혔던 것이다.


법원에서

"아내가 만약 나중에 재혼이라도 하면 아이들을 제가 키우면 안 될까요."

라고 물었던 것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이들에게 물어봐도 만나는 남자가 없는 것 같다.  


저런 성격이니 남자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


물론 아내가 재혼을 하지 않아서 아이들이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전처의 성격을 잘 맞춰줄 남자가 대한민국에 없어서일 수도 있다.


나는 이혼을 한 뒤 더 자유롭게 살았다.


 전 재혼을 해서 가정을 새로 꾸렸지만, 와이프랑 지금은 같이 살고 있지 않다.


내가 잘못한 건 아닌 것 같고

이 여자도 참을성이 부족한 것 같다.

전처같이 어머니를 모시는 것도 아니고 누나들이 자주 놀러 오는 것도 아니고 가족행사가 많은 것도 아닌데 불만 투성이다.


그래서 어린 딸을 내가 키우고 있다.

이미 첫 번째 결혼에서  딸이 둘 있지만 재혼해서 낳은 딸도 예쁘다.


딸이 셋이니 언니 동생 하면서 다 같이 잘 지내면 좋겠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났더라면 내가 이혼할 일도 재혼할 일도 없었을 텐데 가끔 후회가 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신경을 안 써도 두 딸은 전처가 알아서 키우고 있으니 한시름 덜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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