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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Oct 23. 2020

이혼한 사람들은 뭔가 문제가 있더라

이혼 후 이야기 #. 31



아이들과 짐을 싸서 나오면서 나와 전남편을 알고 있는 지인들과는 연락을 끊었다.

부부동반으로 모임을 가졌던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게 연락을 끊었다.


전남편의 친구들이었던 사람들은 내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물론 받지도 않았을 테지만.


별거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직장선배님의 전화를 받았다.

그저 안부가 궁금해서 하신 전화이겠거니 하며 반갑게 받았는데 그 선배는 내가 요청하지도 않은 위로를 양해도 없이 불쑥 던졌다.


"요즘 이혼이 무슨 흉이겠어. 인생에 굴곡이 없는 사람이 없지. 더 좋은 사람 만나면 되잖아 안 그래?"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환경은 낯설었으며

가뜩이나 직장에서 나의 사생활을 눈치챌까 노심초사하며  조심스럽게 지내던 와중이었다.


편하게 이야기했던 친구가 혹시 말을 옮긴 건가 의심까지 들었다.

"선배님, 죄송한데 누가 혹시 저더러 이혼했다고 하던가요? 그냥 회사를 옮긴 것뿐인데 왜 그런 소문이 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저한테 직접 들으신 건 아니잖아요."


진심으로 기분이 나빴다.
대뜸 전화해서 이혼이 흉이 아니라니, 더 좋은 사람도 많다느니.... 남자 선배가 그런 말을 하니 더더욱 기분이 나빴다.


혼자만의 자격지심이었겠지만, 이혼해서 남편이 없는 여자가 되었으니 너도 나도 다 찔러볼 수 있는 쉬운 사람이 된 건가 하는 수치심까지 느꼈다.


"아... 아니었어?"


전에 없는 쌀쌀한 나의 목소리를 감지한 선배는 머쓱한지 어색하게 전화를 끊었고 나는 그 전화번호를 지우지 않았다.


앞으로 그 선배의 번호가 뜨면 절대 받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부서를 옮기며 직장을 옮기고 이사를 다닐 때마다 내가 늘 했던 것은 '남편이 있는 척'이었다.

나에게도 그것이 여러 면에서 유리했고,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차라리 편했다.

담임선생님께도 우리 아이들이 아빠와 같이 살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남편이 있는데 젊은 여자가 아이들만 데리고 이리저리 근무지를 옮겨 다니면 무슨 사연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보다.


그 누구에게도 이혼했다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직장 사람들은 '카더라 통신'의 안테나로 수집된 뜬소문과 흥미롭게 만들어진 이야기들을 가지고 나를 잔뜩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의 기대를 단칼에 잘라버릴 수 있는 방법은 한치의 틈조차 주지 않는 철벽을 높게 세우고 다니는 것뿐이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잘 웃고, 업무도 많이 맡아서 했지만 그 이상은 다가가지 않았다.

친해졌다는 것을 빌미로 뭔가를 자꾸 묻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제2 근무시간 '퇴근 후 회식'자리에 끼지 못함으로써 정보를 얻는데도 느렸다.

그리고 그들끼리 만들어진 보이지 않는 '끈끈함'이 내겐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그건 어차피 내가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배들 앞에선 선배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나라서 몇 개월에 한 번 정도는 술자리를 했다.

"내일 시간 되지? 술 한잔 하자."

술을 마셔야 하는 날은 전날부터 바쁘다.

내일 늦게 들어올 것을 대비해 아이들 저녁을 미리 만들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후배들을 만나 술을 한잔 사주는 자리에서 나는 그들이 취하는 것을 지켜본다.

물론 나도 술을 똑같이 먹는다.

그다음부턴 내가 술을 먹자고 하면 후배들이 편의점에서 숙취해소 음료를 미리 한 병씩 먹고 있다.


반쯤 눈이 감긴 후배들을 택시에 태워 기사님께 차비를 드리면서

"내일 출근 늦게 하면 알지?^^"

라고 못 박아 준다.


물론 후배들을 태운 택시가 사라지면

그제야 힘이 풀린 무릎을 다시 추스르며

"응.... 엄마야. 지금 들어가."

라며 쉭쉭 바람이 빠지는 혀 꼬부라진 전화를 하지만 말이다.


취하되 반드시 깨어있어야 한다고 어느 드라마에서 말했던가.

술자리에서조차 그 어떤 빈틈도 보여줄 수 없도록 나는 나를 설계했다.




술자리를 가지면, 그들은 서로 좀 더 속마음을 오픈해야 한다는 묵언의 <강제적인> 약속들이라도 하는 걸까.


새로운 부서로 처음 출근했던 날

같이 근무하는 사무실 선배들과 저녁에 밥을 먹기로 했다.

반주로 첫 잔이 비워지자마자 한 선배가 말했다.


"김 과장, 혹시 이혼했어? 주변에서 그러길래."


오늘 처음 봤는데 단지 내 직장선배라고 해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다니.

남자들만의 언어소통 능력인가?


배려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놈의 이혼.

또또 그놈의 이혼. 이혼. 이혼.

김 과장 이혼

그 여자 이혼

이혼녀

지겹다. 지겹다 정말.


사내에서 나를 찾는 검색 키워드로 써도 전혀 손색이 없겠다, 젠장


예의가 있었다면 아니 상대방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더라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질문할 수 있을까.

예전처럼 얼버무리기도, 아니라고 거짓말하는 것도 화가 났다.


그냥 뜬소문은 뜬소문대로 그러려니 하면 안 되는 것인가.

굳이 그렇게 확인을 하고 싶은가.

내 이혼이 그들에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사실은요...'

하며 나약하게 눈물을 흘리는 여자 후배의 모습을 기대한 건가?



"왜요? 누가 그러던가요? 제가 이혼했다고요?"


"음... 아니 내가 들은 게 있어서 그래."


"제가 이혼한 것이 직장에서의 제 업무능력과 얼마나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뭐 굳이 물어보시니까 말씀드리죠. 이혼했어요."


"그렇지? 최근에 한 거지?"


선배는 옳다구나 거봐, 맞다니까 하는 눈빛으로 받아친다.

눈치가 아예 마이너스통장이다.



들고 있던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놨다.

분위기가 썰렁해지고 있었다.


최근이라고 하던가요?
10년 됐는데요. 저 혼자 애 키운 지 십 년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혼과 상관없이 어디 가서 든 일 잘해왔고,
그 부분은 사생활이니
더는 안 물어보셨으면 좋겠는데요.



언젠가는 부딪혀야 할 일들이었다.

언젠가는 내 입으로 직접 해야 할 말들이었다.


왜 내입으로 말해야 하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수줍은 소녀처럼 헤헤거리고 넘길 수도 없다.

그러기도 싫었다.


따박따박 이야기하는 내 표정을 보고야 선배도 움찔했던 모양이었다.

"아... 그래. 뭐 기분 나빠하지는 마. 나도 소문만 가지고 혼자 짐작할 수도 없고 해서 물어본 거야.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하잖아."


기분을 나쁘게 해 놓고 기분 나빠하지 말라니.

똥 멍청이가 여기에도 하나 있네!


늘어진 저 엉덩이를 힘껏 한대 걷어차 놓고 '기분 나빠하지 말라.'라고 하면 되겠다.

안 아플 자신 있나?


두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했다.

화기애애하던 술자리를 걷어차고 나오고 싶었지만 그 정도의 이성은 다행히 남아 있었다.


술자리를 통해 남자들에게 있는 끈끈한 전우애를 기대했지만 다음날부터 우리는 어색해졌다.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건가...'

예전 같으면 혼자 소심 해졌을 텐데

이런 찝찝함도 이젠 버렸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사람들은 나의 이혼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결혼생활이(비록 위태할지라도) 유지되고 있는 것에 대한 안도감을 느끼는 것 같다.


결혼 생활이 힘들고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김 과장보다는 그래도 내가 낫네, 덜 불행하네 라고 느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은연중에 그런 말을 한다.


아무리 이혼이 흔한 요즘이라지만, 멀쩡한 사람이 이혼을 하겠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부분이 있을 거야.
문제가 있을 거야.


라고 말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혼한 사람은 '문제가 있는 사람'이고

이혼하지 않은 사람은 '문제가 없는 사람'으로 구분이 되었을까.



그래.

당신들이 모르는 <어떤 부분들> 일 것이니 알려고 하지 마시라.


자식 때문에

경제적 사정 때문에

혹은 주위의 시선 때문에

이혼하지 않고 버티는 부부들도 사는 게 지옥이지만


그 지옥을 벗어나면 얼마나 더 큰 지옥이 있는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 자신을 던진 절박한 사람들의 삶도 있다.

그 사람들이 인내심이 없어서

자식이 소중하지 않아서

이기적이어서 이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살려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면서

숱한 밤을 눈물을 쏟으며 고민하다가 내리는 결정이다.


그 과정에 함께 눈물 흘려주지 않았다면

'이혼했어? 흉이 아니야.'와 같은

<위로를 가장한 자기 안도>는 하지 말길 바란다.




"왜 이혼 안 했어? 겁나서 그래? 돈 없어서? 배우자 없이 혼자 사는 거 쪽팔려?"


이혼한 사람들은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은 하지 않는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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