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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Oct 25. 2020

이혼 후 달라진 것들(1)

이혼 후 이야기 #. 32

살짝 걷힌 커튼 사이로 

아이 둘과 누우면 남는 공간이 없는 작은 방에 햇살이 한 줌 들어왔다.

 

찡그려 뜬 한쪽 눈에 들어오는 벽지가 낯설다.

풍경이 낯설다.


다시 눈을 감았다.


'여기가 어디지?'

...

아... 이사했지 참.



아침 6시만 되면 강제적으로 듣게 되는 YTN 뉴스가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아침 공기를 찢는 듯한 코 고는 소리와 온갖 음식 냄새에 소주 냄새가 뒤섞인 남편의 술냄새도 없었다.


조금만 더 이대로 눈을 감고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육체를 살살 달래고 싶지만 어제 먹던 건더기 얼마 안 남은 국을 데우는 소리도 없다.


"일어나라 밥 먹자, 밥 먹고 교회 가야지."


재촉하는 소리도 없다.


"엄마 아빠 여적 자냐? 엄마 깨워, 교회 가자고 깨워."

아이를 시켜 나를 깨우는 소리도 없다.



누운 채로 팔다리를 쭉 뻗었다.

기지개 켜는 손가락 끝에 벽이 닿는다.


'작기는 작구나 우리 방이.'


더 이상 누워있기 싫을 때까지 이불의 온기를 느끼다가 나른한 표정으로 부스스 일어나 본다.


아이들은 아직도 꿈나라다.

낮에 그렇게 투닥투닥 싸우고도 잘 때는 꼭 서로 마주 보고 있거나, 서로의 팔이든 다리든 피부 한쪽은 어떻게든 맞닿은 채로 자는 꾸러기 녀석들에게 이불을 끌어올려준 뒤 살금살금 거실로 나왔다.


그렇다.


오늘은 휴일이다.


아이들만 데리고 살면서 맞이한 첫 번째 휴일이다.






햇빛이 들지 않는 거실

거실에 함께 있는 주방


싱크대에 놓인 국그릇 3개, 밥그릇 3개, 컵 3개도 조용히 자고 있다.


물을 한 컵만 부어 끓이고 믹스커피 한 봉지를 뜯었다.

건축 연도를 가늠하기도  힘든 초라한 3천만 원짜리 다가구 전셋집이지만 이 집에 지금 숨 쉬고 있는 사람은 아이들과 나뿐이다.


누구도 나를 성가시게 하지 않고

나에게만 희생하라고 하는 사람도 상황도 없는 곳이다.


물컵으로 쓰는 내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붓고 

믹스커피를 거꾸로 쏟아 넣고 

젓가락 하나로 컵 안을 살살 젓는다.

 

'후.... '

입김만 불어넣었는데 커피 향이 코 안으로 넘실대며 들어온다.


눈곱 도안 뗀 눈으로 거실 겸 주방을 둘러보았다.

중고매장에서 산 식탁과 냉장고, 단칸 짜리 싱크대만 있는 거실.


갈색빛 철제 샷시에 오돌토돌한 반투명 유리가 끼워진 현관문.

거기에 어색하게 달린 제일 저렴한 도어록.

놔둘 곳이 없어 냉장고 옆에 세워둔 아이들 우산이 보인다.


'행복하다'라는 느낌이 훅 올라왔다.


...


아무도 나에게 '언제 아침밥 먹을 거냐.'라고

오늘 어디 가냐고, 갈 거면 교회 갔다 가라고,

오후에 시누들이 오니까 고기라도 사 오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주일은 거룩히 지키는 거라서 일주일치 부식을 사러 가는 것도 토요일에 해야 했지만 시누들이 밥 먹으러 오는 일요일엔 되려 사 오라고 재촉하는 시어머니도,

 

이런 논리와 내 표정을 보고도 아무 말 않고 그저 tv에만 시선을 고정하거나 코 골고 자는 미운 남편도 없었다.


국 없이 밥을 못 먹는 사람들을 위해

오늘 아침에는 무슨 국을 끓여야 하나 싱크대 앞에 멍하니 서서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아이들이 깨면 엄마가 보내준 가래떡을 구워서 따뜻하게 데운 우유랑 사과를 아침으로 줘야겠다.'

내용물이 별로 없는 냉장고 안을 투시하듯 뒤지며 커피를 마셨다.


아침 식단부터 오늘 하루 뭐할 건지 오롯이 내가 정하고 내 의지대로 움직이면 되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이들과 늦은 아침을 먹으면서 오늘 놀이터를 갈지 이모집에 가서 동갑내기 사촌들이랑 놀지 그때 가서 정하면 되는 하루였다.





쉬고 싶었던 주말, 

계획에도 없는 시누 집이나 아주버님 집에 가서 시누들과 장을 봐와서 밥을 차리고, 메인 요리는 상에 먼저 올린 뒤 나중에야 급하게 밥을 먹고 싱크대에 쫓아가서 설거지거리가 나올 것을 기다리던 날들.


누울 수도 잠깐 눈을 붙일 수도 없는 시누 집에서의 불편함을 그저 우리 아이들을 이뻐하는 시누들을 보며, 자식들이 먹고 노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미소를 보며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을 쥐어짜 내던 날들이 떠올랐다.





아이들과 살 집을 마련하고 천냥 마트에 가서 주방 용품을 살 때 나는 모든 그릇을 딱 3개만 샀다.

국그릇도 밥그릇도 접시도 수저도.


명절을 우리 집에서 지내고 수시로 시누들이 드나들던 예전 결혼생활에서는 살림이 내 살림이 아니었다. 모든 건 자식들을 기다리며 쟁여놓고 있는 어머니 살림이었으며 내가 쓰는 그릇과 수저 또한 손님용으로 준비되어 있는 것 중 하나였다.


남편은 사람을 더 태울 수 있는 큰 차를 사고 싶어 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자기 식구들을 한꺼번에 태우고 다니면 얼마나 좋냐는 거였다.


남편에게 '자기 식구'란

어머니, 누나들, 형, 시조카들과

그리고 마지막에 나와 아이들이었다.


다 같은 5인 용인 자가용이지만 단지 우리 차가 SUV라는 이유로 장거리 땐 우리 차를 이용했다.

6명도 끼여 타며 다들 즐거워했다.


불편하다고 느낀 건 나밖에 없었다.

'나만 예민하게 구는 건가...' 

나중엔 불편하다고 느끼는 내 감정에 스스로 죄책감이 들었다.




기분 좋은 늦잠을 깨울까 봐 살며시 닫아놓은 방에서 아이들 인기척이 들린다.

'우리 강아지들 일어났구나. 떡을 데워야지.'


접시를 꺼내려고 싱크대 문을 열었다.

예전 집에선 싱크대 한편에 늘 있던 양주병이 없다.


이사를 오면서

퇴근 후 더 이상 머그잔에 양주를 두 컵씩 급하게 넘길 필요가 없어졌다.

술기운을 빌리지 않고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좁은 집에서 나만 보면 한숨 쉬며 지나가는 어머니와

거의 매일 자정이 넘어서 들어오는 남편의 몫까지 이 집안에서 해야 하는 일들을 해내기 위해

연기처럼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분노를 감추기 위해


알코올을 들이부어가며 내 정신을 고무줄처럼 늘릴 필요가 없었다.


빡빡한 일상의 고단함만 있었을 뿐, 술기운에라도 버티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일들이 없었다.




아이들이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나이라 집전화를 개통했지만 아이들은 늘 나와 함께 있으니 그것도 얼마 되지 않아 해지를 했다.


주말 아침이면 늘 울려대던 전화.

"올케야? 오늘 뭐해?"

"올케니? 오후에 약속 있어?"

"어 올케 오늘은 집에 있네? 잘됐다. 엄마 모시고 이리 와, 동생집에 가자!"


집전화 벨소리가 너무 싫었다.

어머니에겐 제일 반가운 소리였지만 나는 벨소리가 울릴 때마다 가슴이 덜컥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벨소리만 들으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엄마, 오늘은 뭐할 거야?"

"글쎄. 뭐하고 싶어?"

"그림 그리기!"

"음... 그건 곤란한데. 엄마는 엄청 잘 그려서 너희들이 시무룩해질 텐데."

"에이~ 우리도 잘 그려! 유치원에서 많이 배웠어. 그렇지 언니?"


입가에 할아버지 흰 수염처럼 하얀 침 자국이 그대로 있는 아이들이 눈을 반짝였다.



마음이 힘들었던 시절 회사수첩에 소망처럼 끄적끄적 그렸던...



급할 것도 없고

우리 집에 온다는 시누 전화에 급하게 잠옷을 갈아입고 집안을 치울 필요도 없다.


아빠와 외출한다고 들떠 있는 아이들을 꽃단장시켜놓고

아직도 자고 있는 남편을 쳐다보며 원망할 필요도 없다.



동네도 낯설고

우리가 앞으로 이용해야 하는 가게들도 낯설고

집으로 찾아오는 길도 낯설지만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빠르게 실감했다.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는 삶,

누군가를 곁에 둔 채 원망하는 마음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 삶.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주고

내 생활에 집중할 수 있는 삶.



10년 전에 그렇게 나는 시작했다.

그리고 진행 중이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환경을 던져준 나를 인정하지만

그 미안함이 죄스러움으로만 끝나지 않도록


최고는 아니어도

최선을 다하는 엄마가 되겠다는,

행복한 사람으로 살겠다는 밑그림을 그려놓고


한 부분 한 부분씩 

곱게 색을 입혀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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