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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Oct 27. 2020

이혼 후 달라진 것들(2)

이혼 후 이야기 #. 33




명절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무려 4주나 남았는데도 친구들과의 단톡 방에서는 명절 연휴에 감당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감정의 난타전이 여기저기 보인다. 


꼴 보기 싫은 시동생부터 남보다도 못한 남편의 행동거지들을 미리 예상하며 울분을 쏟는다.


폭풍 같은 명절이 지나고 나면 인터넷 기사에는 이혼 접수하는 부부가 명절 후 늘었다고 심심찮게 기사가 뜬다. 


내가 그랬다.

명절이 다가오면 한 달 전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까마득했다.


명절용 가짜 깁스를 검색하는 친구들과 함께 웃었지만 결코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방대한 명절맞이 음식보다
쉴 새 없이 차려내는 밥상 술상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웃고 즐기는 그들 사이에 '내 자리'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잔치에 고용이라도 됐으면 하루 일당이라도 받겠지만 육체적 정신적 노동을 견디며 그것도 생글생글 웃어가며 상을 차려내야 며느리가 잘 들어왔다, 마누라를 잘 만났다는 소리를 들으니 나는 그들을 위해 기계처럼 착착 움직여야 했다. 


분명히 가족모임이었는데 나는 몸이 고되고 심정은 억울했다.


가족이라도 우리 엄마라면 이렇게 나를 종일 주방에 세워놓지 않았을 텐데, 주방에 가서 서 있으라고 시킨 사람은 없었건만 마치 주방이 내 자리 같았다.


이혼을 하고 나서야 나는 그 모든 명절증후군에서 벗어났다. 

법이 나를 결혼생활로부터 강제로 분리시켜 준 후에야 나는 더 이상 그 고통을 겪지 않게 되었다.


초반부터 당차게 입장을 밝히고 '못된 며느리' 소리를 듣더라도 명절 노동에 대한 부당함을 짚고 넘어가는 현명한 여자들과 달리 나는 허우적 댈수록 깊이 빠지는 개미지옥에서 모래를 씹다가 겨우겨우 기어 나와서야 남들 다 쉬는 명절에 <나도 쉴 수 있는> 자유를 찾았다. 



시어머니에게 남편에게 따박따박 나의 입장을 쏟아내는 여자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당찬 여자들이었을까. 
얼마나 많은 울분을 쌓아두다 마침내 나쁜 년 소리를 듣더라도 내뱉어야 했던 생존의 외침이었겠는가. 



명절을 준비하는 연휴 첫날엔 붐비는 재래시장이나 마트에는 잘 가지 않게 되었다. 

갈 일이 없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마트 코너 곳곳에서 제사상에 오르는, 평소에는 내가 깎아먹어 볼 엄두조차 못 내는 제일 비싸고 좋은 과일을 고르는 며느리

내 아이들 먹일 반찬으로는 살 생각도 못했던 비싼 한우, 귀한 생선을 고르는 며느리


제사 후엔 잘 먹히지도 않을 것 같은 마른 북어, 오색 과자, 약과를 신중하게 골라 담는 며느리


대목을 앞두고 천정부지로 오른 비싼 삼색나물거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며느리... 


온통 한국 며느리들 밖에 없는 것 같은 그곳에서 과거 그들과 함께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며 '명절용 장보기'를 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들 너같이 생각하지 않아. 그들 중에 행복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뭐 눈에는 뭐 밖에 안 보인다고 네가 그런 세월을 살았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그래, 인정한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솥뚜껑을 볼 때마다 자라가 떠올라 흠칫흠칫 놀라는 나를 여전히 본다.






직장에서 가끔 3~4시간씩 출장을 갔다. 

두 명씩 가야 하는 출장이라 남자 직원과 종종 출장을 나갔다가 퇴근시간 전에 들어오곤 했다. 


어느 날인가 업무시간에 회사 밖에서 누가 나를 찾는다고 했다. 

나가보니 같이 일하는 동료의 와이프였다. 


나보다 나이도 한참 많아 '형님'소리가 절로 나오는 연배의 여성이었다. 

초면이라 꾸벅 인사를 하는 나에게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물어왔다. 


"우리 아저씨랑 같이 출장 가고 그랬다는 게 정말이에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질문은 그렇게 했지만 표정은 무슨 상간녀를 보듯 했다. 

굉장히 불쾌했다. 


나를 남편과 함께 일하는 직장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내 남편 직장에 있는 어떤 여자'로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남들 다가는 출장이니 저도 당연히 가지요. 왜 무슨 일이세요?"


잡아먹을 듯이 나를 불러낸 그 와이프는 이내 목소리가 약해졌다.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여유가 느껴지는 여성이 아니라 남편이 의심되어 허겁지겁 사실을 알아보러 온 딱한 여자가 보였다.


젊었을 때부터 있었던 남편의 외도로 인해 의심하는 날들이 일상이었다는 것은 동료들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남편의 모든 일거수일투족과 이동시간까지 체크하는 게 그분의 중요한 일과였다. 

남편을 마지못해 직장에 보내지만, 귀가하는 시간까지 온통 신경은 출근하고 없는 남편에게 가 있었다.  


"혹시 섬유유연제 써요?"


"그거 안 쓰는 집도 있나요?" 


다른 냄새가 쉽게 드러나도록 자신은 남편 옷을 세탁할 때 섬유유연제를 쓰지 않는데 언제부턴가 퇴근하는 남편 옷에 달콤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고 했다. 


누가 옆에 탔었냐고 누구랑 있었냐고 추궁하니 남편은 그냥 직장동료와 출장을 갔다 온 게 전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존재하는 여자 동료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회사 앞으로 쫓아온 것이었다.


벗어놓은 남편의 출근복에 코를 갖다 대고 한참을 킁킁거리는 아내의 모습을 상상했다.


분노를 미루고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화장을 하지 않은 창백하고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 나이에서 나올 수 있는 편안한 표정이 없었다.


상식적인 분이라면, 외도의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느낌만을 가지고 남편의 직장동료에게 실례가 되는 이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마음이 많이 아파 보였다.

남편의 옷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킁킁댈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현실이 시궁창일지라도 남들에게 보이기 좋게 꾸역꾸역 결혼생활을 유지해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평생을 그렇게 배우자와 쫓고 쫓기는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녀들이 어렸을 땐 과거의 나처럼 '아이들을 위해' 참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분은 자녀가 직장을 다니는데도 여전히 남편을 뒤쫓으며 살고 있었다.


"저렇게 남편 때문에 힘들 것 같으면 그냥 따로 사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이혼하면, 재산분할을 해야 하잖아요. 재산의 절반을 남편이랑 나누는 것이 싫어서 안 한다나 봐요."


동료들이 수군거렸다.



정말 세상에는 많은 사연을 가진 부부들이 있었다.

부모로서의 모습, 부부금슬 다 중요한 것은 맞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그 생활을 견디고 고심 끝에 이혼을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나의 경험상 그것보다 우위에 있어야 하는 것은, 내가 이 결혼생활을 감당하고 견딜 수 있을 만큼 행복한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느냐였다.


서로에게 상처밖에 되지 않을 관계

부부상담이나 진솔한 대화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도 회복될 수 없을 관계라면 억만금의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일까.


함께 이룩한 재산을 반으로 나눠갖기 싫어 끊임없이 의심하며 행복하지 않은 얼굴로 살면서까지 과연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자녀에게 부모의 결혼생활은 어떻게 비쳤을까.


이혼 후 내가 달라진 것은 '반드시 이것을 지켜야 한다'라는 스스로의 족쇄를 하나 둘 풀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 스스로 초라해진 것 같은 느낌을 만들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녀를 위한다는 가장 적당한 핑계를 가지고 그동안 내가 허비한 금쪽같은 내 삶들을 나중에 아이들에게 보상해달라고 할 것인가.



이혼을 거치면서 아이들에게 끝없이 미안하고, 이런 내 모습이 낙오자 같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아이들은 그렇게 참으며 살아달라고 하지 않았다.

엄마 인생을 희생하면서 아빠를 죽도록 미워하면서 할머니, 고모들을 증오하면서라도 살아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불안했고 미안했고 두려웠던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고 하지만

결국 내가 잘 살기 위해, 내가 굳건히 서기 위해 아직 어린아이들을 키우며 아등바등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도 독립하면 자신들의 인생을 살 것이다.

더 이상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산다는 내 핑계도 유효기간이 도래하게 된다.


내가 왜 이런 방향을 선택했고 어떻게 살아갈지는 오로지 내가 계획하고 움직이고 이뤄내야 한다.



이혼을 하고 나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


화장실에서 소변 흘린 냄새가 나지 않아 좋다.

싱글 침대를 쓰면서 이불 정리가 쉬워서 좋다.

베란다에서 살금살금 들어오는 담배연기가 없어서 좋다.

내가 먹지도 않은 술상을 치우지 않아서 좋다.

끼니때마다 국을 끓여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어서 좋다.

담배값, 술값으로 나간 카드대금을 보며 한숨 쉴 일이 없어 좋다.

차곡차곡 아껴둔 비상금이 내 의도와는 다르게 나가는 일이 없어 좋다.

내가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날 수 있는 휴일.

나도 당연히 쉴 수 있는 명절 연휴.

내 생각이 유교사상에 대입되어 평가받지 않아서 좋다.


무엇보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과 내 인생을 함께 해야 한다는 막막함이 없어서 좋다.


사람을 저주하며 내 인생을 한탄하고 서로에게 칼을 던져야 하는 지옥 같은 상황이 더는 없어서 


나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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