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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Nov 09. 2020

엄마는 또 모른 척을 했다




21살 어느 봄날,

휴가 때 잠시 내려갔던 집에서 다시 직장이 있는 서울로 올라가려고 현관에서 신발끈을 묶었다.

"인제 가면 언제 또 와?"

"몰라. 가봐야 알지 뭐."




고3이 되던 날부터 읍내에 있는 사무실에 실습을 나가기 시작해 돈을 벌었던 나는 학교 졸업을 하자마자 바로 직장을 잡아 서울로 떠났었다.


엄마와 19년을 같이 살았던 덕에 엄마로부터 떨어져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떠나기 전까진 잘 몰랐다.


분명했던 건 그 당시 상업고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내가 깡촌인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게 그다지 없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처럼 산업도시로 나가 공장에 취직을 하거나, 아니면 고향에 남아 여기서 남자를 만나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농사일을 거들거나 평범한 읍내의 사무직 자리라도 하나 잡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기는 싫었다.


농사를 짓는 아빠에게 시집을 와 평생을 땅에서  사시다가 남편이 죽자 오롯이 혼자 생계를 짊어지는 엄마의 삶을 지켜보며 컸던 나는 똑같이 살 자신이 없었기도 했다.


실습생을 했던 읍내 사무실에서 사장님 눈을 피해 공부를 했다.

서울에서 다닐 수 있는 직장에 시험을 쳐보기 위해서였다.


몇 번의 '몰래 시험'을 치렀고 합격을 했다.

실습생을 13개월 했을 때였다.


"사장님, 저 다음 달에 그만두려고 하는데요"


"그래. 네가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다. 니 틈틈이 공부하는 거 알고 있었다. 큰 물에 가서 놀아야지."


새로 온 후배에게 업무를 넘겨주었다.



집을 떠나오기 전날 엄마와 안방에 마주 앉았다.

"엄마. 내 인제 내일이면 간다. 너무 많이 일하지 말고, 건강 챙겨라."

"내 걱정하지 말고 니 걱정이라 해라, 참나..."

무뚝뚝한 경상도 모녀의 대화가 무심하게 이어졌다.


고1 때부터 3년남짓

엄마 모르게 주말마다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으고 있었다.

주말이나 연휴에 집에서 노느니 한 푼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엄마는 그 당시 식당에서 식모를 하시며 우리를 키우고 계셨다.

당신이 하는 고된 식당일을 딸이 한다는 것을 알면 분명히 혼을 낼 것이었다.


엄마에게 슬쩍 서빙 아르바이트를 이야기했을 때 불같이 화를 냈기에 3년 내내 말할 수가 없었다.

엄마 귀에 들어가지 않는 멀리 떨어진 식당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3 실습을 나가면서부터는 주중에는 사무실에 출근, 주말에는 식당에 나갔다.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면 14,000원을 받았다.

얼마 되지 않은 돈이었지만 내 손에 쥐어지는 돈을 보며 흐뭇했다.



언니들이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모두 취업해서 나갔지만, 여전히 엄마 혼자 벌어서는 빠듯했다.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시며 아버지가 남기고 간 모르는 빚도 갚아나가고 계셨다.


나와 아직 어린 동생들이 둘이나 더 있었고, 할머니가 정정하게 계셨다.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은 엄마에게 드릴 수 없는 돈이었기에 통장에 따로 모았다.

엄마에게 보태드릴 순 없었지만

사춘기였던 동생에게 용돈을 주고 옷을 사주고, 막냇동생 장난감을 사줬다.



"엄마. 통장에 얼마 안 된다. 도장하고, 여기 비밀번호 적어놨다. 찾아 써라. 나는 서울 가면 당분간 돈 벌일 만 있지 쓸 일이 없으니까 이거 필요 없다."


"이게 뭔 돈인데?"



지난 3년 동안 엄마 모르게 다녔던 아르바이트를 이실직고했다.

이미 지나간 일, 엄마가 이제 와서 내 등짝을 후려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엄마한테 안 들키고 지금까지 그렇게 했노?"


우리 엄마는 젊었다.


지금 같으면 눈물을 방울방울 달고 계실 양반인데

그때는 울지 않으셨다.



그런데 보였다,

내 눈에는.


통장을 받아 든 엄마 눈빛이 흔들렸다.

엄마 얼굴에 서린 미안함이, 슬픔이

눈치 없이 내 눈에는 보였다.



"좋아하지 마라, 엄마. 몇백만 원 들어있는 거 아니다."


엄마는 잘 쓰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쓰지 않으셨을 것 같다.

쓴다 해도 엄마 입으로 떡 한 조각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스무 살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집을 떠나왔었다.

20년간 숨을 쉬고 울고 웃었던 고향을 그렇게 떠나왔었다.






빠듯하고 바빴던 서울 생활, 일 년에 한두 번 휴가를 받으면 엄마에게 갔다.

그 따뜻했던 봄날도 그러했다.


"몰라. 가봐야 알지 뭐."

언제 또 오냐는 엄마의 물음에 무심하게 대답해놓고 보니

갑자기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엄마 앞에서는 좀처럼 울지 않았던 나인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현관에서 허리를 숙여 묶던 신발끈을 꾹 잡고 가만히 있었다.


울음을 참으려니 침이 나왔다.

이때다 싶은지 덩달아 콧물도 나왔다.


현관에서 신발끈을 부여잡고

훌쩍 거리는 나를 보더니 엄마가 말했다.


"가시나, 생전 안 울던 게 왜 우노. 얼렁 올라가라."



엄마가 해주는 밥을 든든히 먹고 서울로 돌아올 때는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집을 나섰다.

그런데 그날은 그냥 울음이 나왔다.


뜬금없이

엄마를 떠나기 싫었다.



그렇게 눈물 콧물을 보여드리고 집을 나섰던 나는

서울에 올라와

직장에서 업무 중에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

허리가 골절되었고 병원으로 실려갔다.


현관에서 신발끈을 묶다가 울면서 서울에 올라갔던 딸이 며칠 뒤 병원에서 꼼짝도 못 하고 누웠다는 소식을 엄마는 듣게 되었다.


의사는 하반신 마비를 다행히 피했으나 나중에 결혼한다면 자연분만도 힘들 만큼 허리에 부담을 주면 안 된다고 했다.


재활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다친 정도만으로 장애등급이 바로 나왔다.


오전까지 뛰어다녔는데 그날 오후 나는 병원에서 소변줄을 끼운 채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다.



"허리를 삐끗했다 아이가. 수술도 안 해도 되고 그냥 쉬다가 나가면 된다. 걱정하지 마라 엄마. 이 참에 잘 쉬다가 나가지 뭐."


다행히 나는 입은 살아있었다!


결혼 전이라 보호자라곤 엄마뿐이었지만

헤헤거리며 바쁘신데 굳이 올라오실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엄마는 안심하는 듯했다.

까불거리지 말고 조심하라고 했다.




긴 병원생활이 시작되었다.

허리를 쓰지 못하니 꼼짝없이 누워있었다.


나는 21살 아가씨였다.

대소변을 남의 손에 받아내는 게 싫었다.


음식을 조금만 먹었다.

근육이 빠져나갔다.


"젊으신 분이... 허리 관리 잘하세요."

의료기기 제작하시는 분이 와서

허리를 지탱하는 보조기를 맞췄다.


아무것도 못하고 병실 천정만 응시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엄마가 휴가를 내서 서울에 올라오신다고 했다.

내 딸을 봐야 안심을 하시겠지.


마음이 급해졌다.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가는 것 정도로만 겨우 거동이 가능한 시기였다.

근육이 빠져나가고 힘이 없어진 허리는 보조기에 의지해 겨우 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오신다고 했다.


시골을 떠난 젊디 젊은 딸이

서울 땅 그것도 병원 바닥에 누워있는 꼴을 보여드릴 수 없었다.


간호사 눈을 피해 병실을 조금씩 조금씩 걸었다.

벼락치기하듯 허리 근육을 키우기 시작했다.


"절대 안정이라고 했죠! 환자분 그렇게 과하게 움직이시면 안 돼요."


간호사들에게 야단을 들었다.

병원 복도를 걷다가는 또 끌려가서 야단을 들을 것이 뻔했다.


낮에는 침대에 누워서 허공에 대고 자전거 페달을 밟듯 발을 허우적거렸다.

병실 불이 꺼지면 조용히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제일 끝 칸에 들어갔다

변기 옆에서 한걸음 두 걸음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환자 화장실이라 넓길래, 팔도 좌우로 흔들어보았다.


슬리퍼 바닥이 닳아지도록

어정쩡한 자세로

매일 밤 화장실 끝 칸에서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회진할 시간에 맞춰 병실에 다시 들어갔다.

밤만 되면 왜 그렇게 화장실을 자주 가냐고 물었다.

설사가... 설사가 생겼다고 했다.


지사제를 처방해주겠다고 했다.

.......!






엄마가 오셨다.


하얀 침대보, 하얀 환자복, 하얀 병원...

온통 하얀 곳에서 엄마를 보니

유난히 검게 탄 엄마 얼굴이었다.


"젊은것이 이렇게 누워있으니 안 답답하나..."


엄마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지만 길게 말씀은 없었다.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들에게 내 상태에 대한 입단속을 시켜뒀다.

다행히 병명도 영어로 쓰여있었다.

엄마는 내가 허리를 삐끗한 김에 잘 쉬고 있는 줄 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가겠다고 하셨다.

몸 잘 챙기라고 하셨다.


그날이 마침 어버이날이었다.


미리 카네이션을 주변 사람에게 부탁해 놓았었다.


아직은 아픈 허리를 보조기에 의지해 일으켰다.

엄마에게 '까불랑 거리지 않고 아프지 않은' 멀쩡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서랍에 넣어뒀던 카네이션을 엄마 가슴에 달아 드렸다.


"어버이날에 자식이 병원에 있는 꼴을 보여드리네, 하이고 참."


미안함에 깔깔거리며 엄마같이 소박한 꽃 한 송이를 달아드렸다.

어지러움을 꾹 참고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

엄지발가락에 힘을 꾸욱 주었다.



아픈 딸이 달아주는 꽃을

엄마는 말없이 

가슴에 달고 가셨다.




엄마가 다녀가신 후 간호사가 말했다.


엄마가 데스크에 와서 물어보셨다고.


내 자식이

상태가 어떤지

어디가 아픈지

얼마나 아픈지

밥은 잘 삼키는지

잠은 잘 자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촐랑거리다가 허리를 삐끗한 게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앞으로 재활 기간이 길어질 수 있고

정상적인 보행도 힘들며

무엇보다 영구적으로 힘든 허리를 감싸 안고 살아갈 수도 있음을

엄마는 이미 알고 계셨다.



그렇다

엄마는 나보다 한수 위였다.

늘 나보다 그랬다.


니들보다 배운 것도 없고 똑똑한 것도 아니라고 하셨지만

엄마 앞에선 늘 졌다.


거짓말을 해도

안 아픈 척을 해도

알지만 모른 척하셨다.


나는 그런 엄마를 모른 척했고

엄마는 내가 눈치챈 것을

또 모른 척하셨다.



병원을 돌고 또 돌았다.

계속 걸었다.

어떻게든 걸었다.


엄마에게

불구가 된 딸을

장애등급이 나온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몇 개월이 지나고

퇴원을 했다.

정상적인 직장생활이 힘들 거라고 했지만 복직을 했다.



그리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자연 분만했다.


허리가 무리가 가므로 자연분만이 안될 거라고

또 평생 허리를 굽힐 수 없을지도 모른다던 의사 선생님을

수년이 흘러 다시 찾아갔다.


MRI를 찍었다.

자연분만을 했다고 이야기했다.


차트와 MRI 필름을 보시던 의사 선생님이

환하게 웃었다.

이런 환자는 드물다고 했다.




결과로 보여주었다.


우리 엄마가 평생을 그렇게 말없이 보여주었듯

알지만 티 내지 않았듯

나도 결과로 말했다.



대학을 가르치지 못해서

학력이 짧아서

직장에서 저렇게 정규직도 안되고

험한 일을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엄마에게

대학 졸업증명서를 보여드렸다.


아이들과 섬에 살던 시절

밤마다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으며 학점을 쌓아갔다.

고단해서 공부하다 말고 쓰러져 자기 일쑤였다.





오래 걸렸지만


엄마에게 보여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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