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극배우 B씨 Nov 10. 2020

알밤 세알

이혼 후 이야기 #. 37




어릴때 읽었던 전래동화가 있었다.


서로 몹시 미워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있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어떻게 하면 빨리 돌아가시게 할까 밤낮 고민을 하는 것을 보고 지나가던 스님이 말했다.


"매일 저녁 알밤 3개를 시어머니에게 드리세요. 그것을 백일 정도 먹게 되면 백일째 되는 날엔 죽습니다."


솔깃해진 며느리는 그날 저녁부터 토실토실하고 아주 굵은 알밤을 정성껏 시어머니에게 드렸다.


이 며느리가 무슨 꿍꿍이인가, 언제까지 이런 행동을 할 건가 처음에는 의심을 하며 시어머니는 알밤을 먹었다.


하루 이틀, 보름, 한 달...

몇 번 하다 말 것 같던 며느리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자신에게 맛있는 알밤을 올리는 것을 보고 시어머니는 어느새 며느리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성에 차지 않는 며느리를 늘 구박만 했으나 매일 알밤을 바치는 며느리가 기특해 손주를 봐주기도 하고 소일거리를 찾아 하며 집안일도 보이지 않게 돕기 시작했다.


그렇게 변화하는 시어머니를 외면한 채 며느리는 열심히 알밤 세알을 매일 올렸다.

어느덧 자신을 바라보는 시어머니 눈빛과 행동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지만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며 스스로를 재촉했다.


시간이 흘러 99일째 되던 날.

며느리는 부엌에서 내일 드릴 알밤을 준비하며 눈물을 흘렸다.


지난 석 달 동안 시어머니가 자신에게 보여준 마음과 행동은 더 이상 미운 시어머니의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돌아가시라고 열심히 알밤을 갖다 바쳤으니 이제 내일 하루만 더 드시면 돌아가실게 뻔했다.

부엌에서 훌쩍훌쩍 우는 며느리 앞에 스님이 나타났다.


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알밤을 내일 드셔도 돌아가시지 않을 것이니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모시라고 했고 고부관계는 더없이 좋아져 내내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혼을 막고자  혼자 상담치료를 받으러 갔다.

우리 부부에게 아니 무엇보다 나에게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갈라져 금이 간 부부관계에 나도 절반의 일조는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남편에게도 같이 갈 것을 권했다.

자신은 멀쩡하니까 상담이든 치료든 받으려면 혼자 가서 받으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마 생판 모르는 상담 선생님에게 가정이 이렇게 풍비박산 나고 있다는 것을 오픈하기 싫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내 말을 따르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고.


자기 식구들밖에 모르는 성향, 어머니와 누나들에게 기대는 분위기.

그래...

결국 이것도 자라오면서 환경에 따라 만들어져 자연스레 굳어진 것 일뿐 본인이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지 못하는데 무슨 소리가 들리겠나 싶었다.





3개월의 파견이 끝나고 지방에서 올라오면 어차피 이혼을 할 것이니 교육이나 잘 받고 오라는 남편의 빈정거림을 견디며 매일 아침 문자를 보냈다.


시어머니에게 알밤을 바치는 며느리 심정으로 말이다.



솔직히 역겨웠다.


이혼하겠다는 사위의 간결한 문자에 놀란 우리 엄마에게

'오늘 이 시간부터는 장모님이라고 부르지 않겠다.'며 이혼을 통보한 사람에게


나를 밖으로 끌어내고 때려서 아파트 주민들에게 좋은 구경거리를 안겨준 사람에게


그 와중에도 회사에서 살아남아보겠다고 나에게 무마해줄 것을 간청한 비열한 사람에게 매일 아침 예쁜 문자를 보낸다는 것은 정말 치욕스럽기까지 했다.


'매일 알밤 세알을 갖다 바치다 보면 나도 그 사람도 마음이 변하겠지, 속는 셈 치고 한번 해보자.'


절박한 심정으로 문자를 보냈다.

칭찬할 게 없으면 지어내서라도 보냈다.


이러다 말겠지 싶었는지 처음에는 답이 없었다.

며칠 문자가 이어지자 답장이 왔다.

미치는 거 보고 싶냐고, 문자를 보내지 말라고 협박했다.


그래도 했다.


남편이 싸놓은 김밥을 아이와 먹은 다음 날 음식 솜씨가 좋다고 칭찬하는 문자를 보냈다.


답이 왔다.

김밥을 싸서 애랑 둘이서 먹으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내가 부엌으로 나오길래 같이 있기 싫어서 나가버린 것일 뿐이라고 했다.

나를 주려고 싸 놓은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래? 몰랐네. 그런데 너무 맛있었어. 잘 먹었어. 고마워.'


좋은 의도로 시작한 것이었는데 문자를 보내고 답장을 받을 때마다 가슴에 상처가 났다.

상처가 나서 곪고 있었다. 썩은 진물이 뚝뚝 흐르는 것 같았다.

문자를 보내지 않았으면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을 문자로 받아 들었다.


가슴팍이 너덜너덜해져서 더 구멍 날 때가 없을 때 즈음

상담 선생님에게 말했다.

"선생님, 그만 하려고요... 마음이 너무 따가워서 더 할 수가 없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나 역시 일방적이었다.

남편이 어떤 마음인지, 어떤 과정 중인지 배려하지 않은

오로지 나만 편하자는 일방통행이었다.


모습만 보아도 화가 나는 여자인데

내가 보내는 문자를 얼마나 역겹게 느꼈을까...








상담을 이어가면서 나름의 노력을 이것저것 하였지만

고슴도치를 만지면 만질수록 견딜 수 없이 마음이 따가웠다.


상담이 있던 날이었다.

지쳐있던 나에게 선생님이 말했다.


"앞에 곰인형 놓여 있지요? 남편분이라고 생각하고 하지 못했던 말이나, 하고 싶었던 말 그 어떤 것도 좋으니 속에 있는 말들을 한번 해보세요."


나와 마주한 의자에 사람만 한 곰인형이 앉아 있었다.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해라...'


TV를 보면

이런 장면에서는 조금씩 조금씩 꺼내던 속마음이 점점 커져 오열을 한다.

하다못해 말없이 서로의 눈만 들여다보고 있는 프로그램에서도 속절없이 눈물이 나는 게 다반사다.



건너편에 앉아 있는 귀여운 곰인형이 남편이라고 생각해보았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할 말이 많아서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서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게 아니었다.



지쳐 있었다.


저것이 정말 남편이라 해도

남편이라고 가정한다 해도

진심으로 어떤 말도, 어떤 마음도 내놓고 싶지 않았다.


상담받던 날들은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이었다.

보도블록에 힘없이 뒹구는 낙엽만 보고도

눈물이 쏟아졌었다.


지나가는 행인과 어깨를 살짝 부딪히기만 해도 눈물이 쑤욱 나왔다.



그런데

나를 지켜보고 있는 곰인형을 물끄러미 보면서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나지 않았다.



확실하게 느껴졌다.

남편에 대해 결혼생활에 대해

단 한 톨의 미련도 기대도 없음을.


설령 아이들을 뺏기고

길바닥에서 적선을 하는 거지로 살아간다 해도

남편의 손을 놓는 것이 전혀 후회되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선생님. 하고 싶은 말이 없어요. 남편한테 하고 싶은 말이 단 한마디도 없어요. 안 할래요."


상담 선생님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확신에 찬 내 눈빛을 보신 것일까.

선생님은 더 이상 재촉하지도 다시 시도하지도 않았다.



별거를 준비하고

이혼을 준비하면서


어디 대놓고 물어볼 곳도

털어놓을 곳도 없어

애꿎은 인터넷만 하루 종일 검색했다.



이혼을 고민하는 나 같은 여자에게 돌아오는

대부분의 조언들은


'여자가 이혼하면 아직 우리나라에선 힘들다.'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크고, 여러 제약이 많다.'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이혼함으로써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한다면 지지고 볶아도 지금이 차라리 낫다.'


'사랑 없이 영혼 없이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부부도 많다. 다들 그렇게 산다.'


라며 섣부른 행동을 말리는 선배(?)들의 조언과

'충분히 이혼하고도 남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지금을 견디며 산다.'는 멘털 갑인 인생 선배들도 많았다.



대부분의 비슷한 충고들을 읽어보며

나는 겁이 나기도 했다.


내가 너무 예민했던가.

내가 별것도 아닌 것에 일을 크게 만든 것인가.

시집 사람들은 다들 내가 잘못됐다는데 정말 그런 것인가.

내가 아직 이혼이란 것을 겪지 못해서 그 차가운 바람 속에 남는 엄청난 고난을 알지 못하고 이렇게 날뛰는 것인가.


수없이 되묻고 되묻고 되물었다.

그 물음엔 항상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이 들어 있었다.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창백하고 메마른 가슴이

헐벗은 마음이 쩍쩍 갈라졌다.


물어볼 곳도

내 편을 들어달라고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많은 날들이 지났다.


수없이 반신반의하며 결정을 미루던 밤들을 보냈고

춥고 외롭고 힘들었지만 길을 나섰다.

어린 두 아이들을 등에 업고 길을 나섰다.


정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십 년이란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전남편에게 감사한다.


내가 이혼이 후회될 만큼 예전의 내 남편이 참 아까운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다.

내가 뒤늦은 후회에 몸부림치지 않도록 전남편은 꾸준히 날 실망시켰다.


실망스러운 모습을 볼수록 나는 더 이를 악물고

바르게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을 다시 남편에게 힘없이 돌려보내지 않기 위해


남편보다 경제력을 더 기르고

또 결과로 보여주고

나를 강하게 만들어 놓아야 했다.


내가 가장이 되는 것이

아이들이 결국 아빠도 엄마도 볼 수 있는 상황인 것을

그 추운 길바닥에 나가기 전부터 나는 짐작했었다.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또 다른 누구는 비난하더라도

이제는 온 우주에 감사한다.



그런 남편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이토록 강해질 수 있었을까.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고

아이들을 키워내겠다는 고집을 지킬 수 있었을까.


훌쩍 자란 아이들을 보며

미안함과 동시에 대견함을 이토록 충만하게 느낄 수 있었을까.




마음이 헛헛할 때면

새벽에 공원을 돌면서

법륜스님 영상을 많이 들었다.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배우자에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늘 입버릇처럼 말하라고 하신다.

그것이 결국 나를 살리는 길이라고 하신다.



가슴으론 안되지만 머리로는 이해한다.

하지만

아직 그 경지까지 오르진 못했고

앞으로도 장담은 못하겠다.


하지만

상대에 대한 감사함이 진심으로 나오는 날

나는 좀 더 성숙해져 있을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편안한 눈빛으로

나와

세상과

얼마 되지 않는 지금까지의 시간들을

곱씹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입 베어 문 인삼이 처음엔 쓰디쓰지만

천천히 씹다 보면

단맛이 나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는 또 모른 척을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