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극배우 B씨 Nov 05. 2020

배우자를, 자녀를 때리는 사람들에게

이혼 후 이야기 #. 36




머리를 감으려고 세면대 옆에 쭈그리고 앉아

뒷목에서부터 거꾸로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욕실 바닥에 머리카락이 검은 미역처럼 힘없이 내려앉았다.


물이 뿜어져 나오는 샤워기를 머리에 갖다 댔다.

머리카락을 타고 물줄기가 흐른다.



그리고 여지없이 올라오는 그 기억에 소스라치며

눈을 꾹 감는다.




결혼하면서 나와 전남편은 서로의 아버지 이야기는 잘하지 않았다.

둘 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에 추억이 그다지 없었다.


내게 기억이라곤 신나게 맞았던 것이 전부일 정도였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우리들에게 생전 처음으로 주셨던 용돈을 다시 회수해가셨던 기억도 난다.

외울 시간을 줬는데도 우리 가족의 이름을 전부 한자로 쓰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할머니까지 포함해 그때 우리 가족은 9명이었다.


우리를 일찍 떠나면서

노잣돈으로 쓰시려고 하셨나 보다.



아버지를 저주하거나 증오했던 적은 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동안은 아빠 산소에 가서 울다가 내려오는 것이 일이었다.

왜 슬펐는지 모르겠지만

아빠가 나를 때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땐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폭력 앞에 무기력해지는 것이 일상이 되면

어느덧 맞고 있는 나를 합리화하게 된다는 것을 그때는 알리가 없었다.


어쨌거나 나에겐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였고 남편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서로 할 이야기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나를 때리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에 다시는 폭력에 노출될 일이 없다고 어린 나는 안심했다.


다만 아버지처럼 누군가가 소리치는 장면, 몸싸움을 하는 광경이 보이면 정신이 반쯤 나가 그 자리를 회피하거나 심장이 찢어질 듯 쿵쾅거려 견디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잘 생기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실습생으로 시작한 사회생활에 이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고, 폭력과 욕을 하지 않는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지만, 결혼한 이 남자는 나와 동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쳐도 내가 '맞는 것'에 대해 '폭력'에 대해 얼마나 민감한지 이야기를 해둘 걸 그랬다.


결과적으론 소용없는 후회지만,

누구에게나 절대로 건들지 말아야 할 아킬레스건이 있기 때문이다.



이혼을 하자는 전남편에게 아이들을 생각해서 다시 고려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 한 번의 주먹질이 있던 날부터 이미 나는 남편을 마음에서 서서히 죽이고 있었다.


내 마음에 없는 존재가 되었고 내게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남편이란 사람은 내 마음에서 죽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 전남편이 나에게 폭력을 쓴 것은 별거를 촉발시킨 그 날 한 번이었을 것이다.


아이들과 거실에서 자다가 별안간 머리가 들려 올라가는 느낌에 잠을 깨고 보니, 전남편이 내 머리채를 잡고 현관 밖으로 나가라며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날 내 머리에 각인된 장면은

미쳐 남편 손아귀에 잡히지 못한 남은 머리카락 그 검은 미역 같은 물결이 버텨보려는 내 몸부림을 따라 거실 바닥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생각대로 순순히 끌려 나오지 않자

남은 한 손으로 내 얼굴을 내리쳤다.

뒤통수가 아닌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은 뺨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퍽  퍽  퍽


한번, 두 번, 세 번.....

아버지한테 회초리로 매를 맞으면서

나도 모르게 숫자를 세고 있던 아주 오래전 기억이 수면 위로 두둥실 올라왔다.



아이들이 바로 옆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거나 악을 쓰면 아이들이 깰까 봐

이 무서운 장면을 볼까 봐


소리 없이 그렇게 버둥거렸던 밤이었다.




이혼을 하고 나서도 머리를 감기 위해 머리카락을 쓸어내릴 때면 그날의 기억이 겹쳤다.


씻으려고 들어간 욕실 바닥에서 그때의 기억과 마주하고는 젖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한참을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고 있어야 했다.


'괜찮다 괜찮다, 나는 괜찮다.'



검은 내 머리칼이 흔들렸던 기억이 싫어

갈색으로 염색을 해보았다.

욕실 바닥에 끌리지 않을 정도로 미용실에 가서 길이를 잘라도 보았다.


하지만 갈색머리는 젖으면 검은색이나 마찬가지였다.

잘린 머리카락은 다시 자랐다.



눈을 감으면 감을수록 장면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보지 않으려고 눈을 더 꾹꾹 감았다.


그렇게 머리를 다 감으면

어지럽고 앞이 뿌옇게 보였다.

힘주어 감은 눈덩이가 항상 아팠다.



거지 같은 결혼 생활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이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이혼만은 막고자 했었다.


하지만 이혼과는 별개의 문제로

성인이 되어서 그것도 우리 엄마처럼 남편이란 사람에게 폭력을 당했던 나는 이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두고두고 그 '매질'을 되갚아주었을 것이다.


아마 내가 느낀 것보다 2배는 더 비참하게 결혼생활 동안 전남편에게 되돌려주었을 것이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까지 담아 더 독하고 아프게 갚아줬을 것이다.


전남편은 운이 좋다.

내게 뺨 한번 맞지 않았다.


아버지와 남편을 떠나

사람이 사람을 왜 때리는지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하면 맨땅에 머리라도 박을지언정

왜 남의 몸을 상하게 하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 눈이 돌아가서

습관적으로 가족을 때리고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눈물을 흘리며 빌고 또 비는 사람들이 있다.


울면서 비는 것을 보니 가여우니까

손찌검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다시는 안 그런다고 하니까

또 그렇게 넘어간다.


한동안은 눈치를 보며 잘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니

'그래, 저 양반이 천성이 악한 사람은 아닌데...'

내가 맞았던 순간 느꼈던 치욕과 모멸감을 어느새 잊는다.


폭력의 수위와 빈도는 더해가고

나중엔 계란으로 멍든 얼굴을 문지르고 있으면서도

나의 인내와 주저함이 상대를 더 폭력적으로 길러냈다는 것을 부정한다.


나는 그렇게 될 때까지 그 남자와 살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딱 한번 있었던 나에 대한 폭력은 절대 용서하지도, 용서할 생각도 없다.


다만

그날의 폭력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사고였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술 먹고 음주 운전해서 사람을 다치게 해 놓고도

심신 미약이라는 멍청하고 책임감 없는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는

정신병자 같은 사람에 의한 사고 말이다.



큰아이가 두어 살 때였다.

시어머니와 신경전을 벌이느라 잔뜩 예민해있었는데 그날따라 자꾸만 칭얼거렸다.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아이의 그 작은 손바닥을 펴서 옆에 있던 플라스틱 머리빗으로 찰싹찰싹 두대를 때렸다.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날이 처음이지 마지막이었다.


내 성질대로 화풀이를 한 뒤에야

엄마인 나를 보며 눈물 흘리는 아이가 보였다.


아버지에게 맞으면서 그렇게 울며 자라 놓고

나는 절대 아이를 낳으면 때리지 않겠다고, 손가락으로도 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해놓고

나도 아이를 때리고 있었다.


두고두고 마음이 아팠다.

떠올리는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아이를 때렸다고 감히 일기장에도 쓰지 못했다.

무섭고 부끄러웠다.



시간이 훌쩍 흐르고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이 없다는 딸에게

사과를 했다.


"엄마가 그랬어. 엄마가 널 때렸어. 플라스틱 빗으로 손바닥을 두대 때렸는데 때렸다는 걸 알고 나서 너무 마음이 아팠어. 엄만 너 잘되라고 때린 거 아니었어. 그냥 엄마가 화가 나서 넌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때렸어. 아프게 해서 너무 미안해, 엄마가 너무 미안해... "


사과했다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빠에게 맞은 기억이

남편에게 맞은 기억이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아이를 때린 기억이 없어지지 않는다.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 일 이후로 나는 어떤 경우에도 아이들을 때리지 않았다.

미운 일곱 살 집에 있다는 회초리나

회초리 역할을 대신하는 긴 막대기가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엄마. 선생님이 긴 막대기로 장난치고 말 안 들은 남자애들 손바닥을 때렸어."


"엄마. 공부방 선생님이 숙제 안 했다고 등을 때렸어. 머리를 콩~ 쥐어박았어."


"엄마. 친척 언니 집에 가면 냉장고 위해 긴 막대기 있어. 장난감 안 치우고 싸우면 그걸로 세게 때려!"


"왜 물어보지도 않고 나를 아프게 해? 어떻게 사람을 때릴 수가 있어?"


집에서 '회초리'라는 것을 모르고 자란 아이들은

흥분하며 밖에서 보고 온 것을 말했다.




자식이 잘되라고 때리는 매는 세상에 없다.

상대방이 화를 돋우니까 순간적으로 욱해서 휘둘러도 되는 주먹질도 없다.


그냥 때리는 사람들의 어리석고 겁쟁이 같은 변명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상대방이 매를 번다며 오히려 뒤집어 씌우는 것일 뿐이다.


진심이라면

그 매를 맞고 아이가 잘되야한다.

부모로부터의 폭력에 대해 아이가 아픈 기억이 없어야 한다.

이유 없이 당한 폭력에 대해 수긍이 가야 하는 것이다.


"어릴 때 부모님께 맞았는데

맞으면서도 가슴이 정말 후련했고 지금도 이렇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

너무 좋은 추억이라 내 아이들에게도 자주 회초리나 주먹을 휘둘러야겠어."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수돗가에서 아빠 장화발에 맞았던 기억들은

그 당시 계속해서 맞은 배가 너무 아팠고 끔찍한 기억이라 살짝만 떠올려도 마음이 힘들었다.


3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선명했던 기억들을 수첩 한 귀퉁이에 그렸다.

펜을 잡고 있는 손이 벌벌 떨렸다.


아빠한테 발길질을 당하며

신발이 벗겨진 채 혼자 떨고 있었던 그 옛날 일곱 살의 나에게

이제 커서 어른이 된 지금의 나를 보내주었다.

 

어린 나를 아빠의 발길질로부터 막아주었다.


등을 쓸어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많이 아팠지? 이제 괜찮을 거야. 내가 막아줄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울고 싶으면, 후련해질 때까지 크게 울어. 괜찮아.


오래도록 안아주었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 잊지 말고 손톱 깎아 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