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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Nov 03. 2020

엄마! 잊지 말고 손톱 깎아 줘

이혼 후 이야기 #. 35








야근 없이 퇴근하기 위해 정신없이 일한 하루가 막 지났다.

약이 맞지 않는지 아니면 일이 힘들었는지 씻지도 않고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침대 끝에 잠깐 뉘었다.


별거를 하면서 섬에 데리고 들어올 때 겨우 6살 생일을 갓 넘겼던 작은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나에게 호기롭게 문제집을 다 풀었다며 가지고 왔다.

민의 흔적도 없이 씩씩하게 풀어놓은 산수문제.


자세히 보니 적혀있는 숫자 모두를 더해놓았다. ㅎㅎ

산수를 내가 가르쳐 준 적이 없으니 아마 언니가 하는 것을 보고 손가락 발가락을 꼼지락 거려가며 풀어봤던 모양이다.



피곤한 몸에 박카스 주사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 사르륵 퍼진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헛기침으로 대신하고

아이를 보며 폭풍 칭찬을 해주었다.


"우리 딸, 벌써 다 풀어버렸네?^^ 숫자를 하나하나 모두 더하는 이 방법도 맞는데, 학교에 가면 네가 푼 것과는 조금 다르게 가르쳐주실 거야. 그때 가서 다시 배우자 알았지?"


아이는 백점이라는 엄마 말에 이미 의기양양하다.

천정 높은 줄 모르고 한껏 솟구친 귀여운 어깨가 말해준다.


엄마, 산수는 나한테 제일 쉬워!







퇴근이 조금 늦을 땐 아이들이 주차장에 나와서 앉아 있었다.

서쪽으로 지는 해를 마주 보며 엄마 차가 들어오는 아파트 진입로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아이의 얼굴에도 석양이 곱게 내렸다.


멀리서 엄마 차가 슬금슬금 들어오면 이 녀석들은 벌떡 일어나서 방방 뛰었다.

엄마 차에 달려들다가 한차례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난다.

"움직이고 있는 차에 가까이 오지 말랬지!"


하나부터 열까지, 작은 것 까지 일일이 가르쳐주고 다짐받고 확인하고 그게 일상이었다.

작은 아이들에게 유일한 보호자는 나뿐이었다.


아이들은 엄마의 존재를

나는 아이들을 산소통처럼 절박하게 붙들고 살았었다.



한창 크는 아이들이 영양이 부족할까 봐 피곤해도 집밥을 해서 먹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정말 피곤할 때는 누구라도 밥을 좀 차려줬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이 간절했다.


재잘재잘하는 아이들이 한없이 이쁘다가도

자고 일어나면 10살쯤 더 먹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어떤 반찬을 해주어야 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을 때는

떡볶이를 만들었다.


별 맛이 없었을 텐데도 아이들은 곧잘 먹어주었다.

물론 듬성듬성 있는 야채는 쏙쏙 잘도 피해 가며 먹었다.


정규직이 되어 안심하고 있는 나에게 아이들은 진지하게 말했다.

"엄마, 회사 그만두고 우리 학교 앞에서 떡볶이 장사하면 안 돼? 그럼 내가 학교 끝나고 매일 갈 수 있는데."





야간 근무를 해야 하는 날이면 아침부터 바빴다.

아이들 저녁밥, 내일 아침밥, 간식, 과일...

반찬통에 끼니별로 음식을 담아놓고 메모를 붙여두었다.


혼자 잠들어야 하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따로 봐줄 사람이 없었다.


아침에 부랴부랴 와서 비워진 반찬통을 보면 안심이 되었다.





비 오는 날이면 김치전을 했다.


김치는 맵지 않게 조금

해물을 싫어하는 큰아이를 생각해서 오징어도 생략

김치보다 밀가루가 더 많이 들어간 밍밍한 김치전을 아이들과 웃으면서 뜯어먹었다.


한 장을 다 굽기도 전에 한 접시를 뚝딱 해치우는 아이들 덕분에 그 자리에서 10장은 부쳐냈다.

아이들은 먹는 만큼, 단잠을 자는 만큼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매일 아침과 저녁, 끝나지 않는 집안일과

직장일, 부수적인 여러 가지 일들.


휴가 때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 놓고

평일 낮에만 할 수 있는 은행업무, 관공서 볼일을 보러 뛰어다녔다.


혼자서 해내기엔 정신이 없었다.



일요일 저녁이면 행사처럼 아이들 손톱 발톱을 정리해주었는데

너무 피곤했던 주말엔 잊어버리기도 했다.


꼭 그런 주말은 다음날 선생님이 손톱 검사를 하셨다.



아이들은 바쁜 엄마를 위해 내 책상 위에 메모를 남겨주기도 했다.


빠트리는 게 많아질수록 마음은 덩달아 급해지고, 작은 실수에도 스스로 예민해졌다.


다 완벽할 순 없는 건데

왜 그땐 누가 시키지도 않은 조바심이 나고

완벽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그쳤을까.



홀로 양육하는 엄마의 입장에 있었던 나는

아빠의 빈자리를 느끼는 순간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매 순간을 긴장 속에서 살았었다.


아이들은 정작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는 그 빈자리라는 것은

결국

'아빠 없는 아이들 티가 나는 것'을 염려했던 나의 고집이었고 불안함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수년 전의 추억들이지만

당시에 내가 남겨두었던 일기나 사진들을 들춰 보면

낮에는 전화로 문자로 전남편과 양육비 문제를 가지고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싸웠던 여자였으나


밤에는

낮의 그 모든 일들과 아이들의 표정 하나하나,

작은 그 무엇의 걸림에도 마음 아파하고 자책하고 힘들어했던 내가 보인다.


부모가 아니었다면 겪지 않았을 시간들이지만

아프기만 한 훈장은 아니었음을 나는 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한창 스티커를 모으는 것에 집중하던 때가 있었다.

다른 것보다 비쌌던 올록볼록한 스티커를

외근 나간 길에 들른 문방구에서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고르던 기억이 난다.


고사리같이 작고 귀여운 손으로

"우와 우와~~."를 연발하며 스티커를 뗐다붙였다했던 아이들.


그런 웃음반, 눈물 반의 기억들이 있어서

나는 그때가 행복했고

지금 너무 커버린 아이들과도 그 느낌 그대로 행복하다.



끝나지 않을 어두운 터널일 줄 알았다.

터널 끝엔 더 어둡고 긴 터널이 새로 기다릴 거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아이들이 하염없이 나만 바라보고 있을 때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임에도

내 아이들만 더디 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불이며 베갯잇에 묻어나는 달큼한 아이들의 땀냄새가 그리워진다.


아이들이 내 옆에 여전히 있는데도

늘 아이들이 그립고 그립고

사랑스럽다.



지금은 눈 나빠진다, 거북목 된다는 겁을 주며 잔소리를 하지만

십 년 후쯤에는

오늘처럼 스마트폰에 얼굴을 박고 단답식의 대답만 하는 사춘기 아이들이


또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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