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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Mar 28. 2021

이유는 '내가 아파서'였다

이혼 후 이야기#. 55




"아빠가 직장 그만두고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오고 싶대."


"왜?"


"그냥 우리랑 가까운데 살고 싶나 봐."


"고모들도 다 가까이 살고, 아이 적응도 그렇고 오랜 지인들이 있는 그 동네서 사는 게 훨씬 더 안정적일 텐데. 단지 너희들이 있다는 걸로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으로 이사를 온다는 건 좀 그럴 것 같은데."


"내 말이."


무심하게 아빠 근황을 뱉어내며 혀를 차는 아이 말에 설거지하던 나는 없던 오지랖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이는... 싫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빠를 자주 볼 수 있어 좋을 것 같지만 엄마 앞이라 적극적으로 아빠를 대변하지 못하는 것일 뿐.




아이들 아빠는 이제 오십을 바라본다.


그 사람에게 남은 건 

중고로 사서 더욱 중고가 된 경차 하나, 

재혼해서 낳은 이제 막 3살이 되려고 하는 딸 하나다. 


재혼한 여자는 아이를 낳고 나갔다. 


두 번째 결혼도 실패했다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싫었을까, 그 사람의 선택인지 두 사람의 합의인지 모르겠지만 아직 한창 엄마를 찾을 어린 딸아이는 오십을 코앞에 둔 아빠와 살고 있다.




여전히 애들 아빠는 자신의 어린 딸을 앞세워 아이들에게 자주 영상통화를 걸어온다. 


엄마인 내가 아무리 무덤덤한 표정을 지어도 아이들은 전화기를 들고 방에 들어가서 아빠와 통화한다. 



"나 같으면 절대 애들 안 보여줘요. 전화도 못하게 할 거야. 자기가 무슨 자격으로 아이들과 통화를 해?" 


주변의 지인들이 볼멘소리를 할 때에도 나는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가끔 절친한 한두 명의 친구에게 수시로 걸려오는 전남편 전화가 거슬리고 짜증 날 때가 있다는 하소연을 하기도 하지만 나는 아이들 앞에서 '아빠랑 통화하지 말 것'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나는 착한 여자 병에 걸린 것도, 좋은 사람 코스프레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이혼은 두 사람의 선택이었고 졸지에 이혼가정에 놓이게 되고 피해를 본 아이들 이기에 죄가 없다. 

아이들에게 한쪽 부모를 못 보게 할 권리가 두 사람에겐 없다.'

라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나 당연한 논리였고 지금도 변하지 않는 내 주관이었다. 

그 주관으로 인해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자유롭게 아빠와 왕래하고 있다.



양육비를 가져오기 위해 이혼소송을 불사하면서 싸웠던 지난날의 기억과 나의 복수심(?)으로 인해 아이들과 아빠를 단절시키고 싶었겠지만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나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양육비가 며칠만 늦게 입금되더라도 문자로 불같이 화를 내면서도 아빠의 철없음을 흉보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생각이 있겠지."라고 짐짓 자비로운 척을 하는 내 이중적인 모습을 말이다.




잠시 멈췄던 운동을 다시 시작했던 새벽, 

어슴프레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쳐다보며 걷다가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시작은 어릴 때 다쳤던 왼쪽 발목의 고질적인 통증이었다. 


아빠가 술에 취해 여덟 살이었던 나를 마당으로 던졌고 왼쪽 발목에 금이 갔다. 


지금 생각하면 허리가 주저앉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빠의 고집으로 치료를 못했던 그 발목은 자라는 동안과 40대가 된 지금도 조깅을 할 때마다 늘 통증이 배어 나왔다. 


발목보호대를 착용하고 뛰어보기도 했고, 물리치료, 파스를 붙여보기도 했지만 뛸 때마다 찾아오는 통증은 늘 아빠를 생각나게 했다. 


그립거나 유쾌한 감정으로 떠올리는 아빠가 아닌 마당에 던져져 너무나 아팠던 그 발목 통증과 함께 떠오르는 유년의 기억은 내가 오래도록 아빠를 용서하지 못했거나 지금도 미운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은연중에 만들고 있었다. 



그 이후 아빠는 내가 12살 때 올망졸망 육 남매와 시어머니를 책임져야 하는 우리 엄마를 젊은 과부로 만들고 갑자기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 항상 술에 취한 아빠에게 일주일에도 몇 번씩 맞고 살았던 나는 오히려 때리는 아빠가 이제 없다는 게 홀가분하다고도 생각되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나, 집안을 일으켜야 하는 건 내 과제가 아니었으므로. 



아빠가 돌아가셨던 내 열두 살 여름, 

아빠는 내게 '나를 무진장 때리다 돌아가신'분으로 각인이 되었다. 


가끔 아빠가 웃는 모습을 기억해 내기도 했지만 이내 '훈계를 빙자한 폭력을 쓴 어른'으로만 생각하려고 했다. 




달도 없는 새벽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고 동네를 크게 한 바퀴 뛰고 있었다. 

어김없이 왼쪽 발목이 아팠다. 


목표했던 사거리 신호등까지만 억지로 뛴 뒤 절룩거리며 천천히 걸었는데 갑자기 내 마음에서 볼멘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빠는... 나 이렇게 때려놓고 아프게 해 놓고 사과도 안 했어. 


아빠가 더 이상 안 무서워질 때까지 내가 자란 다음에라도 아빠한테 말해야 했어. 


사과받고 싶다고. 


사랑이었든 훈육이었든 그렇게 심하게 매질을 하면 안 되는 거였다고. 


하지만 아빠를 이제는 용서한다고 말해야 했어.'



'아빠가 부끄럽고 민망해서 나한테 사과를 못했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내가 먼저 씩씩하게 그 이야기를 꺼냈으면 아빠도 용기를 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수도 있었잖아.'




하지만 아빠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눈앞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제 아빠를 용서한다고, 사는 게 힘들어서 그랬을 거라고, 그래도 아빠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아빠는 이 세상에 없다.




내가 아이들을 아빠와 어떻게든 만나게 해 주려고 오랜 시간을 운전을 해서 데려다주고 


연락을 꾸준히 할 수 있게 재촉하고 


아빠네 가서 자고 올 수 있도록 한 것은 어쩌면 유년시절의 내가 아빠와 물리적으로 단절된 뒤 어디 가서도 채우지 못한 아쉬움과 확인받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미련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은 건 이미 지나간 일이니 그렇다 쳐도, 이제라도 아빠에게 사과를 받고 싶었었는지 모른다.


미안했다고 아프게 때려서 미안했다는 말이 듣고 싶었었는지 모른다.



따귀를 연달아 맞아 

관자놀이까지 불그레하게 물든 채 

아빠가 또 부를까 봐 방문 뒤에서 숨죽이며 훌쩍이는 내가 보였다.


종아리에 새겨진 회초리 자국이 오늘은 몇 줄이나 되는지 엉덩이 너머로 새어보며 땟국물로 얼룩덜룩해진 얼굴을 아직 눈물에 마르지 않은 소매로 쓸어내리는 내가 보였다.




마스크가 숨 가쁘게 펄럭거렸다.

마스크로 덮인 얼굴이 습기로 금세 후끈해졌다. 



울음이 터졌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에 간간히 오가는 자동차의 라이트가 사뭇 눈부셨다.


볼 사람도 없었지만 눈물이 흐르는 걸 들키기 싫어 모자를 더욱 내려썼다.



그래서 그랬겠구나. 

아빠한테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확인받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러질 못하니까 


내 아이들도 아빠한테 듣고 싶은 말을 듣지 못하고 커버릴까 봐 

혹시나 마음에 오래 남아 상처가 될까 봐

너는 조바심이 났겠구나. 


아이들이 불쌍하고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그런다고 했지만 


사실은 다쳤던 네 마음이 못내 아파서 그랬구나



울고 있는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해주지 않았으나

어쩌면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까


사십이 넘은 나는 어린아이처럼 끅끅소리를 내며 울면서 걸었다.

장갑 낀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옷소매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여보, 00 아빠.

당신이나 나나 이렇게 살아있을 때, 

말할 수 있을 때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말해줍시다.


아이들 눈을 보며 대화할 수 있을 때

비록 

미안함과 민망함에 떨리는 음성일지라도 

자주자주 말해줍시다.


이러이러한 게 미안했고 

또 이런 건 감사하고 고맙다고.


엄마도 아빠도 너희들보다는 나이를 더 먹었지만 그전에 사람이라서 이렇게 실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낳은 너희들에게 상처를 준 것은 너무 미안하다고 말이에요.



잘하지 못한 엄마 아빠였지만, 그런 부모를 보면서 교훈 삼아 너희들은 더 지혜롭고 현명하게 살아가라고. 


아이들 마음에 오래오래 남도록 

우리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또 잘 자라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너희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이 부족한 엄마 아빠가 최고로 기뻤던 일 중에 1번이라는 것을요.





어쩌면 나는

아빠 마음에 안 들어서 당연히 맞을 매를 맞았을 수도 있다.



그럼 잠시 슬퍼진다.



하지만

숭숭 솟아오르는 눈물방울에 시야가 가려져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발이 차이면서도 나는 적당한 내 마음을 찾아냈다.





아빠.... 그래도
사랑합니다.
아빠는 최선을 다하셨어요.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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