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와 새우 그리고 파가 촘촘히 박힌 해물파전 (feat. 막걸리)
어떤 일을 하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지만 어떤 일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논문 본심을 이주 정도 남겨둔 시점에 읽어야 할 아티클도 많고 정리할 것도 넘쳐났지만 유난히 그날은 어떤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연구실에서 집에 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주르륵 내리는 비도 아니었고 토도독 몇 방울 떨어지는 비도 아니었다. '적당히' 내리는 비에 괜히 마음이 심난해졌다.
비도 오는데 급만남 어때?
그녀였다. 중학교 동창이 일하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친구였는데 동갑내기고 서로 여차저차 비슷한 점이 많아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그녀의 메시지 하나로 오늘 공부를 하지 않을 정당한(?) 이유가 생겨버렸다. 비가 오니깐 너무 당연히 파전에 막걸리를 먹어야 한다며 홍대로 향했다.
퇴직 후에 소일거리 삼아 주점을 시작했다는 주인 내외는 따박따박 연금이 나오기 때문에 '좋은 재료'를 팍팍 아끼지 않는다는 철학을 강하게 어필하고는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찹쌀 막걸리 한 병을 시켜놓고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사방으로 뻥 뚫린 창가에는 빗소리가 가득했고 전 부치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눈 앞에는 편안한 자세로 막걸리를 마시는 그녀가 보였다. 이 얼마나 좋은 순간인가.
막걸리 한사발을 비울 때쯤 기다리던 해물파전이 나왔다. 주인 내외의 말처럼 오징어와 새우 그리고 파가 촘촘하게 박힌 알짜배기 해물파전이었다. 그녀의 스쳐간 인연과 좀처럼 풀리지 않는 나의 논문 그리고 알알이 엮여 있는 우리의 고민들도 눈 앞에 놓인 해물파전처럼 '알짜배기'가 될 수 있을까?
젓가락으로 해물파전을 쭈욱 찢어서 눈물처럼 짭쪼롬한 양념장에 콕 찍어 입안 가득 넣는다. 플라스틱으로 된 막걸리 사발을 틱 부딪히며 친구와 괜히 헤실거린다. 멈추고 싶을 때가 있다. 다 관두고 포기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비가 온다'는 이유만으로 친구와 만나 파전에 막걸리를 먹는 것처럼 아주 '가볍게' 멈추고 싶은 순간이 있다.
별 생각이 없다가도 '비'가 내려서, 그저 냄새의 유혹을 떨칠 수 없어서 해물파전과 막걸리 앞에 둘러앉는 것처럼 아주 작은 이유만으로도 쉼표를 찍을 수 있다면, 그 쉼표가 무능으로 비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호흡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당신에게 권하고 싶다. 멈추고 싶은 이를 위한 식탁.